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47화 (147/350)

147화

[이제 뭐 할 거예요?]

제갈다영이 내어준 별채에 짐을 풀고 난 후 홍령이 물었다. 아직 연등회는 시작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제 막 도착했으니…….

“사전답사를 하러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이번 소림행의 목적은 천하백대명의에 오를 만한 명성을 확고히 하는 것. 그것을 위해선 소림에서 운영한다는 무료 진료소 반야원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

하오문과 개방을 통해 반야원에 대한 정보는 얻었지만 현장에서 내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본격적인 연등회 시작 전 반야원에 가서 상황을 둘러볼 거다.

“나도 감!”

“나는 다른 곳을 둘러보지.”

예상대로 당당은 함께 가고 창천은 반야원 외 다른 곳을 둘러 보겠다 나섰다.

“둘러만 봐. 또 어디서 흥미가 도는 강자라고 다짜고짜 칼 뽑지 말고.”

“내가 어린앤 줄 아나.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한다.”

“……믿는다. 또 사고 치면 알지?”

창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난번 뒷간 청소를 떠올리고 있는 걸지도.

먀아!

자기도 데려가라는 듯 금동이가 내 등을 기어올라 어깨에 앉았다. 짜식,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어깨에 자리 잡고 고릉고릉 소리를 내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다원의 문을 나섰다.

“반야원에 가세요? 안내해드릴까요?”

“시간이 괜찮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다영과 함께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길을 찾을 시간도 아낄 겸 그녀를 탐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천하백대명의를 노리는 데 있어서 라이벌이 될 만한 사람의 정보는 조금이라도 알아 두는 게 좋지.

[하긴, 제갈세가도 연등회 초대장을 받았겠죠? 함께 반야원에서 일하게 되겠네요. 근데 제갈세가의 의술이 그렇게 대단하던가?]

대단하지 않겠어? 그 제갈세가잖아. 머리로 하는 건 다 잘할 거 같지 않아?

[확실히 그런 이미지가 있긴 한데요. 내가 아는 제갈세가는 뭐랄까,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거든요. 예를 들어 병을 앓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병의 공통 특징은 뭔지,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게 뭔지, 병의 원인은 뭔지 알아내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게 뭐야? 병을 다 진단해놓고 치료를 안 한다고?

[치료 자체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렇게 하겠지만요. 임신을 하고선 드디어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지던 임신과 출산의 실제를 확인하게 됐다고 흥분하던 친구가 있었, 아, 그러네요. 제갈세가에 친구가 있었어요. 맞아, 그랬지…….]

제갈세가의 특징에 대해 말하던 홍령이 갑자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홍령의 친구라. 나이를 더듬어보면 대충 제갈다영의 고모뻘쯤 되려나? 기회가 된다면 그것도 물어보는 게 좋겠군.

“저기가 반야원이에요.”

연등회 접근성이 좋다던 제갈다영의 말은 역시 나를 의식한 말이 틀림없었다. 융중다원에서 일 각 정도 걸었을 뿐인데 반야원이 보였다. 아까 그 객잔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반 시진은 걸렸을 텐데.

“그럼 저는 다른 볼일을 보러. 재밌는 시간 보내세요.”

어라? 같이 안 가나? 제갈다영도 반야원을 둘러보러 온 줄 알았는데.

[저 소저는 연등회에 몇 번 왔다잖아요. 바쁜 사람 붙잡지 말고 우린 어서 들어가요.]

제갈세가 친구가 있다는 걸 떠올리더니, 묘하게 제갈다영 편을 드는 거 같은데. 착각인가?

어쨌든 제갈다영은 먼저 보내고 나와 당당만 반야원의 정문으로 향했다. 겉으로만 봐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법 많았다. 예를 들면,

“생각보다 규모가 큼!”

“치료비를 안 받는, 일종의 구호소니까. 이런 곳은 항상 규모가 크기 마련이지.”

“그리고 엄청 낡음!”

“그런 얘기를 그렇게 크게 말하는 건 좀.”

물론 당당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반야원은 좀 낡았다. 아니, 좀 많이 낡았다.

[우리끼린데 그냥 대놓고 얘기하자면서요? 와, 진짜 구리다. 뜯어 고치기 전의 태청장원보다 심한 거 같아요.]

아니, 그건 너무 심하잖아.

[현판도 다 떨어져서 대롱대롱 걸려 있는데 뭐가 심해요? 저 밑에서 졸고 있는 거 봐. 진짜 강심장이네요. 떨어지면 어쩌려고. 나 같으면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까 무서워 일단 현판부터 고칠 거 같은데요.]

홍령의 말마따나 한쪽이 떨어져서 대롱대롱 걸려있는 현판 아래, 문지기로 보이는 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없나? 무료 진료소라고 해서 사람이 엄청 많을 줄 알았는데. 보통 그런 곳에서 문지기는 질서유지와 줄 관리 등을 맡는다. 저렇게 대놓고 졸 틈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연등회가 시작되지 않았다곤 해도, 당신 말대로 무료 진료소인데도 사람이 너무 없네요.]

사전에 정보를 받은 바로는 반야원에선 무료 진료와 더불어 무료배식도 진행한다고 했다. 진료를 받는 사람이 적을 수는 있지만, 공짜로 밥을 주는데도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슬슬 식사 시간인데?

[안에는 사람이 좀 있네요. 들어가 봐요.]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꾸벅꾸벅 졸던 문지기가 실눈을 뜨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뭐지? 들어가면 안 되나?

“에이 씨, 난 또 벌써 오셨다고. 사람 헷갈리게. 진료 볼 거면 들어가슈.”

문지기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곤 다시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입구부터 분위기가 요상하네.

대롱대롱 매달린 현판이 바람에 날려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걸 들으며 우리는 반야원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밖보다 더 심했다.

“……와, 대체 이게 뭐임?”

당당이 황당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앓는 소리가 온갖 곳에서 흘러나왔다.

문이 반쯤 떨어져 나간 방과 대청처럼 등을 대고 누울 수 있는 자리들에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이 누워 저마다 다른 소리로 끙끙 앓고 있었고 그 자리마저 잡지 못한 이들은 대들보에 기대앉아, 또는 속절없이 바닥에 드러누워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증상의 경중은 달라도 전부 환자다.

“의원은 어디 있는 거지?”

이렇게 환자들이 널려 있는데 의원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나마 두 발로 돌아다니는 이들이 의원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들은 보호자로서 환자의 수발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의원이 없었다.

[뒤편에 의원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어요.]

있어?

그래, 있겠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곳이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을 하는 좋은 기치를 가진 곳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의원이 있겠지. 앓는 이들이 이렇게 많긴 하지만 그만큼 의원들도 바쁘고 힘들 테니 좋은 의료서비스 품질을 위해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겠지.

그렇겠지?

[휴식을 하고 있긴 한데…… 저걸 휴식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요.]

왜, 뭘 하고 있는데?

[직접 와서 봐요. 근처까지 가도 눈치 못 챌걸요.]

나는 홍령의 인도를 따라 반야원 뒤편으로 향했다. 당당도 나를 따라왔다. 소리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 뒤편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눈치 못 챌 거라고 한 이유를 알겠네.

“좋았어! 받고 두 배! 아니, 세 배!”

“어허, 이 사람아. 판돈을 그렇게 올리면 어떡해?”

“소림에서 나오는 돈도 푼돈인데 이런 데서라도 벌어야지. 쫄았나? 쫄았어?”

“에라이, 누군 푼돈 아닌가? 좋아 받고 네 배! 다 털리고 이번 달 쫄쫄 굶어도 내 책임 아닐세!”

“굶긴 누가 굶나? 이제 곧 연등회니까 그 쩨쩨한 스님들도 돈을 세 배는 더 줄 거 아닌가?” “하기야 약재도 더 많이 들어 올 거고, 여기저기 문파며 세가들이 주는 기부금까지 챙기면 나쁘지 않겠어. 이 사람, 판을 키우는 이유가 있었구만?”

“아무렴? 이 판도 이기고, 이번에는 이놈의 구질구질한 의원 탈탈 털어서 내 의원을 차릴게야!”

“그 얘기를 언제적부터 들었는데, 되도 않는 소리 관두게. 떠날 생각도 없으면서.”

“그거야 그렇지. 이렇게 농땡이 피면서 먹고 살 만큼 돈 받는 곳이 어디 있다고? 내 의원을 차리면 죽도록 일해야 하지 않나? 환자가 얼마나 올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그럴 바엔 여기서 편하게 놀고먹는 게 제일이지.”

“하긴, 의원 차리면 침이나 제대로 놓겠나? 손에서 침놓은 지가 몇 해야?”

“이 썩어빠진 의원에 푼돈 받고 출근이나 해주는 게 어딘가? 하하하!”

“끄억, 술 남은 거 없나? 술! 술 내놔!”

개판이군. 개판이야.

반야원의 낡아빠진 건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짜 썩어빠진 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밖에 아픈 환자들이 저렇게 많은데 이를 방치하고 대낮부터 도박판을 벌이는 것은 물론, 술에 거나하게 취한 인간에 대놓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면서 배를 벅벅 긁는 인간까지.

그래도 설마.

이문을 좇는 게 아니라 불도를 좇는다는 소림의인데.

말만 저러고,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환자를 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시진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환자를 보러 가지 않았다.

밖에서 아이를 안고 울며불며 의원을 찾는 부모가 있어도, 피투성이가 된 다리로 절뚝거리며 들어와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는 환자가 있어도.

도박을 하던 이들이 잠에 들고, 술에 취했던 이들이 도박을 하고, 잠들었던 이가 일어나 술을 마시는 등 자신들이 하던 일을 돌려가며 할 뿐 의원으로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환자들 앓는 소리가 시끄러워 죽겠다며, 가서 독한 수면제나 돌리라고 깔깔댈 뿐이었다.

[더 지켜볼 거임? 나는 못 참음!]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반야원의 마당으로 돌아와 상비하고 있는 침구와 약통을 꺼냈다.

“애가 어디가 아픈 겁니까? 열이 심한데, 언제부터 이랬어요?”

“정신 차리셈! 정신 놓으면 과다출혈로 죽음! 지혈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으셈!”

“급한 환자분부터 보겠습니다! 다섯 명씩!”

그 자리에서 즉석 진료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환자들은 하나둘 증상이 완화되는 이들을 보며 줄을 서기 시작했다.

“뭐야? 못 보던 의원님인데?”

“알 게 뭐야. 일단 낫고 봐야지. 침 한 방에 삔 허리가 낫는 걸 보니 실력은 있는 모양인데?”

“이봐! 급한 사람 먼저라잖아! 난 지금 이틀째 변을 못 보고 있다고!”

“눈깔이 삐었나! 발가락에 티눈이 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거 안 보여!”

갈(喝)!

내공을 실어 외친 소리에 어수선하던 환자들이 전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공고수처럼 귀청이 터질 정도는 아니지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는 충분했다.

“들으세요. 첫째, 급한 환자는 내가 선별합니다.”

환자를 진료하느라 바빴지만 내게는 홍령이 있었다. 홍령은 다급한 환자들을 추려 내게 알려주었다.

“둘째, 정해진 순서를 지켜주세요. 새치기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계속 봐드릴 거니까 다들 서로에게 양보 부탁합니다.”

내 목소리에 실린 웅혼한 기운 때문인지 자칫 칼부림이라도 날 거 같았던 분위기는 말끔하게 정리됐다.

호의를 베푸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호의를 이용해 이기적으로 굴려는 인간들이 있다는 건 전생에도 알고 있었고, 이번 생의 경험으로도 알았다. 이럴 때는 칼같이 정리하고 넘어가야 깔끔하다는 것도 안다.

신기하게도 이런 타입의 인간들은 비싼 서비스보다 무료, 공짜에 더 진상을 부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연등회 시작 전부터 이렇게 무료 봉사를 할 예정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할 거, 좀 일찍 시작한다고 나쁠 건 없죠.]

그래. 이대로 돌아가면 계속 마음에 걸렸을 테니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나와 봤더니, 이게 뭐지?”

“꺼억, 누가 우, 우리 반야원에서 멋대로, 의, 의원질을 하는 게야? 웬 놈들이냐!”

아까 내가 외친 소리를 들은 건지, 엉덩이 무거운 반야원의 의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잠과 술이 덜 깬 인간들이 어슬렁 기어 나오다가, 이내 내 손에 들린 환을 보고는 눈을 부릅뜨고 달려왔다.

“이런 도둑놈들을 봤나? 멋대로 의원 행세를 하다 못 해 반야원의 약방을 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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