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무슨 일이지.”
창천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나도 옆에 두었던 검을 쥐었다.
“산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쳤어요. 지금쯤 제가 사라진 걸 알고 쫓아오고 있을 거예요. 어휴, 힘들어. 여기 앉아도 되나요? 동굴에 갇혀 있었더니 몸이 으슬으슬하네요.”
여인은 우리의 경계도 아랑곳 않고 다가와 모닥불 앞에 앉았다.
[미끼일 수도 있어. 주변 좀 둘러보고 와.]
내 전음에 창천이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산적이라고 해서 무작정 여행객을 습격하리라는 법은 없지. 납치되었던 사람인 척하고 일행에 섞여서 긴장을 풀게 하거나 독이 섞인 술을 나눠준 후 작업할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살았던 전생은 무척 치안이 좋다고 했는데,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은근 살벌한 동네였나 봐요?]
내가 살던 곳 외에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갔다가 당한 얘기를 듣기도 했고, 어릴 땐 구걸하는 사람이나 노인을 도와주다가 봉고차에 납치되는 일도 잊을 만하면 뉴스에 나오곤 했거든.
그나저나 이 여자, 키가 굉장히 큰데?
미끼라고 해도 위험요인일 수 있다. 여자와 노인 어린아이는 항상 주의 대상이니까. 사실 산적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지. 산적 두목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큰 키는 충분히 경계 요소다. 리치가 길잖아. 앉은키가 창천하고 맞먹어 보이는데?
[무기는 없는 거 같아요. 주변도 한번 돌아보고 올게요.]
“앗, 고기가 타요! 맛있겠다, 제가 먹어도 되나요? 한 끼도 못 먹었거든요. 나쁜 놈들, 사람을 잡아놨으면 그래도 먹을 건 줘야 할 거 아냐. 그죠?”
“드, 드셈. 고기 많음.”
“우와, 맛있네요? 이런 식으로 썰어서 구우니까 빨리 익고, 약재 향이 나는데 잘 어울려요. 아! 마침 제게 좋은 술이 있는데요!”
여인은 소매 안에서 호리병과 잔 몇 개를 꺼냈다. 병마개를 따자 순식간에 좋은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중원에 태어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은 나도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였다.
저 술에 삼겹살 쌈 싸먹으면 진짜 딱일 거 같은데.
“드셔보실래요? 별로 안 세요!”
“나 한 잔 마셔봄!”
당당이 한 잔을 가볍게 원샷 했다. 그리고는 으음! 하며 내게 엄지를 척 들었다. 독은 없는 모양인데?
[갑자기 웬 술이에요? 이 주변엔 별거 없어요. 고기 굽는 냄새에 어슬렁거리는 짐승들이 있긴 한데 창천의 기세에 다가오질 못하는 정도?]
때마침 창천도 돌아왔다. 그는 당당이 맛있다며 홀짝거리는 술을 보더니 칼을 내려놓고 저도 술잔을 들었다.
“너 마시면 안 된다니까?”
“괜찮음, 괜찮음! 이거 안 독함!”
“괜찮다고 하는군.”
그러더니 누가 따라주기도 전에 직접 잔을 채웠다. 검을 내려놓고 술을 마시는 걸 보니 주변에 뭐가 없는 건 사실인가 본데…….
“혹시 술을 못 드세요? 그럼 차도 있어요! 물 이거 써도 되죠?”
대체 저 소매는 뭐지? 도X에몽 주머니라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호리병과 술잔이 나온 곳에서 어떻게 휴대용 다기가 나오는데?
그뿐이 아니다. 여인은 익숙하게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더니 한 잔을 내게 내어주었는데, 그 차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이 정도 맛이면 독이나 약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도 전생에서는 그렇게 차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동네는 맹물은 배탈이 쉽게 나서 차를 주로 마시다 보니 그 맛도 익숙해졌다.
찻잎 자체도 상등품인데 뭣보다 지금 먹고 있는 고기와 궁합이 환상이다. 삼겹살의 기름을 깨끗이 씻어주는 데다가 잡내를 없애기 위해 뿌린 약재와도 충돌하지 않아서 고기가 끝도 없이 들어가게 한달까?
“차가 입에 맞으세요? 다행이에요! 사실 세 가지 차를 가지고 있는데 고기를 먹어보니까 딱 이 차가 어울릴 거 같더라고요! 맞아, 제 소개를 안 했죠? 저는 다영이라고 해요!”
[심지어 차를 세 종류나 들고 다닌다고요? 대체 이 사람 뭐예요?]
나도 그게 궁금하다. 차나 술의 품질도 그렇지만 차를 내릴 때 절도 있는 동작을 보니 보통 산골 아가씨가 아닌 건 분명한데.
“이번에 숭산에서 연등회가 열리잖아요.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러 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깊은 산으로 들어와 버렸지 뭐예요. 그러다 여러분을, 아, 맞아. 산적을 만났지 참! 아무튼 어찌저찌 여러분과 만났네요. 여러분은 어디로 가세요? 혹시 연등회에 가는 길이시라면 같이 가도 될까요?”
[참 말이 많은 아가씨네요. 거기에 엄청 수상쩍고요.]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일단 산적에게 붙들렸다는 건 확실히 거짓말인 거 같고.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딱히 거짓말을 했다는 걸 철저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잠깐만요. 혹시 이 다영이라는 소저, 은 파파가 변장한 거 아니에요? 또?]
은 파파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나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으로 변장해서 어슬렁거리기나 하게.
[하지만 실제로 이 사람 저 사람으로 변장해서 어슬렁거리잖아요! 무한에서는 안 보였지만, 또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주변에 있었을지도?]
무한에서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소저가 은 파파일 리는 없어. 은 파파는 차를 지독히도 못 우리거든.
[혹시 알아요? 당신에게는 차를 못 우리는 척을 했을지도. 아니면 그 사이에 차를 잘 우리게 됐을 수도 있잖아요?]
은 파파든 아니든 수상한 건 사실이지.
제일 수상한 점은 이거다.
왜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묻질 않지?
[그도 그렇네요. 그것도 저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말이에요.]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안 물어보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보편적인 반응은 확실히 아니다.
내가 금태양이고, 우리가 연등회를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함께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떼어버리는 게 나을까?
“우리는 무림인이라 경공으로 길을 가고 있어서 함께 가긴 어려울 겁니다.”
“앗, 그래요?! 대단한 분들이셨군요! 그러면 조금 어려울지도…….”
“뭘 고민함? 내가 업음!”
그때 갑자기 당당이 끼어들었다.
“곤란에 처한 소저를 이런 산중에 두고 갈 수는 없음! 어차피 가는 길!”
[당당이 웬일로 저렇게 정파 도련님 같은 말을 한대요?]
“……나도 거들지.”
창천까지 저렇게 나오니 나도 뭐라 거절할 명분이 없군.
[당신까지? 뭔데요, 술이랑 차가 그렇게 맛있었나? 치사하게, 자기들만 맛보고!]
어차피 우릴 노리고 온 거라면 옆에 두고 지켜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딱히 차가 맛있어서는 아니라고.
[아닌 거 같은데, 아닌 거 같은데!]
홍령이 의심을 하거나 말거나, 다영은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처음에 산적을 핑계로 합류한 점이 수상하긴 했지만 연등회에 가는 동안은 별일이 없었다. 오히려 다영의 합류로 더 편한 점도 있었는데, 다영은 연등회에 가는 게 처음이 아닌 데다 이 일대의 지도도 갖고 있어서 효율적인 경로를 제시해 주었다. 그러니까 길을 잃었다는 점이 더 수상했지만.
덕분에 우리는 예정했던 것보다 일찍 숭산 일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제 막 연등회를 준비하는 분위기네.”
[잘됐네요. 숙소도 여기저기 비교해보고 좋은 곳을 잡을 수 있겠어요.]
“숙소 알아보실 거죠? 제가 안내할게요! 이 동네에서 제일 좋은 곳을 알아요!”
이번에도 다영이 나섰고 우리는 그녀의 인도를 따랐다. 지금까지 오면서 다영이 괜찮다고 한 객잔은 전부 괜찮았고 다영이 고른 음식은 시골 동네에서 맛보리라고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맛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제는 중간에 되새기지 않으면 처음 만남이 수상쩍었다는 것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여긴 불교 성지라서 그런가? 무당이랑은 분위기가 엄청 다르네요. 아직 소림사 입구도 아닐 텐데, 주변 건물들이 다 검소하고, 사람들도 소박해 보이고…….]
우리끼리 얘긴데 뭘 그렇게 돌려서 말해? 그냥 대놓고 말하면 되지.
[알았어요. 정말 낡고 가난한 분위기가 넘쳐흐르네요. 생전에도 소림이 이렇게 낙후한 곳이었던가?]
홍령이 살아생전의 기억을 더듬는 동안 나도 주변을 돌아보았다. 홍령의 말이 과하지 않았다. 건물들은 수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시간의 풍화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사람들은 건조한 얼굴로 낡은 옷을 기워 입고 다녔다.
이에 대한 정보를 듣기는 했다. 하오문도 개방도 소림의 성세가 예전 같지 않아 그 일대가 많이 쇠락했다는 말을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한 같은 곳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같은 구파일방인 무당의 도시, 양양과 비교해도 그렇다. 거긴 제법 부유한 도시의 느낌이 났는데 말이지. 호북 제2의 도시기도 하고.
[하지만 여긴 하남에서 제일 큰 도시잖아요?]
내 말이. 아버지도 하남성을 두고 상업이 발달하고 물산이 많아서 좋은 곳이란 얘길 몇 번이나 했는데 말이지.
“다영 소저, 소저가 안내해주는 객잔도 숙박비가 없습니까?”
“네! 금 소협은 이미 이곳에 대해 공부를 하고 오셨군요?”
“가장 좋은 객잔이라면서, 숙박비가 없음? 그럼 보호세는 어떻게 냄?”
보통 무림문파 일대의 경제는 다 비슷비슷한 구조로 돌아간다고 한다.
소림이나 무당처럼 힘과 명망을 지닌 문파에는 무림인이 아니라도 사람들이 모인다. 전생의 바티칸처럼 종교 명소 같은 느낌이랄까?
온갖 곳에서 사람이 몰리니 치안이 불안정해지고, 무림문파는 자신들이 직접 치안을 책임지거나 속가제자에게 맡겨 이를 관리한다.
무림문파 덕분에 치안이 확보되는 데다 다른 곳에 비해 더 많은 손님을 받는 상인들은 속가나 문파에 보호세 명목의 상납금을 낸다.
대부분은 그렇다. 하지만 이곳 소림은 다르다.
“소림은 자신들의 보호를 받는 이 일대 상인들에게 돈을 준다더라고. 먹고 자고 입는 것,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일들은 말이야. 사람들은 그 돈을 받고 재화와 용역을 무료나 초저가로 제공한댔어.”
소림의가 치료에 있어서 한 푼의 돈도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소림이 기본 생계는 책임져준다나.
[좀 이해가 안 가요. 그렇게 무료로 풀어주면 오히려 더 잘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의식주에서 돈을 아끼니까 다른 데서 펑펑 쓸 수 있잖아요.]
그게 참 사람 사는 세상의 미묘한 부분이지.
대놓고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 이렇게 많으니, 웬만한 품질과 가격으로는 경쟁이 안 되어 망할 수밖에 없다. 분위기도 그렇다. 다른 곳은 공짜인데 여긴 왜 공짜가 아니냐고 강짜를 놓는 이들도 한둘이 아닐 거다. 의식주 이외의 부분에서도 말이지.
보통은 서로 출혈 경쟁을 하다가 이렇게 되는 업계가 많은 편인데, 여긴 그 반대라니 신기하긴 하네.
[그래도 소림인데. 소림은 돈이 많다고요. 중원 전역에서 몰려오는 향화객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공양과 헌금은 다 어디에 쓰는 거래요?]
소림이 주는 돈이 근 십여 년간 반으로 줄어들었단 얘기가 있긴 했지. 공양은 오히려 더 늘었는데 말이야. 왜 그런지 그 이유는 하오문도 개방도 모르더라고.
소림도 사람 사는 곳이니 뭔가 비리가 있는 걸지도.
“여기예요. 이 일대 최고의 객잔!”
주변을 둘러보다 도착한 곳은 다영의 말대로 이 일대에서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객잔이었다. 물론 기준이 이 일대에서 괜찮다는 거지, 최근 새 단장을 마친 태양객잔이나 건물을 전부 수리한 북촌객잔보다 낡아 보였다. 정말이지 이 일대에 돈이 안 돈다는 게 실감이 나는 수준이었다.
“숙박비가 공짜인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당당도 별 불만이 없었고, 창천은 옛 태청장원에 비하면 지붕 하나 무너진 곳 없이 번듯하다며 문을 열었다.
그때 안에서 누군가 불만 어린 고함을 질렀다.
“이 따위가 최고의 객잔이라고? 제대로 알아본 거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