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금 의원이 그리 말하니 꿈이라도 꿔보겠소이다.”
용 의원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눈을 반개하고 내공심법의 자세를 잡았다. 구결에 대해서는 의원들이 나간 직후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가 용 의원님의 내기를 인도할 겁니다. 긴장을 푸시고 따라주시면 돼요.”
나는 용 의원의 뒤에 자리 잡고 단전이 있는 위치에 손을 갖다 댔다. 홍령이 빙의했다.
[역시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군요. 차곡차곡 쌓인 한 줌의 내공이 용 의원의 안에 자리잡고 있어요.]
홍령의 내공심법을 익힌 이후 나도 내공이 제법 쌓였지만, 용 의원의 혈도를 뚫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진 않았다. 어떻게 기를 짜내면 용 의원 하나쯤은 가능하겠지만 태양의원 의원들 전부 혈도를 뚫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애초에 당신 상태로는 용 의원 하나 혈도 뚫어주다가 말라 죽을걸요. 과장이 아니라 진짜 죽는다고요. 상태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당신 병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요.]
알았다고.
내 몸의 기가 손을 통해 살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이 과정에선 용 의원이나 나나 잡념을 지우고 집중해야 하지만, 실제적으로 하는 건 홍령이라 나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홍령도 용 의원도 집중하느라 아무 말도 없으니 나는 좀 지루하고……
졸린 것도 같은……
……
……
……
잠이 들었었나?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는 깊은 명상에 빠진 용 의원이 있었다.
[괜찮아요? 잠깐 정신을 잃은 거 같던데.]
넋이 나갔었다고? 그냥 잠든 거 아닌가?
[내가 빙의해 있지 않았으면 그대로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을걸요. 지난번에 정신을 잃었을 때처럼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그 정도였다고?
지난번 정신을 잃었을 때라면, 무패도를 상대하며 경혈의 기를 전부 끌어다 썼을 때다.
타인의 기를 끌어주는 데도 상당한 내기가 필요하다고 홍령에게 사전 설명을 듣긴 했지만…….
[지금 살펴보니 몸이 좀 허한 거 같기도 하고요. 보약을 좀 먹어야 하나?]
그럴 수도 있지. 무한에서의 일정도 빡빡했고, 돌아오자마자 온갖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쉴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몸을 일으켜 깊은 명상에 빠진 용 의원을 방해하지 않게 조심조심 문밖으로 나갔더니, 신생이 이미 밖에서 호법을 서고 있었다.
“고맙다. 늦은 밤인데 피곤하진 않고?”
“옛날에는 며칠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승님은 수련하러 가시죠?”
내가 다른 일을 해야 할 걸 알고 미리 와서 용 의원의 호법을 자처하고 있는 거다.
별말도 안 했는데, 요 눈치 빠른 녀석.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내 방에 들러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고 향한 곳은 장원의 연무장이다.
원래는 창천이 밤새도록 수련을 하는 공간이었지만, 미리 말해둔 덕에 연무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했다.
그곳에서, 나는 우선 챙겨온 준비물을 확인했다.
검.
검집에서 뽑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볍고 낭창한 검이다.
무한을 떠나기 전 천하제일 검장이라는 남궁혁에게 받아온 검.
태양보도 같은 단도가 아닌 장검이 주는 낯선 무게감에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오늘부터 나는 화산의 검을 배운다.
[의원들에게 전수한 것은 화산의 무공이라는 점이 두드러지지 않아요. 누군가 트집을 잡는다 해도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죠. 하지만 내가 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달라요. 한 번이라도 화산의 무공을 견식해 본 적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 검이 화산의 검이라는 것을 알 거예요.]
무한에서 화산파의 무공비급을 발견한 이후, 홍령은 이따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누가 봐도 화산의 비급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모습이라 나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가만두었다.
무한을 떠나는 날, 홍령이 내게 말했다.
―금태양, 화산의 검을 이어받아 줄 수 있어요?
[화산의 무공임이 드러나지 않게 손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화산의 검을 전수하는 의미가 없어요.]
홍령이 고민하는 동안 나 또한 고민했다. 나를 떠날 수 없는 귀신인 홍령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다. 홍령이 내게 화산의 검을 익힐 걸 제안하리라는 걸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다.
화씨의문의 의술을 계승한 것만으로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데 여기에 화산의 검이라니.
섬서사변과 관련된 정보들을 생각하면, 화산의 검을 익혔다는 사실만으로 마두의 후인으로 몰릴 수 있다.
허나 세상에는, 이해득실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화산의 검을, 우리의 넋을, 그 유산을 받아줄 수 있나요? 화산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라도, 우리의 길을 후대에 전해줄 수 있나요?]
“나야말로 다시 한번 물어볼게. 나로도 괜찮겠어?”
비정상적인 몸.
검에 대한 재능은 달리 대단하지 않은 데다, 아버지는 섬서사변을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버지의 죄를 유산으로 짊어지겠다 다짐한 것과는 별개로, 홍령은 원수의 자식에게 화산의 검을 전수해야 하는 거다.
오직 자신들의 넋이 무명소졸의 검으로라도 남기를 바라면서.
[충분해요. 아니, 당신 외에는 없어요. 선택지가 당신뿐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넋이 누군가의 이름을 달고 명맥을 이어야 한다면 그 이름의 주인이 당신이길 바라요.]
―지난 일 년간, 당신은 그것을 충분히 증명했어요.
“화산이 여기서 북서쪽이지?”
나는 달을 보고 북서쪽을 찾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그곳을 향해 구배지례를 올렸다.
“비록 화산의 제자는 아니지만, 제가 당신들의 넋을 세상에 남기겠습니다. 탐탁잖은 제자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시작하죠.]
휘영청 밝은 달이 뜬 밤.
죽어 고목이 된 매화나무의 끝가지에서, 짙은 어둠과 살얼음 같은 추위를 이겨낸 꽃망울이 움트기 시작했다―.
* * *
보름 후 저녁.
그날의 업무를 마친 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통 상석에는 나 혼자 앉지만 오늘은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용 의원이었다.
모두들 걱정 어린 눈, 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용 의원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한 번 기를 이끌어 준 다음 자기 자질로는 이 심법을 운용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겠다며 휴가를 내고 틀어박혔으니까요. 다들 궁금할 만하죠.]
그만큼 걱정들도 많이 했고 말이다.
의원들이 몇 번이나 내게 용 의원의 용태를 물어보려다 말았는지, 원.
혹시라도 용 의원이 새로운 내공심법을 익히다가 중태에 빠졌는데 내가 감추는 건 아닌지, 나를 믿으면서도 반신반의하던 분위기였던 걸 모르지 않는다.
“오늘은 새로운 내공심법을 익힌 용 의원의 성취를 다 함께 지켜보는 자리입니다. 다들 궁금하셨을 텐데, 거두절미하고 시작하죠. 용 의원님?”
“알겠소이다.”
용 의원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가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긴 순간.
“헉?”
“손끝에 불이!”
“삼매진화, 삼매진화 아닙니까?!”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몇몇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매진화는 고수들에게는 썩 쓸모없는 기술이라 여겨지지만, 그것도 고수들에게나 그렇지 이들에게는 아니었다.
애초에 점혈보다 내공이 더 많이 소모되는 기술이라고.
“후, 역시 이 정도가 한계구려.”
촌각의 짧은 시간 동안 삼매진화를 피워 올린 용 의원이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용 의원님.”
용 의원은, 내가 이들에게 약속했던 ‘최소한 점혈은 가능할 내공을 쌓게 해주겠다’는 말 그 이상의 성취를 얻어낸 거다.
[수십 년의 수련으로 길이 잘 닦여 있었어요. 용 의원의 빠른 성취는 그 덕분이겠죠. 본인의 마음가짐 또한 그렇고요. 때로 어떠한 진심은 자질을 뛰어넘기 마련이죠.]
자질 없는 진심이 절대고수의 길을 담보할 수는 없겠지만, 그 자질 내에서 최대한을 이끌어 낼 수는 있다.
용 의원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눈에 띄는 성취가 없음에도, 좌절뿐인 인생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온 길. 그 끝에 피어난 달고 영광스러운 과실.
다들 그걸 알고 있는지, 몇몇은 제 성취도 아닌데 괜히 고개를 돌려 눈가를 닦았다. 대놓고 용 의원의 손을 잡고 “감축드립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흑……!” 같은 얘기를 하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다.
[애초에 용 의원이 휴가를 낸 동안 별다른 불만 없이 그의 일을 분담한 이들이잖아요. 훈훈하네요.]
나는 그들의 감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점혈로도 충분하지만, 용 의원님께 삼매진화를 가르쳐드린 건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삼매진화는 일전에 당당이 쓰는 걸 보고 홍령을 졸라 익혔다. 별 쓸모도 없는 데다 현재 수준으로는 익히기도 힘든 걸 왜 배우려 드느냐 했지만, 나는 그게 제법 쓸모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수술을 하다 보면 절개 부위를 지져야 할 때가 있는데, 대체로 크기가 작은 국소부위인 데다 근육이나 힘줄이 아닌 장기인 경우가 많아서 그냥 불을 갖다 대기엔 위험이 컸다.
하지만 내공으로 피워낸 불꽃이라면?
순수한 화기를 집중시킨 것이니 감염의 위험도 없고 정도도 조절할 수 있다.
나는 검기를 가해 수술 도구들을 소독하지만 의원들은 이 내공심법을 극성으로 익혀도 그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삼매진화를 한순간 지펴 작은 수술도구를 소독하는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소독 수준이 전생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지는 이곳에서는 어떻게든 그 수준을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였고 삼매진화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실험 결과도 만족스러웠고.
이런 점들을 설명하자 다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질문이 있습니다. 전에 무림인을 치료하다 들은 얘기인데, 삼매진화는 보통 내공으로는 꿈도 못 꿀 경지라고 하던데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사실은 편법이다.
내가 양팔의 경혈에 기를 고이게 해 일시적으로 힘을 발휘했던 방법을 응용한 걸로, 상대적으로 적은 내공으로 점혈과 삼매진화까지는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그 대신 다리와 몸체 등 기의 흐름이 약해지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저만의 비법입니다.”
홍령도 참신한 발상이라고 했으니까 내 비법 맞지, 아무렴.
[맞아요. 이번엔 인정할게요.]
“그러면 저희는 언제부터 배울 수 있는 겁니까?”
“한 번에 지도할 수 있는 인원에 한계가 있어서요. 아마 돌아가면서 익혀야 할 듯한데―.”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는 주저하던 의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다.
“진료를 보는 짬짬이 시간을 내 수련하겠습니다!”
“저는 밤을 새워서도 수련할 수 있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휴가를 내고 누구보다 빠르게 익혀보겠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모두들 눈을 빛냈다. 조금이라도 내 눈에 띄기 위해 까치발까지 들며 손을 높이 들었다.
[좋아요, 좋아. 열정은 좋은 거죠! 선발주자의 성취가 빨라야 나머지의 의욕도 고취될 거고, 성취가 느린 이들은 천천히 시간을 갖고 봐줘야 하니까―.]
홍령이 연말 특가세일에서 99% 할인 파격가 물건을 장바구니에 주워 담듯 신나게 자질 있는 의원들을 골라냈다. 홍령이 가리킬 때마다 내가 이름을 호명하자 의원들의 얼굴에 희비가 갈렸지만, 다들 제일 먼저 선발된 의원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이 네 분은 오늘 저녁부터 저와 수련을 시작합니다. 칠 주야간은 유급 휴가를 드릴 테니 수련에 몰두해주세요. 이들의 빈자리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제게도 차례가 돌아올 것을 알았기에 다들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 의원은 바쁜 나를 위해 보조지도를 자청했고, 의원들은 선발된 이들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로테이션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수련에 들어가는 이들은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의원들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치는 일은 궤도에 올렸고, 이제 다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