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청화문주는 얼마 전 사거(死去)하지 않았습니까?”
“그 딸이 청화문을 이었다네. 어린 나이지만 제법 실력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그냥 금 의원님이 가르쳐주시면 안 됩니까?”
다들 같은 마음인지 나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중 청화보다 나이가 어린 자가 없으니 이런 반응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미안하지만 이 부분은 결정된 사안이니 따라줬으면 좋겠습니다. 교관의 실력은 내가 보고 확인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에게 최고의 지도를 해줄 겁니다.”
“창천 님께 배우면 안 되겠습니까? 그분이 실력은 더 좋을 텐데.”
“스스로의 실력과 남에게 가르치는 건 별개라는 걸 여러분도 잘 아실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생각보다 반감이 심하네요.]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게 전수할 의원용 무공은 아무리 체술이 중심이라지만 화산파에서 흘러나온 무공이다.
선량하고 정직한 데다 내게 마음의 빚도 있는 청화 같은 이가 아니라면 맡기기 어렵다.
창천? 그 녀석은 하루도 안 되어서 의원들을 바닥에서 못 일어나게 할 걸.
의원 접을 생각 아니면 녀석에게 맡길 순 없지.
“여러분은 저의 결정을 못 믿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청화문주에게 교관을 맡긴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그녀를 교관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저의 안목을 의심한다고밖에 볼 수 없군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강하게 말하자 의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강경하게 나가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군. 좋게 얘기할 때 넘어가면 얼마나 좋아.
[단짠단짠이랑 맵달맵달이 잘 먹힌다면서요. 사람 대하는 것도 똑같죠, 뭐.]
“저기, 그래도 하나는 여쭤야겠습니다. 몇 가지 시범에서는 점혈을 쓰시던데, 그러면 저희가 그 무공을 익혀도 사실상 효율이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내가 호신 무공 쪽을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내공심법은 내가 지도할 겁니다. 둘 다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까 더 필요한 쪽을 하는 거죠.”
“내공심법을……?”
“장담하는데, 이보다 여러분에게 효과적인 내공심법은 없을 겁니다. 오래 수련한다고 해서 물 위를 걷고 하늘을 나는 고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계가 명확하지만, 대신 빠르고 안전하게 점혈이 가능할 정도로 내공이 증진될 겁니다. 기존에 내공심법을 꾸준히 익혀 온 분에게는 효과가 더 클 거고요.”
“금 의원님이 익히신 내공심법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내가 익힌 내공심법은 두 개.
어릴 때부터 살기 위해 익힌 천소와공은 사실 내공심법이라기 보단 생명유지 수단에 가까운 심법이다.
심각하게 아프던 때의 나 같은 상태가 아니면 익힐 이유가 전혀 없는 심법이지.
또 하나는 홍령이 내 몸에 빙의해 익힌 무명의 내공심법.
지금은 그게 화산파의 심법 중 하나라 추측하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심법인지는 홍령도 기억하지 못했다. 금감양의 서고 비밀공간에도 그 심법은 없었고 말이지.
그걸 익히고 몸 상태가 무척 좋아진 걸로 봐선 상승의 무공인 거 같지만, 가르칠 수가 없으니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절 믿으세요.”
“금 의원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러면 가르쳐주는 무공의 출처는 어찌 되오?”
“……이름 모를 고수가 남긴 심득이라고 할까요?”
체술의 경우엔 내가 만든 무공이라고 뻥을 쳐도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내공심법은 그럴 수 없었다.
내공심법의 창안은 오래도록 심법을 연구한 무공연구가나 자신만의 심득을 완성한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란다. 아니면 구파일방 같은 곳에서 고수 몇 명이 달려들어 기존 내공심법을 개량하는 정도라나?
허니 내가 만들었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고, 설령 그렇다 해도 전혀 신뢰가 안 갈 테니 적당히 무명의 심법이라고 말하기로 홍령과 얘기를 마친 상태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시장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걸 사 온 게 아니라, 제 형님 금왕표국주 금감양의 서재에서 가져온 겁니다. 형이 괜찮은 무공비급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거든요.”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의 낯은 풀리질 않았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심법을 잘못 익히면 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당파에서요.”
“종류가 다른 심법을 동시에 익히는 게 제일 큰 위험이라고 하더이다. ……무당에서 그런 말을 했더랬지.”
이건 아까처럼 강하게 나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다들 무당파에 썩 좋은 감정을 가진 게 아닌데도 무당의 이름을 들이밀었다.
태청의원이 하는 짓은 지저분하지만 무당파는 엄연히 구파일방의 한 축이다. 무공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게 정답이기도 하고요. 틀린 말은 아니죠.]
그래. 그게 문제란 말이지. 무당이 맞는 말을 한다는 점이 말이야.
화산의 무공이라는 것만 알려줄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안정성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화산은 무당과 마찬가지로 도가문파라 그 기반이 비슷해서 내공심법 간의 충돌이 덜하단 말이지.
[그것도 상승무공이나 되어야 충돌이 심하고 그러죠. 이 정도 내공심법으로는 괜찮다고요. 오히려 그, 뭐지? 당신이 말하던 신 어지? 시너지? 효과가 생길 수도 있고요!]
아무리 좋은 효과가 있으면 뭘 하나. 말을 할 수가 없는데.
나와 의원들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자칫하면 폐인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아니라는 걸 난 알지만)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쩐다?
“허면 내 먼저 해보겠소, 금 의원.”
나이가 지긋한, 현재 태양의원에서 고용한 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백발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용 의원님!”
“아니 됩니다!”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용 의원이 의사를 밝히자 다른 의원들이 화들짝 놀라 만류했다.
“나도 위험한 것은 알고 있소이다, 여러분. 허나 금 의원님이 우리에게 해가 될 만한 내공심법을 갖고 오지는 않았을 거라 믿기도 하오. 나는 나이가 많으니 혹여 잘못되더라도 다른 의원들에게 비해 잃을 게 적지 않소?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고 해도 금 의원이 내 남은 가족을 책임져 줄 거라 믿소.”
용 의원의 주름진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천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용 의원님의 가족 분들은 제가 평생을 책임지겠습니다.”
“좋소. 허면 내가 먼저 익혀 보고 그 내공심법을 검증해 보이리다.”
다른 의원들은 나가고 용 의원만 남았다. 나는 우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른 분들을 설득하기 쉬워질 거 같습니다.”
“허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러시오. 내 자질이 하찮아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거늘.”
“아닙니다. 성취는 제가 보장합니다. 하물며 용 의원님은 내공심법을 익힌 지 벌써 서른 해가 넘지 않으셨습니까? 태양의원에 오셔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기조식을 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 익힌 건 무당속가의 무관에서 가르친 내공심법이었지요. 하지만 이 심법을 익히신다면, 용 의원님이 성실히 보낸 그간의 세월이 빛을 발할 겁니다.”
내 말에 용 의원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 아시오, 금 의원. 아직도 내게 가능성이 있다 말하는 사람은 금 의원뿐이라는 걸.”
“사람의 발전은 나이를 먹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지금 당장의 얘기가 아니외다. 처음 내가 면접을 보러 왔을 때도 그랬소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용 의원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거 같았다.
“나는 평생을 반편이 의원으로 살았지. 할 줄 아는 게 진단밖에 없었으니까. 그 세월을 의원을 하면서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익혀도 도통 치료와 제약에는 소질이 없었소. 내 스승은 그 재주로는 홀로 의원을 차려 먹고살 수 없으니 제 밑에서 어린 제자들을 관리하며 적은 돈이나마 받아가라고 했지. 사형제들은 독립해 번듯한 의원을 차렸는데 나는 가족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가족들을 참 많이도 고생시켰소이다.”
용 의원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는 진단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홍령도 인정할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이 말이다.
[관찰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죠. 맥을 짚는 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낯빛과 행동거지, 단순히 안부를 주고받는 것에서까지 병의 실마리를 찾아내니까요.]
태양의원에 와서도 그 재능은 빛을 발했는데, 다른 의원들이 진맥을 하다가 병증이 애매하다 싶으면 용 의원에게 보냈다. 그는 참 용하게도 합병증이나 숨어 있는 병, 손쉽게 찾아낼 수 없는 병증과 생활 습관으로 인한 병까지 모조리 밝혀냈다.
그렇게 대단한 재주가 있는데 수십 년간, 하나밖에 할 줄 모르는 반편이 취급을 받으며 원래 있던 의원에서 전생의 대학원생 연구원과 같은 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쫓겨났을 때, 양양 출장소 면접을 봐 나와 인연이 됐고, 지금은 태양의원 본원까지 함께 왔지.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본래 나이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것이, 내력을 안다면 절로 마음이 짠해지는 사람이다.
“나는 평생을 어설픈 놈으로 살았소이다, 금 의원. 그때 면접을 보러 간 것도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아야 해서였지. 헌데 금 의원은 이 사람의 손을 잡고 환영을 해주었소.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해. 그때 받은 급여도 내가 처음 받아본 금액이었고, 덕분에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떳떳할 수가 있었지.”
용 의원이 한풀이를 하듯 제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나는 막지 않았다.
내공심법은 단순히 자연의 기를 모으고 체내에 비축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원래 명상으로 시작했던 만큼 내공심법은 시전자의 심기가 부드러워야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다.
자칫 잡생각이 끼어들면 아무리 안전한 내공심법을 익힌다 해도 주화입마에 걸릴 수 있으니, 할 말이 있다면 해두는 것이 좋다.
“그때가 나는 살면서 제일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말이오, 본원에 오니까 더 좋더군. 함께하는 의원들이 내 진단을 믿고 인정해주고, 그게 그렇게 좋은 일인 줄 몰랐소이다. 자식 놈들도 태양의원에서 일을 받아 생활하고 있지. 이게 다 금 의원 덕분 아니겠소.”
용 의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절을 올렸다.
“금 의원을 만나 나는 살맛이 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나이에야 알았소이다. 사람이라면 무릇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법. 금 의원을 도울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쳐 보겠소이다.”
어쩜 이렇게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있는 걸까.
세상에는 다정한 마음과 좋은 행동을 베풀어도 고마운 줄 모르고, 돌려줄 마음을 먹기는커녕 더 내놓지 않느냐고 따져대는 저질스러운 자들도 있는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더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이 내공심법을 익혀 점혈이 가능할 정도의 내공이 생긴다면, 그걸로 진단도 가능할 겁니다.”
“소문은 들어 알고 있소이다. 태청의원의 의장로들이 체내에 기를 흘려보내 진단을 한다던데. 아무리 그래도 내 분수는 알고 있소. 너무 터무니없는 꿈은 꾸지 않을 거라오.”
나는 그를 일으키고 가부좌 자세를 잡아주며 미소 지었다.
“믿으세요. 당신께서 차마 꿈조차 꾸지 못하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