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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49화 (149/350)

149화

나는 품에서 잘 접은 의맹의 자격을 꺼냈다. 이런 일이 있을 거 같아서 표구해놓은 걸 일부러 가져왔지.

아까 당당의 표식을 확인했던 스님이 다시 나와 내 자격증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에서 발급한 의맹 의원 자격증이 맞습니다.”

[휴, 속 시원하네요. 저 원장이라는 사람 얼굴 좀 봐요. 이러려고 자격 땄다! 하,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지만요. 내가 만점인데! 무당 그 바보 놈들이!]

과거의 잔 실수가 떠올라 또 울분에 찬 귀신은 내버려 두고, 나는 소림 방장의 앞에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의맹의 자격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놔야지.

“안 그래도 따로 찾아뵈려 했습니다만, 이곳에서 뵈었으니 인사드리겠습니다. 소림 이대제자 현금스님의 막내아우, 금태양이라고 합니다.”

“오호…….”

나이 든 방장스님은 내 인사에 작게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지만, 뒤에 선 다른 스님들은 달랐다.

“현금의 막내 동생이라면, 무한의 금가장 아닙니까? 금가장에서 의원도 하는군요.”

“현금과 그 형 되는 이의 사이가 썩 가깝지 않아 더 이상 보시가 없을 줄 알았더니. 막내를 보냈구나.”

“사형께선 가족 얘기는 거의 하질 않으셔서 형제가 많다는 것만 들었는데, 저리 어린 동생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까요?”

둘째 형을 사형이라고 언급한 스님이 마흔은 되어 보이니 그런 소리를 할만도 하다.

그나저나 큰 형이 소림에 보시를 안 한다니. 왜지?

[당신 둘째 형이랑 사이가 별로라잖아요. 무한에서도 삼 년간은 큰 잔치를 안 한다고 했다면서요.]

잔치를 벌이는 거랑 큰 절에 시주를 하는 거랑은 얘기가 다르잖아.

잔치는 경사니까 삼갈 만하지만, 절에 시주를 하는 건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도 한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더 크게 시주를 해도 모자란데.

[하긴, 당신 아버지는 무당을 비롯한 도관하고는 썩 사이가 안 좋은 거 같았고요. 그렇다 해도 둘째 아들을 출가시킨 소림인데. 이상하긴 하네요?]

내가 알기론 둘째 형이랑 사이가 아주 나쁜 것도 아냐.

아버지와는 그래도 부모자식 간의 인연을 이어간 거 같지만, 나 외에도 우리 형제나 금가장에 관심이 없다니까?

[원래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소림에 시주를 하는 것은 이미지에도 큰 보탬이 된다. 허례허식을 일절 끊고 실리에 집중하기로 했다면 모르겠지만, 큰 형 금건양은 그러한 허례허식이 가져오는 효과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왜 소림과 인연을 끊는 선택을 한 거지?

금리를 내쫓은 것도 그렇고, 내가 아는 큰 형이라면 하지 않을 일들의 연속이다.

뭐, 이해도 안 가는 큰 형의 속내를 계속 짐작하는 건 지금 할 일은 아니지.

“금가장에서 이번 연등회에 시주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막내인 제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러 왔습니다. 부디 방장께서는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전표였다.

“아니, 저건?!”

“금왕전장의 황금전표 아닙니까!”

금왕전장의 황금전표. 전면에 금박을 입혀 절로 번쩍거리는, 겉모양도 휘황찬란하지만 그만한 고액을 쓸 때만 발행해주는 전표다.

[세상에. 저 눈, 저렇게 번쩍 뜰 수 있는 거였어요?!]

눈꺼풀이 주름져 눈을 가리고 있던 방장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하긴, 방장 본인은 청빈함을 추구한다고 해도 소림 같은 대규모 시설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사실 황금전표는 나도 딱 한 장 갖고 있던 건데, 이번에 올 때 얼마를 들고 올까 고민하다가 눈 딱 감고 가져왔다.

“허허…… 현금이 아우가 여섯 있다 하더니 그중 보배처럼 감춘 이가 바로 그대였구료. 내 시주의 마음 씀씀이를 잊지 않고 부친의 넋을 기리리다.”

역시 돈을 쓸 때는 과감하게 써야 한다니까.

내가 금가장의 막내라는 걸 알았으니 뜨내기보다는 인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셈이지만, 역시 그 인연을 단시간에 끈끈하게 만드는 건 돈이다. 소림 방장이 날 보는 시선이며 말투 하나하나가 보다 친근해졌다.

“단, 그 돈을 이곳 반야원에는 쓰지 말아주세요. 반야원 외엔 어디에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깔깔깔, 저 표정들 좀 보래요! 반색했다가 굳어지기는. 누가 콩고물이라도 준댔나? 까르륵!]

나는 소림 방장의 옆에 시립해 있는 반야원 원장과 의원들의 면면을 하나씩 훑었다. 다들 홍령의 말처럼 얼굴이 장난 아니게 일그러져 있었다.

여기 돈 써봤자 환자들에게는 하나도 안 가고 저자들 배에 기름칠이나 하게 될 텐데. 내 돈 그런 데는 못 쓰지.

“대신, 연등회 기간 동안 반야원에는 제가 직접 봉사하겠습니다. 의맹의 자격을 가진 바 제 기여가 분명 보탬이 될 것입니다.”

당가의 초대장으로 묻어갈 수 있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그게 안 되니까 차선이다.

때마침 큰 형이 소림에 보시를 안 한 덕에 내 시주가 더 돋보였다. 나도 꽤 큰 금액을 헌납했지만 사실 금가장이 내는 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까.

“시주가 가진 바 재능으로 중생구제에 힘써준다면 부처님께서도 이를 긍휼히 볼 게요.”

방장스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향해 있는 대로 표정을 구기던 원장과 의원들이 방장스님과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순한 양처럼 실실거리며 웃었다.

“천금과도 같은 재주를 가진 의인이 연등회 동안 그대들을 돕겠다 하는구료. 부디 금 의원과 함께 중생구제에 힘써주기를 바라오. 아미타불.”

“여부가 있겠습니까, 방장스님. 저희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원장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걸 또 보겠다고 홍령이 흙바닥 밑으로 내려가 킬킬거렸다.

[어휴, 이 가는 거 봐. 여기 보여요? 이 사람들 이 갈은 가루가 쌓이고 있다고요. 깔깔.]

오버하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기왕 봉사하는 거, 내일부터 나오겠습니다.”

“아직 연등회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 힘 써준다니 마치 부처님과 같은 도량이구료.”

[깔깔깔. 이 부러질 거 같은데! 중원에선 임플란트 같은 것도 못 하는데! 나는 천재 귀신이지만 그런 건 못 한다고요. 깔깔깔!]

반야원 내에서는 자기들이 주름을 잡는다지만, 이곳은 결국 소림의 영역. 소림 방장의 말에 불만을 표시하지도 못한 채 원장과 의원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우리와 소림의 승려들을 배웅했다.

나는 은근슬쩍 인사를 건네 오는 소림승들과 간단히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을 떠나보내고 멀뚱히 서 있던 당당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원장이 우리에게 태클을 걸었을 때부터 여태까지 뚱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였다.

“난 안 갈 거임.”

뚱하다 뿐일까. 입술을 삐죽 내민 것이 거의 새끼오리 수준이다.

“연등회는 가문의 초대장을 가지고 왔으니 갈 거임. 하지만 내일부터는 안 감.”

안 그래도 돈 한 푼 안 받는 봉사인데 나서서 일을 더 할 필요는 없다. 나도 천하백대명의에 들어야 한다는 목적만 아니었다면 굳이 일찍부터 반야원에 나갈 필요는 없었다.

[뭐예요? 나한테 말 안 한 게 또 있어요? 잘 훑어보니 천하백대명의 선발 기준에 반야원 봉사시간이 반영되기라도 한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한 가지 실마리를 찾기는 했지.

하오문과 개방을 통해 역대 천하백대명의 목록을 받아 훑어봤었다. 거기에 선발된 의원들의 특이사항까지도.

대체로 명의라 불리기 부족함 없는 실력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몇몇은 왜 천하백대명의에 선발되었는지 의아한 이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은 주로 실력보다는 화제성, 가능성, 그리고 행적이 독특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젊은 의원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대부분 그 다음번 순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소수의 몇 명만이 가능성을 보여준 만큼 실력이 성장해 명의의 이름을 확고히 했다.

[실력보다는? 실력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니까요?!]

알잖아. 천하백대명의에 안착하는 것 그 이상이 목표라고.

천하백대의원은 중상위권, 천하백대명의는 최소 중위권에는 올라야 한다.

그렇다면 실력에다가 화제성과 가능성, 독특한 행적까지 덧붙이는 수밖에 없지.

특히 처음이 중요하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신선함이 떨어지니까, 첫 인상 보정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야원은 괜찮은 환경 조건이다.

원래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이 더 아름답고 도드라져 보이니까.

[알겠어요. 연등회가 시작하기 전에 싹 기강을 잡겠다 이거죠? 좋아요, 가보자고요!]

당당이 함께하면 좋을 텐데.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될 위험도 있지만 실력 있는 손이 하나 더 있다는 건 언제나 유용하니까.

안 간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번 운이나 띄워볼까?

“환자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아? 아까는 나보다 먼저 나섰잖아.”

“약자가 언제나 선한 건 아님. 다들 비겁함.”

아하. 이 녀석, 왜 이렇게 입이 닷 발 나왔나 했더니.

아까 원장의 협박에 환자들이 돌아서다 못해 거짓말까지 했던 일에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뜨내기고, 저들은 계속 반야원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해봤자 소용은 없겠지?

[아직 어리잖아요. 스무 살도 안 됐는걸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정파 무인으로서 협을 실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 하지만 저들의 비리를 보곤 징치하는 대신, 우선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섰던 너는 멋졌어. 진심이야.”

“……대신 약 부분은 도와줌. 저놈들이 너한테 약방을 열어줄 거 같진 않음.”

“그 정도도 충분해.”

약재도 약간이나마 가져왔고, 여기도 양양처럼 약재 수급은 어렵지 않을 듯했다. 당당이 약을 만들어준다면 그 부분은 안심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환자들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는지, 녀석은 내게 약을 대주기로 하고선 표정이 좀 풀렸다.

그렇게 한 녀석의 기분을 풀어주고 융중다원에 돌아왔더니, 혼자 나돌아 다니고 온 다른 녀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넌 또 왜 그래? 뭐 사고 쳤어?”

“사고 칠 것도 없더군.”

“그러니까 사고 칠 생각은 했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하, 됐다.”

창천은 얘기하기도 피곤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뭔데. 이 녀석 왜 이래?

[좀 이상하긴 하네요. 평소라면 말을 할 텐데. 왜 저러지? 설마?!]

뭔데. 뭐 짚이는 거 있어?

[저 반응은, 맞아요. 분명해! 시내에서 조카님보다 아름다운 소저를 만난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마음을 뺏긴 거지! 두 여인에게 동시에 마음이 가서 흔들리는 사내의 연심……!]

……너에게 물어본 내가 바보지.

“뭔데. 진짜 뭐 문제 있어? 나한테 말 못 할 얘기야?”

설마 진짜로 그런 일이겠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건 아니다.”

“그지? 난 널 믿어. 그래서 뭔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내 조카를 두고 다른 데 눈을 돌리겠냐고. 그건 절대 용서 못 하지.

“눈에 차는 사람이 없다.”

……야.

지금 이 동네에서 내 조카랑 비교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냐?

“천하의 소림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검을 겨룰 만한 강자를 찾지 못했다. 나이 든 노승들은 제법 강해 보였지만 일부 내 기척을 놓치는 경향이 있더군. 내 나이쯤 되는 후기지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랑 얘기가 아니었군요. 아쉽네요.]

이 자식이 말을 헷갈리게 하고 있어. 사람 오해하게.

“확실히 젊은 사람이 안 보이긴 했지.”

아까 반야원에서 만난 소림승들도 이대제자 연배였다. 내 나이 또래, 그러니까 삼대제자쯤 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좀 이상하긴 하네요. 무당에서도 현건을 비롯한 삼대제자들이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말이에요.]

문파라는 게 가만 보면 일대제자는 상부, 이대제자는 중간관리직, 삼대제자는 현장을 맡는 거 같았으니까. 연등회 때문에 다른 곳에 대거 차출되기라도 한 건가?

당장 나와 관련 있는 일은 아니니까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중요한 건 반야원이다.

[나한테 맡겨요. 이 천재 홍령님이 그놈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어줄 테니까요! 호호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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