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나도 약재 보유 현황은 꾸준히 확인하고 있다.
최근 거래량이 조금 줄긴 했지만 약재란 게 원래 공산품처럼 항상 꾸준한 양이 확보되는 게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는데.
“따로 확보한 정보라도 있어?”
“삼촌께서 업무를 보지 말고 우선 주변과 친숙해지라고 하셔서, 한동안 태양의원의 의원들, 북촌의 마을사람들, 그리고 분원과 그 지역, 제약방의 물건을 가져가는 표국과 상인들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엄청나네요. 의원들이랑 마을사람 얘기나 좀 들어보라고 했는데. 며칠 안 보인다 싶더니 분원까지 다녀왔던 거군요.]
“이걸 보십시오.”
금리가 내민 문서는 약재의 목록을 정리한 표였다. 그중 붉은색으로 표시한 것을 보자 나는 금리가 무엇을 문제라고 지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거래량이 줄어든 약재들, 태청의문 지정 처방에 쓰이는 약재들이군.”
일부 약재의 거래량이 줄어든 걸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한 가지 병에 한 가지 약만 처방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감기 하나에도 처방할 수 있는 약의 종류가 스무 개는 된다. 증상이나 경중에 따라 쓰는 게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대체품으로 쓸 수 있는 약이 무척 많다는 뜻이지.
헌데 하필이면 태청의문 지정 처방에 쓰이는 약재들만 거래량이 줄고 있다라…….
[절대 우연일 리 없어요! 그 호랑말코가 앙심을 품은 거라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문파가 그 정도 일 가지고 아직 소규모 동네 프랜차이즈에 불과한 태양의원을 핍박하는 건 좀 우스운 일이긴 한데, 직접 겪어본 무당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대체할 약은 얼마든지 있고, 우리는 원래도 태청의문 지정 처방의 효율이 나빠서 안 쓰던 약도 많거든. 약재 가격 자체도 비싼 편이고 말이지. 무한에서 사온 약재도 있으니 위기까지는 아니야.”
하지만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일도 아니지.
“어디까지 알아봤어? 다른 약재도 많은데 딱 태청의문 지정 처방에만 쓰이는 필수 약재들만 거래량이 줄어드는 이유, 파악했어?”
태청의문 지정 처방은 무당의라면 다 쓴다. 애초에 그걸 쓰라고 압박이 들어온다는 얘길 들은 적도 있으니, 그 약재의 공급에 태청의문이 깊이 관여하고 있을 거다. 상당한 이문을 남기고 있겠지.
그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 많은 무당의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꾸준한 공급이 가능하다는 건데, 무당산 지맥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가능한 일이긴 하지.
중요한 점은, 이 약재들의 거래량에 변동이 있다는 건 그 뒤에 태청의문이 있다는 뜻.
금리는 어디까지 이 일을 파악하고 있을까?
“제가 확인한 건 중간 거래상까지입니다. 이상하게 도매상에서 약재가 넉넉지 않다며 내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아직 확실한 끈은 잡지 못했습니다.”
금리도 무당을 의심하고 있군. 하지만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무한과 달리 금가장의 정보를 쓸 수 없어서 한계가 있다.
이 부분은 도와주는 게 좋겠군.
나는 품에서 금왕전장의 전표를 꺼내 금리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손에 넣은 금괴를 맡기고 받은 거다. 상당한 액수에 놀랐는지 금리의 눈이 커졌다.
“삼촌, 이건?”
“새경 아니고 경비야. 이걸로 정보원을 확보해. 본격적으로 조직을 갖출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낌새를 사전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구축하면 좋겠어. 상대는 구파일방 중 하나니까 이 정도는 써야겠지.”
적지 않은 돈이지만 무당을 상대로 정보원을 심는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돈을 얼마나 효율적, 효과적으로 쓰느냐가 금리의 역량이겠지.
하오문과 개방을 이용할 수 있긴 하지만 일단 그들에 대한 접촉은 나만 할 거고, 원래 정보를 다루는 이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금리가 적절한 수준의 정보 선을 구축할 수 있다면 하오문과 개방을 활용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무당과, 아니, 태청의문과 전면전을 할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데 가만히 앉아서 맞고만 있을 순 없잖아. 내가 양양 사건도 양보해 줬는데.”
모든 사람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거래다. 나와 깔끔하게 거래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하지.
지난번 양양에서 태청의문과 한 거래는 솔직히 정당하다 못해서 내가 밑지는 장사였다.
돈? 적잖은 액수긴 했지만, 태청의문이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데?
무당을 휘청거리게 한 것도 아니고 청운진인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의 돈은 무당에겐 별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걸로 명예를 샀잖아. 그것도 헐값에.
사람들은 능력 있는 이들에게 약해서,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어도 능력이 뛰어나면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세상은 무능한 이에게 가혹하다. 무능한 주제에 도덕적으로 문제까지 있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나는 내 공을 태청의문에 돌려줌으로써 그들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걸 막아줬다.
앞으로 무당의 영역에서 계속 의원을 해나가야 할 테니, 적당히 좋게 지냅시다 하고 밑지는 장사를 해줬더니만.
이걸 이렇게 돌려줘?
“전면전까진 아니어도, 뺨 한 대 칠 일 있으면 시원하게 쳐줘야겠어. 그럴 일을 만들 수 있으면 더 좋고.”
“고심해보겠습니다. 삼촌께서 저를 찾으신 일은?”
“천하백대의원이라고,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천하백대의원과 천하백대명의. 할아버지께선 항상 천하백대명의가 발표되기 전에 먼저 그 결과를 손에 넣어 새로이 이름을 얻은 신진의원을 초빙하시곤 했죠.”
“아버지가?”
“예. 새로이 이름난 의원이라면 삼촌을 치료할 방도를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결과가 발표되거나 몸값이 오르기 전에 서둘러 데려오곤 했죠. 그중에서도 옥석을 가려냈기에 삼촌이 직접 본 의원은 몇 없을 겁니다.”
항상 명의라 불리는 이들을 붙여주신 건 알았지만 뒤에서 그 정도로 신경을 쓰셨다니…….
“제가 아는 건 그 정도입니다. 그 이상 아는 것은 없어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거 같습니다만, 지금 상태로도 말석에 오르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문제지. 내 목표는 중위권 이상이거든.”
“……그건 지금으로는 확실히 무리가 있군요. 하지만 지금처럼 내실을 다져가며 성장한다면 십 년 안에 중상위권은 문제없을 거 같습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 아직 완벽하게 나은 거 아니다?”
“!”
“그렇다고 오늘 내일 하는 수준도 아니긴 하지만, 십 년이나 두고 보기엔 조금 조급하네. 이해하지?”
“……그게 전부입니까?”
예리하기는.
하지만 아직 금리에게 의맹 정회원을 노린단 얘기를 해줄 순 없다.
그건 리가 얼마나 하는지를 지켜본 후의 일.
“뭔가 이유가 더 있군요. 하지만 제게 아직은 얘기해주실 생각이 없고요.”
“그렇지.”
“허면 알아내겠습니다. 모시는 분의 머릿속은 꿰고 있을 줄 알아야 총관이라 할 만하지요. 천하백대의원에 대해서도, 정보 선을 구축하면서 뭔가 이름값을 높일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태청의문 지정 처방에 쓰이는 약재 거래량이 줄어드는 건 내가 신경 쓰지. 그건 의원 경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금리와 회의를 끝낸 후, 다음 날.
나는 의원들을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했다.
“……이런 상황이라 대응 방안이 필요할 듯합니다. 장 의원님, 현재 태청의문 지정 처방용 약재의 보유 현황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네만, 그거 굳이 써야 하나? 무당 놈들, 그 처방 안 쓰면 아주 협박은 있는 대로 하면서 비싸게 팔아먹기나 하고. 솔직히 효과도 구려.”
“자, 장 의원님. 말을 좀 조심해서 하셔야…… 그래도 무당 놈들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젊은 의원 하나가 장 의원의 욕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조심해서 하누? 어차피 여기 있는 우리는 다 한 패거리인걸. 무당 놈들한테 다 찍혔을 텐데 그놈들 욕 좀 한다고 뭐 더 달라질 거 있누? 안 그런가? 에라이, 호랑말코들. 도관으로 국이나 끓여먹을 놈들. 무공 수련하다가 쓸 일 없는 부랄이나 터져버려라. 떼잉.”
“푸하하!”
“킬킬!”
무당 놈보다 걸쭉해진 욕설에 다른 의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당을 욕하는 게 어색하던 이들도 결국 미묘한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었다.
장 의원 덕분에 분위기가 좀 풀렸군.
다들 무당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잘 아는 이들이라 무당이 태양의원을 향해 실력행사에 들어갔다는 얘기에 쫄아버린 티가 났거든.
[분위기 좋네요. 두려워하느니 상대를 우습게 보는 게 훨씬 낫죠.]
장 의원이 ‘나 잘했지 않누?’하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뽐을 냈다. 나도 피식 웃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태청의원 지정 처방의 효과가 썩 뛰어나지 않다는 데는 동의합니다만, 그래도 환자들 중 그 처방을 고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일단 남은 것은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무당이고 태청의원이다.
오랜 세월 이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그들의 이름값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비싼 원가와 비효율적인 치료 효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부득불 무당의 자격을 따고 그 처방을 고수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브랜드 파워, 거기에 위약효과.
전자는 무시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다.
실제 효과는 대단하지 않아도, 그 유명한 무당의 처방대로 만든 약을 먹었다는 사실에 회복이 몇 배나 빠른 걸 몇 번이나 눈으로 봤으니까.
사람의 몸과 마음이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해당 약재가 들어가는 다른 처방들은 가급적 대체할 수 있는 처방으로 돌려서 소비를 지양합니다. 반드시 해당 처방을 써야 하는 경우라도 다른 약을 곁들여 사용을 최소화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의원들은 그 자리에서 곧장 태청의문 지정 처방 대신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처방 등을 내어놓았다. 지정 약재 대신 다른 약재를 쓰는 꼼수도 등장했다.
특히 장 의원의 목소리가 높았다. 최근 번역한 금궤요략에 실전되었던 처방들이 많았는지 끝도 없이 대체할 수 있는 처방이 나왔다.
“이 정도면 걱정 없겠는데요?”
“이참에 태청의문이 밀어붙인 그 막무가내 처방들 좀 없애버립시다!”
“아자! 우리가 무당을 이긴다!”
대체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처방이 있고, 이를 바로 능동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실력 있고 의욕 넘치는 의원들이 있다.
[그 정도 소극적인 방해로 태양의원을 어찌하려고 하다니, 경기도 오산이라고요!]
홍령 너는, 그……
아니다. 그렇게 사는(?) 낙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지, 그래.
무당의 위협에 대한 대책, 태청의원 지정 처방을 지양하는 방식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적용되었다. 의원들은 잠을 쪼개 내공심법을 수련하고 무공을 지도받는 와중에도 변경된 부분을 실수하지 않고 잘 처방했다.
용 의원을 비롯한 나이 많은 의원들은 오히려 이 대책을 반겨서, 장 의원과 짝짜꿍이 되어 신이 나서 대체 처방들을 써냈다.
[솔직히 나이가 있어서 익숙해지는 데 시일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무당을 거스른다는 게 오죽 신이 나나 봐요.]
용 의원이 새로 만들어 낸 처방전을 훑어본 홍령이 쓸 만하겠다고 사용 통과를 내주며 말했다.
문제는 내부의 우리 의원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대체 왜 이 처방을 쓰는 거요? 난 태청의문의 처방을 받고 싶다니까?”
“실력이 엄청난 무당의라고 해서 왔는데, 뭐야, 진짜 무당의 맞아? 아닌 거 같은데?”
“난 다른 약은 안 먹겠다니까요! 늘 먹던 약이니까 이걸로 주세요!”
태청의문 지정 처방만을 고집하는 환자들이 무더기로 태양의원을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