150화
귀신 홍령이 자신의 천재성을 가감 없이 발휘하리라 천명하던 그 시각.
반야원 원장은 매우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제기랄. 어디서 굴러온 돌이 풍파를 일으키려고. 제기랄, 제기랄.”
여인이라도 주무르면 기분이 좀 나으련만. 아까까지 주물럭거리던 기녀는 원장이 돌아왔을 땐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또 기녀를 불러오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소림이 반야원에 지원해주는 금액을 챙긴다 해도 그게 뭐 대단한 돈이나 되어야지. 의원들이 기본 생활을 할 정도로 돈을 빼고 나면 얼마 남는 것도 없는 처지였다.
“그놈이 방장에게 쥐여준 돈의 반만 반야원에 떨어졌어도. 젠장!”
생각을 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반야원에 일절 돈을 주지 말라는 그 말만 아니었어도 속으론 고까웠을지언정 겉으로는 간만에 나타난 물주를 성심성의껏 대해줬을 거다.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서 콩고물 떨어지기를 바랐겠지.
헌데 그놈은……!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군. 어디 보자. 환자나 보호자 중에 얼굴이 반반한 계집이 있던가…….”
기녀를 부르는 데 돈을 쓰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곳으로 생각이 튀었다. 공짜로, 그것도 콧대 높은 기녀들보다 고분고분한 쪽으로 말이다. 제 언니의 다리가 곯아 걸을 수가 없다고 사정사정하던 어린 계집애의 얼굴이 떠오르자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님! 알아왔습니다!”
“그놈이랍니다, 그놈!”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던 원장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금태양인지 뭔지 하는 놈의 정보를 물어오라고 보낸 의원들이 돌아온 탓이었다.
“그래. 진짜 금왕의 자식이 맞나?”
“맞답니다. 호북에서 의원을 한 지 일 년이 넘었답니다.”
“무당에서 화산지회 호북 예선을 할 때 의원으로서 이름을 날렸답니다. 그 전에는 자격을 따기 전에 수술을 했다고 하고요. 이름난 무인의 잘린 팔을 붙였다대요?”
“스승이 누구인지는 안 밝혔는데, 그자의 주치의가 사대신의 중 한 명이었답니다. 실력 하나는 확실한가 봅니다.”
의원들이 저마다 알아 온 것을 늘어놓았다. 무엇 하나 원장의 마음에 드는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의맹 소속의 의원이긴 한데 무당의가 아닌 건 맞고? 그게 의맹 법규상 가능한가? 모든 준회원은 정회원에 소속되어야 할 텐데. 우리가 소림의에 매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 양양에서 온 약재상에게 캐물었는데, 듣자 하니 양양 사태가 있었을 때 활약한 것을 참작하여 무당이 예외 자격을 주었다 합니다.”
“그게 진짜 된답니까?”
“되니까 그런 자가 있는 거겠죠? 그러면 그자는 이 소림 영역에서 의업을 해도 치료비를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거야 소림의가 아니면 다 가능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무당의 영역에서 의업을 해도 각종 조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거겠지. 우리가 어찌하여 이 거지 같은 소림의 동냥밥이나 얻어먹고 있는가. 무당이 받아가는 돈이 어마어마해서가 아닌가? 그것만 아니었어도 우리 모두 그쪽으로 넘어가 이름 있는 의원 하나 차리고 떵떵거리며 살았을 게야.”
원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도 실력이겠지만 역시 금가장의 입김이 있었을 걸세. 그렇지 않다면 그자만 그런 특혜를 받을 이유가 없지.”
“원장님 말씀을 들으니 실력 또한 의심이 됩니다. 돈으로 명성을 만든 게 아닐까요? 부잣집에서는 달리 재주 없는 자식에게 번듯한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돈을 쓴다는 얘길 들어봤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한량 노릇 하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야 의원이라고 이름 붙여놓으면 그럴싸하니. 실제 진료는 다른 자들이 하는 걸 수도 있다.”
“당가의 자제가 그런 일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천하의 사천당가도 돈으로 움직이다니. 금가장의 재력이 대단하긴 하군요.”
다들 표정에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소림의가 되는 이들은 집안이 한미한 경우가 많았다. 자질이 있어도 수련부터 적잖은 돈을 투자해야 하는 무당의에 비해, 소림의는 약간의 자질만 있다면 의술을 무료로 익힐 수 있었다.
대신 반야원에서 일정 기간을 일해야 하고, 이후에도 소림의 영역에서 소림이 주는 약간의 돈만 받고 의료 봉사를 실천해야 하지만, 아무런 밑천이 없는 이들에게는 소림의만 한 것이 없었다.
그랬던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부잣집 자제 금태양의 존재에 불쾌함을 느꼈다.
그 불쾌함의 이름은 시기와 질투였다.
“금가장만 한 부잣집까진 아니어도, 집에서 조금만 뒷받침 해줬어도 우리가 이거보단 이름을 날렸을 텐데 말입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가면의룡이 뭔가? 나였다면 벌써 명의라 불렸겠지. 원장님이라면 지금쯤 사대신의 중 한 자리를 차지하셨을 겁니다.”
아부 섞인 발언이었지만 모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은 계면쩍은 듯, 그러나 썩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제 와 딱히 그런 것을 바라진 않네. 소림의로서 중생구제에 힘쓰는 것 또한 보람찬 일이지. 항상 부처님께 이 재주를 바친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원장님!”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셨다니, 원장님이야말로 부처이십니다!”
원장은 쓸쓸한 표정으로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연기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뿜어내며 착잡하게 내뱉었다.
“허나 나 또한 인간인지라, 금 의원이 반야원에만 재물을 풀지 않은 것이 못내 섭섭하긴 하군.”
“맞습니다. 소도 여물을 먹어야 열심히 일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만한 돈이 주어지면 얼마나 열심히 진료를 보겠습니까?”
“그자의 눈이 기억납니다. 우리를 무슨 천하의 악적처럼, 치료해야 할 병마처럼 보고 있더군요.”
“필시 우리를 휘어잡으려 하겠지. 도련님들이란 원래 그렇지 않나.”
착잡해 보이던 원장의 눈빛이 일순간 변했다.
“허나 그런 도련님들을 한두 번 겪어보더냐?”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연등회에 참석한 각 문파와 세가의 젊은 피들 중, 종종 반야원에서 벌어지는 행태에 단죄를 하겠다 혈기를 불태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잡초처럼 삭초제근 하는 데 성공한 자는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다. 명심들 하거라. 반야원의 주인은 바로 우리다.”
원장이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지금까지 젊은 혈기를 뽐냈던 이들은 길면 칠 주야, 짧으면 삼 일 내에 손을 들고 그들과 적당히 야합하기를 선택했다. 과연 금태양이라는 도련님은 며칠 만에 손을 들 것인가?
“내기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원장님?”
“나는 삼 일에 걸겠습니다!”
“저는 하루에 걸죠!”
어두웠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공공의 적을 놀림감 삼는다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다. 거기에 내기가 걸리자 다들 너 나 할 것 없이 돈을 걸었다. 물론 그 돈은 제 주머니의 돈이 아닌 반야원의 재물이었다.
탁탁.
원장이 곰방대의 재를 털었다. 모두가 그 동작에 시선이 모였을 때, 원장이 입을 열었다.
“반나절. 내가 이기면 모두에게 남초(南草)를 돌리겠네.”
“예!? 정말이십니까!”
“우와!”
모두의 얼굴에 기대감이 번졌다.
남초는 담뱃잎을 말린 것으로 본래 곰방대로 피워 통증을 가라앉히는 등 약재로 쓰이지만 일부에서는 기호품으로도 쓰였다.
물론 반야원에서는 약재로 쓰기보다는 원장 개인의 사적인 용도로 쓰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지금처럼 내기물품이나 상으로 쓰이기도 했다.
“헌데, 현금법사가 제 집에 별 관심이 없는 건 정말 확실한가?”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자신들이 반야원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그들은 결코 소림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무승 현금은 이대제자의 맏이요, 그 실력으로도 무림에서 알아주는 명사였다. 금태양을 욕보였다가 자칫 현금이 그들에게 화살을 돌리기라도 하면 그들은 반야원에서 쫓겨날 게 분명했다.
“확실합니다. 현금 법사께선 소림에 적을 올린 후 한 번도 금태양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으시답니다.”
현금법사의 바로 밑 사제에게 들었다는 얘기에 원장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삼켰다.
“좋군. 그러면 금가장의 도련님을 맞을 채비를 해볼까?”
* * *
다음날.
나는 채비를 갖추고 반야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당당도 금동이도 없이 혼자였다.
[대신 내가 항상 함께 있잖아요? 나만 믿으라고요~!]
정문에는 여전히 현판이 위태롭게 달려 있었고 어제의 문지기가 띠꺼운 표정으로 날 보곤 안으로 턱짓을 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저 문지기 또한 한 패로군.
[콩고물을 받아먹는 쪽일까요, 아니면 의원들에게 먼저 보여줄 수 있다면서 웃돈을 받는 쪽일까요?]
둘 다일 거 같은데?
정문에서부터 구린 냄새를 맡으며 들어서자 어제의 의원들, 그리고 원장이 웬일로 마당에 도열해 있었다.
“어서 오게나, 금 의원.”
원장은 어제와 달리 제법 예의를 갖춘 태도로 내게 먼저 인사를 했다.
“어제는 우리가 무례가 많았네. 의맹의 자격이 확인되었고, 소림을 위해 큰 보시를 한 데다 우리 반야원을 위해서는 한 몸 바쳐 봉사한다니 이렇게 기쁠 데가. 귀한 분께서 힘 쓰시기에는 열악한 환경이네만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그럼 저는 환자를 좀 보겠습니다.”
“잠깐.”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를 내는 환자들 중, 어제 마음에 걸렸던 이들을 찾아보려는데 원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미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정식 초대장을 받은 게 아닌 봉사자는 이곳에서 해주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네. 허니 치료를 하려거들랑 봉사자의 일을 마친 후에 해주었으면 좋겠군.”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어느 집단이나 신입을 골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거기에 내가 어제 저들의 속을 긁어놨으니 없던 규칙이라도 만들어왔겠지.
어디, 얼마나 힘든 일을 준비했는지 들어볼까?
“이를 거부할 시 불이익이―.”
“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그, 그냥 하겠다고? 뭔지 듣지도 않고?”
“예. 봉사자라면 하는 일이라니 해야지요. 뭐 문제 있습니까?”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거부할 줄 알았나 보지?
쓸데없는 분쟁으로 시간 소모하기도 싫고, 이런 일은 격렬하게 거부할수록 저들만 통쾌함을 느낄 뿐이니까. 오히려 해버리겠다고 하면 일을 제시한 쪽이 더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법이지.
[맞아요. 제 꾀에 제가 빠지는 격이죠.]
“빨리 말해주시죠. 어서 해치우고 환자를 보겠습니다.”
“크흠, 그렇다면…….”
원장의 손가락이 한 곳을 가리켰다.
뒷간이다.
“지게꾼을 쓸 돈이 없어 뒷간이 가득 찼다네. 우선 저걸 비워주게나.”
뭐랄까 참…….
[뻔하네요. 당신 예상대로고요.]
타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잖아. 특히나 상대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것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럴 줄 알고 필요한 걸 대충 챙겨오긴 했지.
“그러면 오늘은 뒷간 청소부터 끝내고 치료를 하겠습니다. 수고들 하세요.”
그렇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는데 의원들의 소근거림이 들렸다.
“허세 부리는 걸 겁니다. 제 말대로 하루면 나가떨어진다니까요?”
“자네, 하루에 은 닷 냥을 건 거 잊지 말게. 생각보다 강단이 있어. 사흘을 건 내가 이기겠군.”
“솔직히 반나절은 넘겨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원장님이 건 남초를 받지 않겠습니까?”
흐응, 이놈들 봐라. 날 갖고 내기를 걸었다 이거지?
나는 뒷간으로 가다 말고 다시 발을 돌려 원장의 앞에 섰다.
“재밌는 내기를 하셨나 본데, 저도 껴도 됩니까?”
“흠, 흐흠. 무슨 내기 말인가? 우린 모르는 일이네.”
몇몇 의원들이 내가 들을 줄 몰랐다는 듯 서둘러 입을 턱 막았다. 그런다고 입 밖에 나온 말이 사라지기라도 하나.
“최대로 건 분이 칠 주야인 듯하니, 저는 열흘에 걸겠습니다.”
“열흘이라…… 뭘 걸 텐가?”
[어휴, 뻔뻔해라. 아까는 모르는 일이래 놓고. 이미 들은 거 어쩔 수 없으니 대놓고 한 판 붙어보자는 거죠?]
“제가 지면 반야원이 아닌 여러분에게 백금을 드리겠습니다.”
“배, 백금!”
“아이고, 그 돈이면 얼마야 대체……!”
“대신 제가 이기면.”
침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대체 뭘 요구하려고? 라고 쓰여 있는 얼굴들을 한 번 쓱 훑어본 후 입을 열었다.
“이 반야원에서 제가 원하는 것 하나를 가져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