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약방을 털다니. 당신들은 누구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웁니까?”
물론 그들이 반야원의 의원임은 알고 있다. 옷차림만 봐도 의원이다. 하지만 난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들을 의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반야원에서 멋대로 의료행위를 하면서 우리가 누군지 모르다니!”
“우, 우리가 누구냐 묻는 것이냐, 꺼억.”
“반야원에서 일하시는 분들 되십니까?”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같은 되도 않는 말이 나오기 전에 내가 말을 끊었다.
원래 이런 인간들일수록 허세와 허풍이 심하니까.
“내가 반야원의 원장이다.”
그때 새로운 얼굴이 뒤편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네놈, 멋대로 진료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반야원의 약을 갖다 썼다니. 부처님도 네놈의 악행을 두고 보아 넘기지 않으실 것이다.”
[흥, 그런 부처님이 원장이란 작자의 색(色)은 가만 두고 보시나 보죠?]
원장이라는 자가 나타났을 때 쌩하니 그가 온 곳으로 사라졌던 홍령이 날아와 하는 말이었다.
……앓는 환자들을 두고 뒷방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허나 이곳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아량으로 운영되는 반야원. 속히 가져간 약을 다 내어놓고 반성하거라. 부처님께 죄를 고하고 재물로 그 죄를 사할 지어다.”
“우리가 쓴 건 우리가 갖고 있던 금창약 같은 상비약입니다. 가서 약 창고를 뒤져보시죠. 뭐 하나 사라진 게 있나.”
언제부터 절간에서 죄를 사하는 대신 돈을 받았냐고 따지기도 귀찮다. 반야원에서 일하는 의원들이라면 다들 소림의일 텐데. 기본도 없고 상식도 없군.
“그리고 대부분의 치료는 침술로 행했습니다.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알 겁니다.”
나는 몇몇을 지목했고 사람들은 원장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이 눈을 부라렸다.
“자네들, 낯이 익군. 다들 반야원에서 오래도록 공짜 밥에 공짜 치료를 받았을 텐데. 잠시 우리가 자리를 비웠다고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자에게 제 치료를 맡기곤 저자의 편을 들다니. 은혜도 모르는 것이 금수만도 못하도다!”
“워, 원장님!”
“그것아 아니라, 저희가 너무 급해서 그만……!”
“되었네.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바쳐 그 죄를 참회하기 전까지 다신 반야원에 올 생각들 말게나.”
“원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자가 창고에서 약을 가져오는 걸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저, 저도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원장님!”
한순간에 사람들이 흩어졌다. 나와 당당이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일 장 내외가 원래 그랬던 것처럼 텅 비었다. 내가 지목해 고개를 끄덕였던 이들은 아예 원장의 앞에 무릎을 꿇거나 오체투지를 하고 두 손을 싹싹 비벼댔다.
“……애초에 타인이 들어와 의료 행위를 할 정도로 이곳의 상황이 시궁창이었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의원들은 술에 도박에, 어떤 사람은 여인을 희롱하고 있더군요. 의료 행위가 뭐야, 누가 와서 쌈박질을 해도 모르겠던데요.”
“네, 네 이놈! 감히 소림의 땅을 염탐한 것이냐!”
“염탐이라니. 대체 의원은 어디 갔기에 환자들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나 찾아본 거뿐입니다. 다들 휴.식. 하느라 바쁘신 거 같기에 손을 좀 덜어드린 건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다니 당황스럽군요.”
“이, 이놈이?!”
“그리고 약 얘기를 하셔서 말인데. 아까 한 환자가 반야원에서 준 약을 보여줬거든요. 기존에 먹던 약이라고. 그런데 그거, 그냥 잡초 뭉친 거던데.”
“닥치지 못할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원장이 이내 양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내 사특한 말을 하는 사기꾼을 혼쭐을 내주겠다. 소림방장께 직접 사사한 이 태극권으로!”
어쩐지 파이팅 자세를 잡는다 싶더니.
헌데 그 자세가 제법 그럴싸했다.
나도 처음 무공을 익힐 때 홍령으로부터 모든 무공의 기초라는 화타의 오금희, 즉 체술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낯선 검보다는 상대의 자세가 잘 보였다.
[소림 방장에게 배웠다는 말이 아주 허언은 아닌 듯한데요. 고수는 아니지만 자세에 절도가 있고 흐름이 있어요.]
홍령이 말할 정도로 원장의 기세에는 나도 살짝 긴장을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심성도 착하고 노력도 하지만 운과 재능이 따라주지 않아 길게는 수십 년까지 무당에서 시간을 허비했던 태양의원의 의원들이 떠올랐다.
선하고 옳은 사람에게 재능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으련만. 세상은 종종 잔혹할 정도로 무심하다. 저치들 중에서도 원장을 맡은 걸 보니 의술에 대한 재능도 저들 중에서는 제일 낫다는 거겠지.
착잡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저런 자를 누를 수 있는 실력이 내게 있어서.
[당연하죠! 저 정도는 당신이 십 수 안에 때려눕힐 수 있다구요!]
나도 자세를 잡았다.
검은 필요 없었다.
아직까진 오금희가 더 익숙해서도 있지만, 저런 무뢰한을 상대하는 데 화산의 검까진 필요 없다.
한 발을 내딛고 자세를 잡으려 할 때.
“오십니다!!!! 원장님, 오십니다! 오셨습니다!!!!”
정문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그 문지기가 우렁차게 외치며 안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셨나?! 예정보다 빠르시군!”
“빨리 꺼억, 술을 깨야겠구만. 흡!”
“자네, 운 좋은 줄 알게. 아니,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원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풀었고 의원들은 갑자기 옷차림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무릎 꿇고 있던 환자들도 벌떡 일어나 옷의 먼지를 털었다. 술에 취한 의원이 몸에서 취기를 빼낼 즈음 정문 쪽에서 가벼운 인기척들이 들려왔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가 올지는 빤하지.
[소림이군요.]
장삼과 가사를 걸친 스님들 대여섯이 반야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발걸음부터 몸짓, 태도, 표정까지 고아하기 짝이 없어서, 지금껏 반야원의 의원들을 보며 실망했던 소림에 대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회복될 정도였다.
특히 그중 선두에 선 노승은, 걸친 장삼가사가 턱없이 낡았음에도 그것이 빈천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속세에 연연하지 않는 청명한 느낌이 흘렀다.
그래, 저런 게 진짜 소림이지.
“아미타불. 방장께서 오셨는데 작은 소란이 있어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공사다망한 원장이 무어하러 이 노인네를 마중까지 나오는가. 그 시간에 중생구원에 더욱 힘을 써 주사 하는 게 이 노승의 바람일 뿐이네.”
저 노인이 소림 방장이라.
방장이라면 다른 문파의 경우 장문인에 해당하는 위치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느껴지는 고아한 분위기에 보통 스님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소림 방장이라니.
무당도 태청의원을 중시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돈벌이로 취급해서, 태청의원의 장인 청운진인의 위치가 무당 내에서는 별로 높지 않다고 들었는데.
여기선 방장이 반야원을 직접 관리하나? 근데 상태가 왜 이래?
[사실 저 사람도 소림 방장이 아닌 거 아닐까요? 저 사람들이 소림의라는 것도 못 믿겠는데. 소림 방장이 가짜일지 누가 알아요?]
하지만 저런 분위기도 연기로 꾸며낼 수가 있나?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연기 대상감이지.
“쯧, 여기 분위기는 여전하군.”
“주향이 느껴집니다. 또 술을 마시고 있었나 보군요.”
“방장께서는 어찌하여 저자들을 그냥 두고 보시는지. 저런 이들을 소림의로 두고 있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외다.”
“다 뜻이 있으시겠지요. 아미타불…….”
그러나 방장 뒤에 선 스님들의 작은 속닥거림이 내 귀에 들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 보통 사람들은 물론 반야원 의원들도 듣지 못한 거 같지만, 저 얘길 들어보니 이들이 진짜 소림의 승려고 저분이 소림 방장인 건 맞는 모양이군.
“헌데 시주께서는 못 보던 이로군. 원장, 새로이 소림의가 되겠다는 이를 들인 것이오?”
“아닙니다, 방장. 이자가 저희 반야원 의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몰래 들어와 반야원 의원인 척 행세를 하고 약방의 약을 멋대로 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원장은 방장에게 허리를 굽히며 우리가 행한 범죄(?)를 고했다. 그러면서 나를 슬쩍 보며 ‘어디 엿이나 한번 먹어봐라.’ 같은 얼굴로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원장의 말이 참이오, 시주?”
“아닙니다.”
“도둑이라니! 사천당가다! 비교금물!”
당당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태 참고 있던 것도 장하다.
[은근 정파협객의 기질이 있으니까요. 여기가 소림의 반야원만 아니었으면 벌써 뒤집어엎었을걸요?]
“그쪽 시주께서는 당가의 식솔이시오?”
“그렇슴! 사천당가의 당당임!”
당당은 자신이 들고 다니던 사천당가의 표식을 꺼내 방장에게 보였다. 스님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방장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사천으로 초대장을 보냈지만 거리가 멀어 여태 마음만 받았거늘, 처음으로 당가의 손님이 오셨구려. 당당이라면 가주의 셋째로 알고 있는데, 귀인이 오신 것을 환영하오.”
“감사함!”
“허면 시주도 당가의 식솔인지?”
방장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이 심히 주름져 눈을 가린 탓에 눈빛이 보이진 않지만,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만으로도 자애로움이 절로 느껴졌다.
“저는 당당의 친우로, 호북에서 의원을 하고 있는 금태양이라 합니다. 연등회에 한 손 거들러 왔다가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어 잠시 진료를 보았습니다.”
“호북이라. 사천만큼은 아니지만 먼 걸음을 해주었구려. 오해가 있었던 듯하나 연등회의 객이시라 하니 원장은 오해를 풀고 함께 연등회에 힘써주기를 바라네.”
당당이 사천당가의 일원임을 밝히자 반야원 의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역시 전생이나 지금이나 이름값은 무시 못 한다니까. 하지만 원장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 소협은 객으로 오신 것이겠지만 저자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방장. 호북이라면 무당의일 텐데, 그렇다면 당가의 초대장이 아니라 무당의 초대장을 갖고 왔겠지요. 초대장을 받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거나 무언가 하자가 있어 받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가 이 반야원에서 환자를 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방장.”
청산유수일세. 거기에 논리도 그럴싸하다. 내가 소림 방장이었어도 저 얘길 들으면 한 번은 짚고 넘어가겠군.
사실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듣자하니 세가에 간 초대장의 경우, 식솔이 아닌 사람이 함께 하는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나?
이런 일의 절차란 게 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지만, 또 흠을 잡자면 흔들려선 안 될 절대적인 규범이 되기도 하는 거라 말이지.
“원장의 말도 일리가 있소이다. 금 의원, 어찌하여 무당의 초대장으로 오지 않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그건 제가 호북에서 의원을 하고 있지만, 무당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방장! 이자를 당장 끌어내야 합니다! 감히 의원을 사칭하는 자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하지만 무당에서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무당의가 아닐 뿐, 엄연히 의맹의 자격을 지닌 의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