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정말요? 진짜죠? 물리기 없기예요?!”
“사내대장부가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어요. 원하신다면 문서로 남겨드릴 수도 있습니다.”
“문서는 됐고요,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안 그래도 열의가 넘치던 사람이 불이 붙었네. 금감양에게 영단을 제법 넉넉히 뜯어내서 이 정도는 손해도 아니다. 효율을 생각하면 현명한 투자지.
“태양의원에 방을 내드리죠. 우선은 비급을 보고 익힌 후 제게 지도를 받으세요. 숙지하는 데 삼 일이면 될 겁니다. 청화문에 다녀올 시간은 없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죠. 가르치는 아이들도 데려와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는데, 다들 태양의원 본원에 와볼 수 있다면 좋아할 거예요!”
“짬이 난다면 다른 애들도 지도해줘요. 무한에서 데리고 온 남매가 있고, 이 동네에도 무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애들이 있으니. 교습비는 내가 내지요. 혼자서 힘들겠다 싶으면 신생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됩니다.”
“교습비라뇨! 숙소까지 내주시는데, 그 정도는 제가 덤으로 가능합니다!”
청화가 명랑하게 말했고 나는 사람을 시켜 청화가 필요한 것을 내주라 일렀다. 새 무공을 익히고 의원들을 가르쳐야 하는 데다 애들까지 지도해야 하다니. 쉽지 않은 일이지만 청화는 잘 해낼 것 같았다.
[이참에 신생에게 또래 친구가 생기면 좋겠네요. 그걸 노리고 얘기한 거죠?]
들켰어?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요. 그 애한테는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이 필요해요. 무한에서 데려온 남매와 친해지길 바랐는데, 아직도 영 어색해 보이고.]
흑시의 상품으로 나왔다가 흑시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오도 가도 못 하던 사람들을 구출한 후, 연고를 찾아 돌려보낼 수 있는 이들은 돌려보냈고 태양의원에 남기를 원하는 자들은 남겼다.
연고지로 돌아가 봤자 다시 인신매매의 위협에 처할 게 빤하거나 마을 자체가 해를 입어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나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던 어린 남매도 있었다.
신생보다 어린 데다 중원 말을 전혀 할 줄 모르고 내 곁을 떠나려 하질 않아서 일단 데리고는 왔는데, 너무 어려서 일을 시킬 수도 없고, 내가 항상 끼고 다닐 수도 없어서 난감했단 말이지.
애들이 다 같이 친해졌다면 신생이 곧잘 챙겨줬겠지만, 말이 안 통해서인지 신생과도 영 서먹해 보여서. 애한테 애를 맡기는 것도 도리 상 좀 그렇잖아.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 대상이 됐으니 충격이 크기도 하겠죠. 청화문의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마음이 편해지면 신생과도 어울리게 되지 않겠어요? 청화가 성격이 좋으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게. 잘 풀리면 좋겠는걸.
청화를 보낸 후엔 다시 환자를 보다가, 태양의원의 영업시간이 끝난 후 회의실에 모든 의원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낯이 말이 아니네요.]
홍령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한에 다녀온 사람들은 무한에서의 업무가 끝나자마자 북촌으로 이동해서 휴식도 없이 바로 진료를 시작했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무한에 간 사람들의 공백을 메워야 했기에 그동안 빡빡하게 일해왔다.
금전적 보상은 일한 만큼 지급할 거지만 역시 체력이 소모되는 건 무시 못 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얼굴에 드리운 피로에도 불구하고 의원들의 표정이 밝다는 점이었다.
“다들 무한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었겠지만, 무한에도 분원을 낼 예정입니다.”
나는 무한에 다녀온 일 중 태양의원과 관련된 일들을 하나둘 늘어놓았다.
수의 출장소를 내 다양한 동물들의 질환을 경험한 일부터 동물을 대상으로 수술을 한 일, 희귀한 동물인 코끼리를 맡은 일 등, 함께했던 의원들은 ‘추억이다, 추억이야.’ 같은 표정으로 흐뭇하게 경청했고 남아 있던 의원들은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듣듯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결국 우리 최 의원님이 코끼리의 문제점을 발견했죠. 그 녀석, 처음 무한성주가 선물로 받았을 때는 아기 코끼리였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발정기가 온 겁니다.”
“아하! 발정기에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서 흉포해진 거군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났으면 확실히 그럴 만합니다. 코끼리에 대해 잘 아는 이도 없고 안다고 해도 해소가 쉽지 않은 일이었군요.”
“거기에 야생의 코끼리가 아니니, 활동 영역은 좁고 기후도 안 맞고,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았을 겁니다. 성주께서 애를 쓰긴 했지만 쉽지 않았겠죠.”
“그런데 갑자기 금 의원님이 딱! 적령기의 암컷 코끼리를 데려오신 게 아닙니까. 저 그때 너무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했습니다.”
최 의원이 머쓱해하며 공을 내게 돌렸다. 흑시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무한에 워낙 소문이 파다하게 돌아서 함께한 의원들은 대충 맥락을 아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여러모로 잘 해결됐으니 다행인 일이죠. 자, 무한에서 있었던 일은 이 정도 하고. 사실 여러분을 모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외로워서?]
이 귀신이?
전에 현청에서 서동요 기법을 썼을 때 재미있어 해서, 홍령이 우울해할 때 간간이 전생의 밈이나 농담 등을 얘기해줬는데 이걸 이런 식으로 써먹다니.
갑자기 맥이 빠지잖아.
[흥이 식었으니 책임지면 되나요?]
그만, 그만.
더 하면 하루 종일 무시할 거야.
[이 정도 장난 가지고!]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데 장난을 치니까 그렇지.
[긴장 풀어주려고 그런 거라고요!]
이러다간 끝도 없겠군.
“여러분에게 무공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칭얼대는 귀신을 무시하고 입을 열자 의원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의원들은 서로를 보며 눈짓을 하다가, 최 의원이 대표로 손을 들었다.
“무공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검법이라면 저희들도 어느 정도 익혔습니다만…….”
“검법을 배웠다고요?”
“예. 아시다시피 저희는 점혈을 익히기 위해 무당의 속가에서 무공 수련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기공만 가르쳐 주는 곳은 없었거든요. 때문에 무당 속가의 검도 함께 배웠습니다.”
의원들에게 검을 가르친다니. 저 사람들이 검 쓸 일이 어디 있다고? 애초에 검법은 검을 상비하고 다니는 게 전제인데.
[검을 익히려면 기본 체술도 익혀야 하니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을걸요? 내공심법은 결국 무공을 위한 거니까 하니까 함께 배우는 게 나쁘진 않을 거예요.]
맞는 말이지만, 찜찜한 구석이 있다고.
“혹시, 무당 속가에서 내공심법만 배워도 되지만 그러면 돈을 더 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바엔 검법과 같이 배우는 게 차라리 가격적으로 낫다든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네. 내공심법만 배우면 은 백 냥인데, 검법까지 같이 배우면 은 백이십 냥이라고 하더군. 검법만 배우는 것은 은 팔십 냥이었지.”
“어디가 그 가격을 불렀습니까? 제가 다니던 무관은 의원에게는 더 섬세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해서 도합 은 이백 냥을 냈는데요?”
한 번 물꼬가 터지자 각종 사기(?) 사례가 쏟아졌다.
무관 입장에서야 그렇게 해야 수익이 극대화 될 테니 합리적인 상술이지만, 소비자 입장이 되니 기분 나쁜데?
“당연하지만 제가 가르칠 무공은 대가를 받지 않습니다. 이건 태양의원에 근무하는 분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그리고 검법 대신 보다 실전에 사용 가능한 걸 가르쳐 드릴 겁니다. 오직 의원들을 위한 무술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다들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무공이라 함은 무인을 위한 거였으니까, 의원을 위한 무공이라는 게 낯설긴 하겠지.
들어보니 의원에게 가르친다는 이유로 더 비싼 값을 받아내고 막상 가르친 건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던 사기꾼들도 있었던 모양이고.
“백문이 불여일견. 말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낫겠죠? 어느 한 분이 진상 역할을 해주시겠어요?”
“제가 해보겠습니다.”
“저도!”
“이 노구는 안 되겠는가?”
그래도 역시 흥미가 없지는 않은지 번쩍 손이 올라왔다. 나는 제일 먼저 대답한 최 의원을 지목했다.
“진상 환자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위협을 가해보세요.”
큼큼, 최 의원은 헛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놈이 그러고도 의원이야! 사람 병도 못 고치는 게 의원이냐고! 작년에 뵈었을 때는 멀쩡하셨다는 분이, 치료를 일 년 넘게 받았다는데 아직도 거동을 못 하시냐고!”
[생각보다 연기를 잘 하는데요? 의외네요?]
혈압이 팍팍 오른 거 같은 표정 연기에 진심이 담긴 듯 격한 삿대질까지.
주변 의원들은 분위기를 깰까 입을 막고 끅끅대며 웃음을 삼켰고 나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평소에 내게 불만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 푸는 건 아니겠지?
[그보다는 표본이 된 진상을 많이 본 거겠죠. 최 의원이 당신에게 불만을 가질 게 뭐가 있어요?]
신의 직장에 다녀도 회사 욕과 사장 욕은 베이스로 깔고 가는 거라고. 아무리 잘해줘도 비즈니스인 이상 불만은 생기는 게 당연하잖아?
“왜 말이 없어?! 꿀 먹은 벙어리야? 안 되겠어, 당장 돈 돌려내! 그 돈으로 우리 외조부 우리 지역의 의원에 모실 거니까! 뭐? 못 줘? 이 돌팔이가!”
최 의원의 연기에 물이 올랐다. 본인도 완전히 몰입했는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그대로 내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좋아, 가보자고.
“어, 어!”
최 의원이 멱살을 잡으려고 다가와 손을 뻗은 순간, 나는 그 손을 낚아채 그대로 드러누웠다.
절로 몸이 딸려 오게 된 최 의원이 어, 어! 하는 사이 나는 그대로 잡은 팔을 꺾어 최 의원이 내 옆에 몸이 비틀린 채 드러눕게 만들었다.
“환자의 수발을 들던 보호자도 아니고. 어쩌다 한번 와서 의원을 윽박지르면 답니까? 당신 같은 사람들이 제일 진상이야.”
“아악! 아픕니다, 아픕니다!”
관절이 꺾인 채 드러누워 울상을 짓는 최 의원의 손목을 놔준 후, 나는 지켜보던 의원들에게 빙긋이 웃었다.
[참 쉽죠?]
그거 아니라니깐.
“이건 제가 창안한 의원무술 중 하나입니다. 계속 보여드리죠.”
이어 자원자들이 진상을 연기했다.
최 의원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다들 보던 가닥이 있어서 술에 취하거나 흥분한 환자, 보호자 진상들이 의원을 위협하는 상황을 실감나게 연출했다.
나는 그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미리 준비한 솜뭉치로 기물을 집어던져 방어하는 등 다양한 활용법도 선보였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진상 환자를 두려워할 일은 없겠는데요?”
“그뿐인가? 평소에 어둑한 길을 다닐 때도 무섭지 않겠군!”
“호신술에 가까워 보이지만 단련해두면 체력적으로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금 의원님이 손수 가르쳐주신다는데, 최선을 다해야지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의원들이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아쉽지만 내가 이 무술을 직접 지도하진 않을 겁니다. 대신 무공 교관을 모셨습니다. 내일모레부터 그분이 여러분을 지도할 겁니다. 여러분이 익힌 후에는 분원과 교대하며 무공을 전수할 거니 잘 부탁드립니다.”
“무공 교관이라면, 혹시 낮에 왔던 청화문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