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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44화 (144/350)

144화

중원 무림에 태어난 이후 장거리 이동은 몇 번 해보지 않았지만, 이번 여정은 조금 더 특별했다.

그간 대부분의 여정은 말과 마차를 이용했다. 말도 몸이 좀 나아진 후에 탄 거지 처음 무한을 빠져나올 땐 마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수련을 위해서 두 다리로 뛰어다닐 때도 숙박은 반드시 마을에서 제대로 된 잠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오로지 두 다리로, 체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 거리를 가기로 했고, 마을에 들를 수 있다면 객잔에 머물지만 그게 아니라면 노지에서 야숙을 하기로 했다.

때문에 이번 여정의 리더는 당당에게 맡겼다.

나야 말할 필요도 없고, 창천도 북촌 주변을 크게 벗어난 적이 드물기 때문에, 사천에서 호북까지 올라온 경험이 있는 당당이 적임자였다.

“오늘은 여기서 멈춤!”

당당이 깊은 산 속에서 발을 멈췄다. 서쪽에서 해도 지고 있고, 슬슬 이동을 멈추고 밤을 지새울 자리를 찾아야 했다. 문제는 어디서 밤을 지새우냐였다. 마을이라면 객잔에 머물 수 있겠지만 우리가 멈춘 곳은 깊은 산 속이었다.

“저기가 좋겠군. 물이 있어서 편할 거 같다.”

창천이 그새 주변을 돌아보더니 물이 흐르는 계곡을 가리켰다.

[흐응, 역시 마을 밖을 잘 안 나돌아다녀서 그런가. 기본적인 걸 모르네요.]

물가는 물을 뜨긴 편하지만 모기나 날벌레가 많지. 근처에서 볼일을 봤다가 물이 오염될 수도 있고, 물을 마시러 온 산짐승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 산신 취급을 받는 곰이나 호랑이 같은 게 아니고서야 후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앞의 두 개는 좀 신경 쓸 부분이지.

“좋음! 물가는 물 긷기도 편하지. 계곡이 꽤 깊은데, 물고기도 있지 않겠음?”

“……잠깐만. 둘 다 무림인이라 모기 같은 건 신경도 안 써도 되는 거야? 전염병을 옮길 수도 있고, 뭣보다 잘 때 거슬리잖아.”

“모기? 모기는 귀찮다.”

“사천당가다!”

창천 녀석의 반응을 보니 무림인이라고 모기 물렸을 때 안 가려운 건 아닌가 보군. 당당 녀석은, 그래, 그것도 독이라고 저한테는 별 효과 없다 이거지?

[부럽네요. 한 번도 세가 사람이 부러운 적 없었는데, 지금 끝내주게 부러워요.]

어차피 모기도 안 물릴 귀신이 별 걸 다 부러워하긴.

“해가 지고 있긴 하지만 좀 더 이동해서 자리를 잡자. 여긴 지대가 너무 낮아. 딱히 위험하진 않겠지만 기왕이면 주변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가 좋겠지.”

다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이 일대에서 제일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좋아. 바람 부는 방향이 좋네. 불 피우기 좋겠어. 천막은 이 나무에 걸쳐 세우면 될 거 같고, 저기 있는 돌로 고정시키자. 바닥도 쐐기 박기 좋을 정도로 부드럽고, 이 정도면 습기도 안 올라오겠어. ……왜들 그렇게 봐?”

“……아니다.”

“수상한데. 너 금태양 맞음? 가면 벗어보셈!”

[이것도 그거죠? 전생의 기억?]

전생의 기억이긴 하지만, 현대에 살았던 나보다도 야외취침에 대한 상식이 없다니. 이 녀석들을 데리고 온 게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군.

“일을 분담하자. 나는 천막을 칠 테니까 당당은 물을 길어와. 창천은 이거 받고.”

나는 봇짐을 풀어 쇠자루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조립했다. 몇 번 손이 가자 자루는 순식간에 아담한 크기의 삽이 되었다.

노숙에 유용할 거 같아서 간양 누나에게 부탁한 물건이었다. 전생의 야전삽 디자인을 대충 알려줬더니 뚝딱 만들어주었는데, 무슨 철을 쓴 건지 사제 삽보다 가볍더라.

“저녁거리 잡아오라는 건가?”

“무기 대용으로도 쓸 수 있겠지만 일단 그거 아냐. 멀리, 바람이랑 계곡 반대 방향으로 가서 변소로 쓸 구덩이 좀 몇 개 파봐.”

“…….”

“안 쌀 거면 안 파도 되고.”

“……다녀오지.”

짜식이, 사람이 사는 데 있어 싸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안 할라고.

[중요한 문제긴 한데, 굳이 창천을 시킨 데서 의도성이 느껴지니까 그렇죠.]

내 조카사위가 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궂은일도 할 줄 알아야 내 조카 손에 물도 안 묻힐 거 아냐?

[뭐야, 인정하기로 한 거예요?]

“자, 그럼 난 천막을 펴볼까? 근데 짐이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별거 안 챙겼는데?”

[저기요? 이봐요? 말 돌리는 거예요?]

야전삽은 봇짐 밖에 매달아 놨기 때문에 아직 짐을 풀진 않았다. 마을을 나서면서 지난번처럼 사람들이 이것저것 쥐여 줄 걸 대비해서 좀 여유를 갖고 쌌다. 물론 그건 내 오판이었지만.

그래서 봇짐 안에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꽉 찼지?

먀아―

[끼야악! 얘, 얘가 왜 여기 있어요! 귀신 살려!]

보따리를 풀자, 그 안에는 잘 자다 깬 거 같은 금동이가 있었다.

“얘가 왜 여기 있어?”

홍령도 당황했지만 나도 당황스럽다. 데리고 올 생각도 없었고 봇짐에 들어 있단 생각도 안 했는데. 어쩐지 짐이 무겁다 싶더니.

“나참.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기간엔 여유가 있지만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다.

“그래, 사내놈들끼리 칙칙하게 다니기 좀 그랬는데. 너라도 있으면 낫겠지.”

[히익! 진짜 데리고 갈 거예요?!]

이참에 너도 좀 친해져 봐. 봇짐 안에 있었는데 지금까지 몰랐잖아?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눈에 보이니까 그런 거 같은데. 알러지 같은 건 아닐 거야.

“자, 한번 만져보라고.”

[우웃…… 귀, 귀엽긴 한데요. 귀엽긴 한데…….]

내가 금동이를 들어 올리자 홍령이 멀리서 팔을 뻗었다. 몸은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하면서 손을 뻗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하지만 소림으로 가는 내내 같이 다녀야 하니까 말이지. 정말 귀신에게 해로운 게 아니라면 익숙해져서 나쁠 건 없지.

홍령의 손이 금동이의 코끝에 톡 닿았다.

[히이이익! 이 이상은 무리예요! 무리!]

귀신은 금동이에게 닿자마자 기겁을 하며 저만치 도망쳤다. 정작 귀신 손이 닿은 금동이는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울더니,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홍령에게 꼬리를 세우고 다가갔다.

홍령과 금동이의 추격전 아닌 추격전을 보며 나는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웠다. 하룻밤을 지새울 자리를 정돈하고 나니 제 일을 마친 녀석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물 떠왔음. 그리고 이거…….”

“뭐야, 물고기네? 어떻게 잡았어?”

당당이 내민 것은 여기저기 난도질이 된 물고기 한 마리였다. 낚시로 잡은 게 아닌 건 분명하고, 검으로 계곡바닥을 쿡쿡 찌르기라도 했나?

[이건 검보다는 비도로 인한 상흔 같은데요. 당당은 당가에서 암기를 배우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기 와서 혼자 연습하고 있기는 한데…… 눈으로 훔쳐본 걸 해보는 거라 잘은 못함. 어? 금동이? 금동이 이거 줌! 구워줄게!”

어쩐지 나와 창천에게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시간대를 물어보더라니. 혼자 비도술을 연습해 볼 시간을 내려고 그랬던 건가.

당당은 머쓱한 듯 말을 흐리다가 금동이를 발견하곤 자기가 잡은, 난도질 된 민물고기를 모닥불에 구웠다.

알이 작아서 생선은 금방 익었고, 다 익은 생선을 건네자 금동이는 날래게 생선을 받아 물더니 제 몸의 반만 한 걸 물고 천막 아래로 가 생선을 야무지게 발라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육포나 씹어 먹어야겠네.”

“벽곡단도 있음. 맛은 없지만.”

벽곡단이라. 나도 챙기긴 했지만 솔직히 먹을 만 한 건 못 된단 말이지.

곡물가루와 송화가루를 뭉쳐 만든, 무림인들에게는 비상식량이자 간식이요 주식 같은 거라고 하던데, 내 입엔 텁텁하기 짝이 없고 전생에 먹었던 다식보다도 맛대가리 없는 물건이다.

제대로 된 무림인식 여행을 해보자고 냄비 하나 안 챙겨왔으니 마을에 들를 때까진 이것만 먹으며 지내야 한다.

금동이가 야무지게 발라먹고 있는 생선에 괜히 눈이 간다.

[설마 저 어린애 먹는 걸 뺏어 먹을 생각은 아니죠?]

아니라고. 나도 물고기를 잡아오는 건 어떨까 생각을 했을 뿐이라고.

그때 수풀 한쪽이 부스럭거리더니, 뒷간을 만들고 온 창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녀석의 손에 뭔가 묵직한 게 들려 있었다.

“고기임!”

“멧돼지잖아?”

“삽이 잘 들더군. 땅을 파는데 갑자기 공격해서 잡았다. 이걸 먹지.”

멧돼지라니. 갑작스럽긴 하지만 육포와 벽곡단을 먹을 생각에 불편해지던 위장이 고기라는 말을 듣자마자 요란하게 꼬르륵 소리를 냈다.

창천은 솜씨 좋게 털가죽을 분리하고 그대로 불에 멧돼지를 올리려 했다.

“잠깐만. 통구이도 좋지만 그렇게 하면 겉은 타고 안은 제대로 안 익어서 먹기만 불편하다고. 이렇게 해보자. 부위별로 해체 좀 해봐.”

“내가 함! 잘함!”

창천이 간단한 손질을 마친 걸 당당이 비도를 뽑아 순식간에 부위별로 해체를 했다. 나는 그중에서 제법 기름기가 도는 뱃살을 집어 들었다.

“양이 많으니까 다른 부분은 보존식으로 만들고, 이 부분을 구워먹자.”

모닥불 위에 얼기설기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표면을 닦은 야전삽을 올렸다. 해체하면서 나온 지방 덩어리로 기름을 내고 방향을 맞춰 얇게 썬 고기를 한 점씩 올리자 치이익― 불판에 고기가 익는 소리가 났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멧돼지는 잡내가 많은데. 아까 뿌린 약재 때문임?”

“약재들 중 일부는 향신료로 쓰이니까.”

고기야 어디나 똑같지만, 여긴 삼겹살 부위를 이렇게 먹지 않으니까 말이지.

야전삽에 구운 삼겹살은 약재와 향신료 향이 배어 맛이 좋았고, 처음 먹어보는 방식에 낯설어하던 녀석들도 어느새 맛 들려 고기를 주섬주섬 먹었다.

“이거 술 생각남. 나 술 있음!”

“나도 한 잔.”

“잠깐만, 그거 도수 엄청 높은 고량주잖아! 창천 넌 안 돼.”

“왜 안 되지? 이 멧돼지를 잡아온 건 나다.”

“지난번 형님이 왔을 때 너 고주망태 되어서 주정 부린 거 생각 안 나? 넌 안 돼. 잠깐! 금동아, 안 돼! 뜨거워! 식혀서 줄게.”

[이런 분위기 참 오랜만이네요.]

제 몫의 생선을 다 먹고 삼겹살을 노리는 금동이를 달래고, 술을 탐내는 창천을 막느라 정신이 없는데 홍령이 부스스 웃었다.

[전생에는 강호행을 다니면서 친우들과 이런 자리를 자주 가졌죠. 다정하고 의협심이 넘치지만 전투 앞에서는 항상 용맹하던 이들……. 그들은 지금 어찌 지낼지 궁금하네요.]

누구 생각나는 사람 있어? 인사를 나눌 순 없어도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볼 수는 있잖아.

[글쎄요. 흐릿하게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이나 별호 같은 건 떠오르는 게 없네요. 얼굴을 봐도 모를 수도 있고요.]

안타깝네. 그들이 기억하는 홍령에 대해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역사에 마두로 남은 이에 대해 좋은 얘길 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만으로도 고마워요. 그래도 이런 분위기는 좋네요. 옛날엔 꼭 이렇게 노숙을 하다 보면 멋모르는 산적들이 불쑥 찾아와서 거들먹거리다가 좋은 노잣돈이 되어줬는데.]

“치사하기 짝이 없군. 내가 마실 술은 내가 술을 구해오지.”

“이 산골에서 어떻게 술을 구함?”

“산이 깊으니 산적이라도 있겠지. 다녀오겠다.”

“뭐 하러 감? 불길 보고 찾아올 거임!”

불길한데.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동시에 같은 얘길 하다니.

무림인들에겐 산적이 노잣돈 자판기처럼 느껴지나 본데, 그래도 상대는 칼 든 무뢰배거든?

그때.

[누가 있어요.]

하아악! 하악!

홍령이 경고하고, 금동이가 고기를 먹다 하악질을 시작하고 창천과 당당의 고개가 한 곳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어둑해진 산속 어느 한 점을 향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사, 사람이다! 도와주세요!”

수풀 속에서 나타난 것은 산적이 아니라 한 명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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