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소림의 연등회 초대장이 필요할 때, 제일 먼저 둘째 형을 떠올리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도 그쪽이 어색한 사촌 같은데 둘째 형이라고 내가 귀여운 막냇동생이겠어?
[그래도 혈연인데요? 낯선 곳에선 같은 성씨만 만나도 괜히 반가운 법이잖아요. 지연, 학연, 혈연이 얼마나 강한 건데요.]
그런 세속의 인연을 끊고 들어간 거잖아.
뭐, 그 이후로도 계속 집이랑 연락한 걸 보면 세간에서 말하듯 정말 속세와 연을 단절한 건 아닌 거 같긴 하지만.
기왕 가는 거니까 얼굴 정도는 보겠지만 소림에 가서도 둘째 형이 뭘 도와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하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죠. 없느니만 못한 가족보다는 차라리 무심한 가족이 나을 때가 있는 것처럼요.]
연등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소림이 있는 숭산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으므로 나는 곧바로 출발을 준비했다.
무한에 갈 때야 준비할 게 많았지만 이번에는 인원도 단출하고 짐도 개인 짐 외에는 준비할 게 없었다.
“그럼 가볼까?”
이번에는 낮 시간대에 출발하기로 했다. 괜히 오밤중에 사라지면 사람들이 더 불안할 거라나. 차라리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거라는 금리의 조언을 따랐다.
[좀 걱정되긴 하네요. 사람들이 워낙 당신이 어딜 가는 걸 걱정했잖아요. 갔다가 안 돌아오면 어쩌냐고.]
돌아왔을 때 환영식도 매번 거창했지. 오고 갈 때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의 생계에도 부담이 될 테니 일부러 야음을 틈타 돌아오거나 했지만, 금리의 말도 일리가 있고 이들도 익숙해져야 하니까.
그래도 이번엔 좀 덜하지 않을까? 예전에야 이 마을에 나 떠나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제는 상주하는 의원의 숫자도 여럿이고, 누가 봐도 나는 이제 이곳에 기반을 잡았으니까.
제 기반을 두고 갈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헌데, 꼭 같이 가셔야 합니까.”
배웅을 나온 금리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응? 뭘? 무슨 소린가 했더니 금리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쪽엔 아련한 표정으로 금리를 보고 있는 창천이 있었다.
[뭐예요, 쌍방이에요?! 어머나!]
잠깐만.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는데.
[그거 봐요! 당신은 연애지사에 대해선 하나도 모른다니까요? 창천 정도면 괜찮다고요. 실력 있지, 잘생겼지. 어딜 보나 조카님에게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고요. 잘 어울린다! 천생연분이네요~]
내가 이번 생에서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 그랬지, 전생에는 그래도 인기가 나쁘지 않았거든?!
[그래 봤자 최소 이십 년 전이잖아요? 강산이 두 번도 바뀔 시간인데 다 까먹고도 남죠.]
아냐. 리의 표정을 잘 보라고. 저게 어딜 봐서 창천한테 호감이 있는 얼굴이야?
[조카님이 워낙 표정이 얼음장 같잖아요. 행동보다 확실한 게 없다고요. 그게 아니면 조카님이 왜 창천을 두고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겠어요?]
아무튼 그건 아냐. 진짜 아냐. 내기할래?
[하여간 내기 정말 좋아한다니까. 좋아요. 이번엔 내가 무조건 이길걸요? 내가 이기면 가는 동안 이십사 수 매화검 처음부터 끝까지 백 번 복습하기로 해요. 단, 내가 빙의하지 않은 채로. 당신이 직접 하는 거예요.]
우웩.
화산의 검을 수련하는 건 싫지 않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었다.
먼저 홍령이 빙의한 상태로 수십, 수백 번 검을 휘둘러 감각을 몸에 주입시킨 후 내가 그 감각을 떠올리며 익히는 방식이라 익히는 속도 자체는 빨랐지만, 원래 배움에 있어서 진도가 빠르다는 건 인풋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인 거라, 힘든 건 힘들다고.
[대신 당신이 이기면, 원하는 거 뭐든 한 번은 들어줄게요.]
진짜?
[그럼요. 나 홍령, 허튼 말은 안 하는 귀신이라고요.]
좋아. 물리기 없기다?
“꼭 창천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어?”
“그건, 아, 아닙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가 그러면 진짜 홍령이 말한 것처럼 너네가 썸을 타는 거 같잖냐.
아니지?
……아니지?
“혹시라도 내게 말 못 할 이유라면 괜찮지만,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말 못 할 이유는 아닙니다. 최근 이 일대에 마두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는 얘기가 있어 조금 걱정이 됐을 뿐입니다. 방비는 철저히 할 테니 창천을 데리고 가십시오.”
그거 봐. 내가 이겼지?
[아직 모르는 거라고요! 변명을 한 걸 수도 있고, 진짜 마두가 돌아다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속내는 모르는 거잖아요!]
아무튼 지금 당장은 그 이유가 아니라잖아. 좋아, 내가 원하는 거 한 번은 들어주기다?
[쳇,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 가는 동안 수련은 성실히 할 거니까.
그렇게 홍령과 티격태격하면서 우리는 태양의원의 문을 나섰다. 이번에는 일행 모두 신법을 쓸 줄 아니 말이나 마차 대신 두 다리를 써 숭산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므로, 문 앞에는 달리 대기하는 뭔가가 없는 게 맞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문 앞에는 북촌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보며 어딘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 예상대로 내가 떠나는 것을 불안해한 사람들이 또 송별을 겸하며 모여든 모양이었다.
“여러분, 걱정 마세요. 이제 제가 없어도 다른 의원들도 많고, 이렇게 태양의원을 키워놨는데 제가 어딜 가겠어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괜찮아요. 빨리 갔다 돌아올게요.”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어린애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일전에 북촌을 떠났을 때 내게 말라빠진 당과를 쥐여 주며 꼭 돌아와 갚으라고 울먹이던 그 애였다. 최근까지 고뿔을 심하게 앓았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마음 쓰였는데…….
“빨리 안 가구 뭐 해요, 의원님! 빨리 가요!”
응?
“오늘 멀리 가신댔는데 영 안 가시는 거 같아 걱정되어서 와봤습니다. 우리는 걱정 말고 어서 가시지요.”
“의원님이 어딜 다녀오시기만 하면 우리 마을이 먹고 살기가 좋아지는데, 아무렴. 어서 가서 오래오래 있다가 오십쇼!”
“금 의원은 걱정도 많아. 대장부답게 잘들 먹고 살고 있으라 하고 휙 갔다 올 줄도 알아야지! 여긴 괜찮으니 어여 가! 안 가니까 신경 쓰여서 일을 하러 못 가겠잖아!”
이상하다. 잘 다녀오라고 배웅해주는 분위기긴 한데…….
[왜 안 가면 등짝 한 대 맞을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요?]
내 말이. 무슨 집 걱정을 하냐고, 가서 돈이나 벌어오라고 등짝 찰싹 맞는 가장이 된 기분인데.
[그만큼 가족이 된 거겠죠.]
그런 거겠지?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좋아. 가자 숭산으로!
* * *
금태양이 떠난 자리.
사람들은 곧이라도 제 할 일을 할 것처럼 굴어놓고는 금태양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총관 언니가 말한 대로 아무것도 안 챙겨드렸는데. 금 의원님 주려고 산 당과는 내가 먹어야겠네…….”
“저 짐만 들고 가셔서 중간에 노숙할 때 드실 식량은 넉넉하실지. 역시 몰래 뭐라도 더 챙겨드렸어야 하나. 사내 셋이서 밥이나 제대로 해 먹으려나.”
그들 앞으로 금리가 다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금 의원님께서도 마음 편히 볼일을 보고 오실 겁니다.”
“아유, 뭘. 뭐 대단한 거라고 부탁까지야.”
“금 의원님은 여러분을 아끼니까요. 저도 삼촌께서 이 땅에 터를 잡을 때까지 물심양면 도움을 주신 여러분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삼촌이 돌아오실 때까지 모쪼록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금리의 말에 다들 걱정 말라며 외치고는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태양의원이 이 일대의 땅을 전부 소유하고 있었기에 금리의 일은 사실상 마을 전체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처음 금리가 총관으로 왔을 때, 사람들은 금태양이 아닌 타인이 소작지를 관리한다는 사실에 일전 청화검문의 일을 떠올리고 걱정했다. 금리도 그 부분이 초반에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내가 삼촌의 조카라는 걸 알게 되자 거부감이 눈 녹듯 사라졌지. 어떤 지시를 해도 믿어주었고.’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금리는 금가장의 맏손녀였고 어린 나이부터 상단의 일에 뛰어들었다. 어린 계집애라고 얕보거나 무시하던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부터는 친근하게 굴거나 믿음을 보이는 일은 흔했다.
‘하지만 이들처럼 온전히 날 믿은 건 아니었지.’
겉으로는 잘 대해주고 금리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속으로는 의심과 질시가 끓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뒷담화를 하다가 걸린 적도 많았다.
그래 봤자 제까짓 게.
어린 계집애가 하면 얼마나 하려고.
지 애비와 할애비 이름을 등에 업은 거지.
실력을 증명해 보여도 그런 자들은 속내를 더 꽁꽁 숨길 뿐 자신을 완전히 인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더 악심을 키웠고 끝내 금리의 행사에 똥물을 뿌렸다.
겉으로는 웃다가 아버지에게서 쫓겨나자 모른 척 외면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마상(馬商)을 하려다가 결국 금왕공방의 총관 자리를 택하게 된 것도 결국 그 시절 금리를 시기 질투하던 이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금리는 제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때에 비하면 자신은 나이를 먹었고, 실적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금리가 실력이 없어도 괜찮다며 보듬어줬을 것이다. 부족하면 함께 하면 그만일 거라고 했을 거다. 짧게 겪어봤지만 이들은 그랬다.
‘금가장에서는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어. 그곳에서는 항상 완벽해야 했지.’
신기한 일이었다. 부족해도 괜찮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오히려 더 잘하고 싶었다.
‘삼촌이 안 계신 동안 이곳을 잘 지켜야 해.’
평소였다면 마두가 이 일대에 나타났다고 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태양의원의 경비를 맡고 있는 금왕표국에 고수 한둘을 더 요청한다는 선에서 끝났겠지. 그러나 마음가짐이 바뀐 지금은 창천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게 다가왔다.
하지만 창천 같은 실력자가 먼 길을 가는 금태양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니까.
“거기 끝내주게 멋진 금가장 아가씨? 뭘 좀 물어보고 싶은데. 금태양이라는 끝내주는 환자가 여기 있다지?”
금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집무실로 향하려는데, 누군가 콕 찝어 금리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낯설지만,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도 같은 인상이었다. 아니다. 어디선가 봤다면 쉽게 잊을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은 수려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지만 위험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피 냄새.’
위험한 분위기는 기묘한 표정뿐 아니라 냄새에서도 느껴졌다. 무공 수련도 했고 상행을 다니며 여러 상황에 처해본 만큼 금리는 피 냄새를 구분할 줄 알았다. 달거리 때의 피 냄새와는 달랐다. 그래. 사내에게선 피 냄새와 동시에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나? 마의. 그래서 환자는 어딨냐니까? 흥미로워 죽을 거 같아!”
금리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마의(馬醫)가 아니다. 마의(魔醫)다.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르고, 동남동녀의 정혈을 약으로 사용하며, 온갖 도를 넘는 행위를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자행한다는 의원.
그 실력이 현묘하긴 하여 사대신의 중 한 사람으로 불리나 정파에서는 척결해야 할 마두로 이름이 오른 자.
이 일대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려 걱정했던 마두가 바로 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금태양을, 그것도 ‘환자’로 지칭하며 찾는다고?
“금 의원님은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뭐? 어디 갔어? 따라가지 뭐.”
“곧, 곧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죠.”
“흐음, 여기서?”
절대 이자를 삼촌에게 보낼 순 없다. 금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 이자를 봤는지 기억이 났다.
금태양과 금리가 둘 다 어렸던 시절, 금왕이 금태양을 치료하기 위해 사대신의라 불리는 이들을 초빙했던 적이 있다. 그때 초대에 응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마의였다.
하지만 금왕은 결국 그를 금태양에게 보이지 않고 쫓아냈다.
“좋아, 아가씨. 여기도 재밌어 보이니까 좀 기다리지 뭐.”
마의가 금태양을 산 채로 해부하길 원했기 때문에.
“하지만 재미없어지면 바로 떠날 거야. 알았지?”
“객실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금리는 금태양이 없는 동안 태양의원과 북촌을 잘 관리하겠다고 다짐했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마의가 나타난 지금 그녀는 급격하게 자신이 없어졌다.
‘삼촌이 돌아오시기 전에 내 선에서 처리해야 해. 삼촌, 제발 오래오래 있다가 오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