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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46화 (146/350)

146화

고함을 지른 이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최고급 비단을 아낌없이 쓴 옷에 귀티가 넘치는 얼굴, 허리춤의 검은 검집부터 손잡이에 달린 술까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묻지. 이게 너의 최선인가?”

“마, 맞습니다, 도련님! 제 목을 걸고 맹세합니다! 이 일대에서 여기가 가장 좋은 객잔입니다!”

청년의 발밑에는 한 명의 무인이 부복한 채 달달 떨고 있었다.

청년은 그런 무인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검을 뽑았다. 눈 깜짝할 사이였고, 웬만한 사람은 움직임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발검이었다.

챙―!

무인의 목에 닿을 뻔한 검을 내 검이 막아섰다.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그 앞에 나선 거다. 속도는 따라잡았지만 검을 대는 위치가 현명하진 못했다. 실전이었다면 2수의 기회를 뺏겼겠지.

[그래도 잘했어요. 저 정도 발검을 따라잡은 것만으로도 훌륭해요.]

“뭐지 이건?”

내가 첫 수의 어설픔을 곱씹고 있을 때, 내가 맞댄 검의 주인이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누군데 남의 행사에 개입하는 거지? 무례하군.”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남의 목을 베려고 하는 건? 그건 무례를 넘어서 너무 무도한 일 같은데.”

“진짜 베려던 게 아니다. 이놈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닌지 시험해 본 것뿐.”

[그건 맞아요. 목 앞에서 검을 멈췄을 거예요. 그래서 창천과 당당이 나서지 않은 거겠죠.]

윽. 아직도 멀었군.

[제대로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창천이나 당당 수준을 바라는 거예요? 방금 발검도 수련 기간에 비하면 엄청나게 훌륭하다니까요?]

내 칭찬은 됐어.

그보다 저 녀석, 고작 그런 걸로 목에 검을 갖다 댄다고?

[무림에서는 은근 흔한 일이긴 해요. 무력이 곧 법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래도 정파는 힘이 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무력이 곧 법.

힘이 곧 법이고, 돈이 곧 법이라는 사상.

……젠장. 전생의 나쁜 기억이 떠오른다. 본부장도 저런 식으로 자주 나를 시험하곤 했으니까.

“이게 정말 최선이야? 너 이거밖에 안 돼? 네가 이따위밖에 못 하면 널 뽑은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귀청이 터지도록 윽박을 지르면서 손에 든 물건으로 내게 위협을 가했다. 골프채를 휘둘러 눈앞에서 멈추거나 재떨이 따위를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던졌지.

“어쭈, 피해? 네가 지금 이걸 피해? 뭘 잘했다고 피해!”

피하면 위협이 곧 더한 폭력이 됐다. 몸 관리를 위해 다니는 복싱 센터에서 사람 패는 법을 어찌나 잘 배웠는지 한 방 한 방이 위장이 뒤틀릴 정도로 아팠다.

위협이었는데 실수로 미간을 강타하거나 재떨이가 이마를 찢거나 하면 그제야,

“짜식, 진심이네. 그래, 최선을 다했다 이거지? 한 건 한 거고, 좋아. 결과를 보자고.”

따위의 말을 하며 병원에 가보라고 지갑을 열어 오만 원짜리 몇 장을 던져줬다.

대놓고 가한 폭력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나중에 머리에 열이 좀 식고 나서야 문제가 될까 싶었는지 회사 경비로 차를 뽑아 보내주거나 연봉을 올려줬다. 그것마저도 통보였다. 재산세가 나왔는데 나도 모르는 새 차가 있어서 뒤처리를 하느라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지.

그때 때려치우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딴 자리에서 뭘 바꿔보겠다고.

“네놈들도 여기 머물려고 온 건가?”

그때 본부장의 말투를 닮은 목소리에 회상이 끊겼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했더니, 말투며 표정, 행동거지까지 그때 그 개자식을 판박이처럼 닮았다.

“그렇다만. 그쪽과는 달리 이 일대 최고의 객잔이라는 이곳에 우리는 아무 불만이 없어서 말이지. 점소이, 방 좀 내줘요.”

“생각이 바뀌었다. 여기 머물도록 하지.”

우리 사이에 낀 점소이가 눈치를 보며 떨었다. 지금도 이런데 한 객잔에 숙박하면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분위기가 살벌할지. 안됐지만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우리도 여기보다 더 안 좋은 객잔에 갈 마음은 없었다.

“내가 먼저 왔으니 우선권은 내게 있겠지? 이 객잔의 남은 방을 전부 빌리지.”

[아니,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예? 그, 그건…… 일행분이 두 분이신데…….”

“누가 두 명이래? 가서 다른 데 보낸 녀석들 전부 데려와. 그놈들하고 같은 급의 객잔을 쓰긴 싫었지만 웬 놈팡이들과 쓰는 것보단 낫겠지.”

“아, 알겠습니다!”

부복하고 있던 무인이 벌떡 일어나 꽁지에 불붙은 듯 뛰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십수 명의 무인과 하인들이 객잔에 도착했다. 객잔의 규모가 있어서 이 사람들로 객잔의 방을 다 채울 거 같진 않지만…….

“한 명당 방 하나씩 쓰도록 하지. 그래 봤자 무료라지? 이 정도면 방을 다 채우고도 남겠군.”

역시 진상은 하나만 하지 않는다. 보통 방 하나에 두세 명은 사용하는데 그걸 방 하나당 한 명이라니.

“죄송합니다, 손님. 방금 만실이 됐습니다.”

점소이는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지 우리를 향해 있는 대로 허리를 굽혔다.

“여기 말고도 숙소는 많겠지. 더 쾌적하고, 좋은 곳 말이야.”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의기양양해하는 녀석을 보며 코웃음을 친 후 객잔 밖으로 나왔다. 다영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따라 나왔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여기가 이 일대 최고의 객잔인걸요. 다른 곳도 있지만 여기보단 지내기 불편할 거예요. 그냥 점소이한테 따져도 되잖아요.”

“저런 치기 어린 짓에 어울려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른 분들이 저 사람과 싸워서 방을 얻어내도 되는데요. 굳이 꼬리 내리고 도망가셔야 해요? 겁쟁이처럼?”

“저자의 검을 막아선 제가 겁쟁이로 보였나요?”

그러자 다영이 입을 다물었다.

뭐, 방을 얻을 방법이야 많다. 다영 소저의 말처럼 점소이에게 따져 우리 일행의 방만 얻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점소이가 우리를 얼마나 잘 대해주겠나. 숙박은 서비스가 반인데.

저자와 같은 객잔에 머물러 불편하고, 서비스도 안 좋아지고. 심력은 소모하고 돌아오는 건 별로 없는 일이다.

저자와 싸워서 방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저 성격에 제 하수인이나 다른 곳에 얼마나 성질을 내겠어. 이 숙소가 최선이냐고 목에 칼을 들이미는 놈이 아닌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있고, 저자 밑의 사람들이 더한 고충을 겪을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단 말이지.

“나도 네 생각에 동의한다. 굳이 이런 데 힘쓸 필요 없다.”

“맞음!”

창천과 당당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는데. 다영 소저, 미안하지만 부탁할게요.”

“……하는 수 없죠. 이 일대에서 두 번째로 좋은 곳으로 안내할게요.”

두 번째로 좋다는 숙소로 가는 내내 다영은 별 말이 없었다.

아까의 객잔으로 가면서도 그 객잔이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역대 소림의 장문인들이 그곳에서 몇 번이나 설법을 펼쳤는지 등 온갖 잡다한 얘기들을 하다가 입을 다무니 가는 길이 조용해졌다.

그곳에서 우리가 놈을 물리치지 않아서 실망이라도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계속 놈놈놈 하게 생겼어요.]

그런 놈 이름을 알아서 뭐하게?

[욕하려면 이름을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재수 없어. 저런 걸 당신 전생에선 갑질이라고 했다죠? 갑놈이라고 할까요?]

갑놈이라. 상사 욕하는 자리에서도 갑님이라고 했는데.

어감 좋네.

[그죠? 당신이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대체 저런 갑놈을 키운 부모는 어떤 갑놈일지 궁금하네요. 어라, 다 왔나? 여기예요?]

홍령이 당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임?”

“……아까 그 객잔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군.”

창천이 훨씬이라고 강조할 만큼 고급스러운 장원이었다. 현판에는 객잔이 아니라 융중다원이라 적혀 있었다. 전생으로 치자면 커피숍과 같은 찻집이다.

“사실 여긴 숙박을 제공하진 않는데, 손님들 몇 분 머물 공간은 있어요. 관계없는 사람이 머물려면 무척 비싸서 공짜인 아까 그 객잔에 비하면 두 번째라고 할 수 있죠.”

다영은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건물은 고아했고 정원에는 담장 아름다운 나무와 기암괴석, 잘 관리된 연못이 있었다.

이 정도면 태양객잔이나 북촌객잔 같은 곳은 물론 태양의원 본원과 비교하기도 부끄러웠다. 거의 무한에 있는 장원, 진양 누나가 나를 위해 내어준 태양의원―수의 무한 분원급의 고급 장원이다.

사람은 거의 없어 고요했으나 정원 관리를 하던 이들이 우리를 보고 다가와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뒤에 계신 분들은?”

“내 손님이에요. 별채에 방을 내드려요. 연등회 기간 동안 머무실 거예요.”

[보통내기는 아니다 싶더니. 굉장한 집안의 아가씨인가 보네요. 소림하고 관련이 있나?]

뭐야, 아직 눈치 못 챘어? 융중다원이라잖아.

“제갈세가의 다원이라면 무후의 사당도 있겠죠? 객이라도 들러 향을 피울 수 있을까요?”

무후는 제갈량 공명의 시호다.

[제갈세가? 그러면 다영이 제갈가의 따님인 거예요?! 아니,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안 거예요?]

난 홍령 네가 그걸 못 알아차렸다는데 더 놀라운데.

비록 이곳 중원과 역사가 이어지는 거 같지는 않지만, 전생에서 삼국지는 필독도서에 꼽히는 책이었거든.

거기에 각 그룹사 회장이나 CEO들이 어찌나 삼국지를 좋아하는지. 위로 올라가려면 교양으로 꿰고 있어야 하는 책이었지. 내가 죽을 즈음에는 제갈량보다 조조가 인기였지만, 아무튼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간 그곳이 융중 땅이었지.

[제갈세가의 시조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알지는 못한다고요. 그 사람이 만든 기관진식 같은 거에나 좀 관심이 있지.]

홍령과 마찬가지로 융중다원이라는 이름에 눈치 채지 못한 창천도 뒤늦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릴 속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정체를 밝힐 순 없잖아요? 이제라도 소개합니다, 제갈세가의 제갈다영이에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보려고 접근한 듯? 원래 제갈세가 사람들은 저런다고 들었음.]

당당이 드물게 전음을 보냈다. 당당은 사천당가라 융중이라는 이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속인 건 미안해요. 하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여러분은 꽤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까 여기 머물러주지 않을래요? 당연히 돈은 안 받을게요. 아까 객잔도 가봐서 알겠지만, 여기보다 좋은 곳을 찾긴 어려울걸요? 아무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라고요. 뒤에 훌륭한 연무장도 있고, 연등회 접근성도 좋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이 조건은 안 받아들이는 쪽이 바보예요. 그렇죠?”

아까는 겁쟁이라더니 이번엔 바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까 나를 살살 긁은 건 나를 떠보려고 했던 거겠지만.

[뭐 어때요? 받아들이고 바보가 아니면 되는 거지. 갑놈이 알면 엄청 배 아플걸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놈에게 고마워지기까지 하네요.]

“좋아. 여기 머물도록 하지.”

“고마워요. 머무시는 동안 잘 부탁드려요! 아, 진맥도 한번 봐주시면 더 좋고요!”

일부러 의원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역시 알고 접근한 거였군. 딱히 악의가 느껴지는 건 아니긴 했지만…….

[왜 그래? 아직 찜찜해?]

아직도 표정이 굳어 있는 창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녀석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숙소 건은 이걸로 됐다. 아까 본 검이 문득 생각났을 뿐이다.]

아까 본 검이라면…….

[갑놈이요?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었죠.]

홍령도? 뭐 아는 거 있어?

[아는 검은 아니에요. 하지만 발검 자세만 봐도 제대로 배웠다는 건 알겠더군요. 보통내기는 아니에요. 자기 지역에서는 쫌 날리는 문파나 세가의 자제일지도요.]

그쪽도 객잔을 잡은 걸 보니 연등회에 참석하려는 거겠지.

어쩌면 다시 보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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