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34화 (134/350)

134화

“수고했어요. 현판 글씨는 여기.”

나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써둔 태양객잔의 현판 글씨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과연 금 의원님, 글씨가 마치 용과 호랑이의 몸짓 같습니다! 이 이름을 누가 내려주었는지 대대손손 잘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렇게 좋아하니까 나도 기쁜걸.

[잠깐만요. 대대손손? 객잔 주인 내외는 애가 없지 않던가요?]

나이가 제법 있는데도 애가 없어서 낡은 객잔이나마 물려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던 기억이 났다.

술만 마시면 그 소리라 객잔 주인이 얼큰하게 취할 때면 사정 아는 마을 사람들은 알아서 피할 정도였지.

그러고 보니 안주인이 안 보이던데.

부지런한 내외라 이른 아침에 객잔에 들러도 객잔 정돈을 하고 있고, 그게 아니라면 태양의원에 와서 뭐라도 도울 게 없냐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사람이다.

“부인이 혹시?”

“앗,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아이참, 안정될 때까지 입조심을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세상에! 다리가 낫고서 부부 금슬이 좋아졌나 보네요!]

그전에도 금슬이 나쁜 부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주머니 사정이 나아진 게 이유일 수도 있겠지. 원래 그런 건 스트레스가 영향을 많이 끼친다잖아.

“축하합니다. 조만간 임부에게 도움이 되는 약을 지어 보내드릴게요.”

“저도 축하드립니다.”

나와 객잔 주인이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청화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객잔 주인은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현판 글씨를 챙겨 나갔다. 내가 이 마을에 오고 첫 아이던가?

[그렇죠. 새삼 설레네요. 정말 이 마을이 우리 터전이 됐군요.]

설레기도 하지만 걱정도 된다.

지금 우리 의원에 있는 의원들은 전부 남자다. 그나마 여긴 시골이라 남성이 여성의 손을 잡고 진맥을 하는 정도는 그럭저럭 넘어가지만 출산은 얘기가 다르단 말이지.

환자가 남자 의원을 꺼리는 걸 넘어선다 해도, 그 때문에 임산부를 본 경험이 일천한 상황에서 잘할 리도 없고.

그나마 난 홍령이 있지만…….

[사실 나도 그 분야는 자신이 없어요. 무인이었잖아요. 우리는 통상의 질병이나 절상 등에는 경험이 많지만 출산은 아니라고요. 게다가 그쪽은 의원이 아니라 산파들에게 부탁하는 게 보통이에요.]

좀 곤란한데.

산파들의 경력과 경험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지만 산과는 엄연히 의학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전생처럼 현대과학이 발전한 곳에서도 출산을 하다가 죽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하물며 여기에서는 어떻겠는가.

[일단 장 의원에게 물어보죠. 이 동네를 오래 다녔으니 실력 있는 산파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 그분에게 배우거나 우리가 산파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저기, 금 의원님?”

아차. 손님을 먼 곳에서 불러놓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군.

“실례지만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태양객잔의 주인에겐 내가 청화를 찾는 이유를 미리 말하지 말라고 했다.

“요새 좀 어렵다면서요?”

“네? 아, 네! 그렇죠…….”

청화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청화검문과의 분쟁 이후, 청화문은 그간 부당하게 빼앗긴 많은 것들을 되찾았지만 그걸 유지하고 문파를 이끌어가는 건 별개의 일이다.

청화문에 대해서는 무한에 가서도 지속적으로 보고를 받았다.

청화문 근처에 태양의원의 분원이 있어서 따로 사람을 쓰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청화검문의 사기를 적발하면서 꽤 많은 것을 대가로 받았지만, 그걸 하면서 든 품이 상당하단 말이지. 한 번의 인연으로 끝내기엔 아까웠다.

“역시 문주가 젊은 여인인 게 문제인가요? 무인이 모이질 않는다면서요.”

“부끄럽지만 맞아요.”

청화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무림문파란 무엇인가.

고고하게 무공을 수련하며 자기수양의 길을 걷는 집단일 때도 있지만, 사실 무술을 수련해 그 무력으로 타인의 불편을 해결해주거나 무력을 행사함으로서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잣거리의 질서를 유지하며 보호세를 받기도 하고 표국처럼 무력이 직접적으로 쓰이는 일을 함께할 때도 있으며, 조금 더 점잖게는 어린아이들을 제자로 받아 무공을 가르치며 지역 사회의 유지로 군림하기도 한다.

청화문은 기존에 갖고 있던 재산이 있어서 그걸 유지하며 소작농을 괴롭히는 이들이 있다면 이를 물리치고, 제자를 받아 가르치는 게 기본인 곳이었는데.

“제가 젊은 여인인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건 무당 속가를 그만두었기 때문일 거예요. 무당의 이름은 절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무당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어린애 몇 명을 돌보며 지내다간 기껏 되찾은 청화문의 재산을 팔아야 할 겁니다.”

자존심, 좋지.

하지만 그 이전에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닌가.

“일전의 인연도 있는데 청화문의 어려움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서 불렀습니다. 혹시 무공 교관을 해볼 생각 없어요?”

“교관이요? 저야 시켜주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누굴 가르치면 되나요? 신생이라는 애는 저보다 실력이 뛰어난 거 같던데요? 맞아, 들어오다 보니까 못 보던 어린애가 둘 있던데! 그 애들을 가르치면 되나요? 속가를 관둬서 무당에서 전수받은 걸 가르칠 수는 없는데 뭘 가르쳐야 할지―.”

“배울 사람들은 애들이 아닙니다. 우리 태양의원의 의원들이에요.”

“의원들이요?”

“무당의 무공은 필요 없습니다. 청화문주가 지도할 것은 의원들을 위한 무공이니까요.”

당장이라도 교관을 하겠다고 나서던 청화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하고 일을 맡아도 되긴 하겠지만, 은인이시기도 하니까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제가 교관 경험은 적지 않은데 무공을 창안해 본 적은 없어요. 의원들이 쓰는 무공이라면 보통의 검공이나 단순한 체술로는 안 될 텐데요. 제가 아는 무공들을 어느 정도 섞으면 가능할지도? 의원을 찾는 진상들을 상대하거나 위급 시에 자신을 지키려면, 의원들은 대부분 앉아서 진맥과 치료를 하고 내부는 대체로 이 방 너비 정도니까―.”

청화는 진지한 얼굴로 앉아서 의원들이 주로 처할 만한 위기상황과 이에 접목할 수 있는 무공 같은 것들을 줄줄 주워 삼켰다.

그래, 청화문이 그렇게 되기 전까진 그 문주의 딸이 제법 영민하다는 얘기가 돌았었다지.

[이 정도면 괜찮겠는데요? 실력이야 그때 보긴 했지만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청화문주가 거기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어떤 무공을 가르칠지는 정해놨거든요.”

나는 준비한 비급을 꺼내 내밀었다. 청화가 이름 없는 무공서를 훑어보는 데는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대충 살펴보는 것도 아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짧은 시간 내에 그 내용을 확실하게 숙지하는 것이다.

“혹시 이 무공 비급을 어디서 구하셨어요?”

“내가 만들었습니다.”

“금 의원님이요? 진짜?”

청화는 무공비급과 나를 번갈아 보며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 물론 내가 창안한 무공은 아니다. 금감양의 서고에서 발견한, 서고 안 비밀공간에 있던 화산파의 무공. 그중에서 화씨의문이 의원들에게 가르친 무공이다.

하지만 화산파, 화씨의문의 무공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럴 거면 내가 새로 한 권 베끼자고 했잖아요. 저렇게 낡은 고서를 당신이 창안한 무공이라고 들이밀면 어떡해요?]

어쩔 수 없잖아. 내 그림 실력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물론 당신이 그린 건 사람이 아니라 좀…… 그랬죠.]

뭔데. 뭐가 생각났는데?

[탕약기에서 익어가는 지렁이…….]

젠장. 물어보지 말걸.

정작 너도 그렇게 그림 솜씨가 뛰어나지 않았잖아!

[그래서 난 안 한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그래도 자기보단 나을 거라고 시켰으면서!]

그래, 너나 나나. 내 그림이 지렁이면 너는 오징어였지.

[오징어가 뭐예요?]

바다가 먼 동네라 오징어를 본 적이 없겠지.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이런 사정으로 우리 둘 다 새로 베껴 그릴 수도 없고, 이 비급의 존재는 최대한 숨겨야 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원본을 청화에게 보여주게 된 것이다.

“엄청난데요. 앉아서 덤벼오는 상대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방법부터 주변의 기물을 이용하는 법, 좁은 공간을 유리하게 활용하는 법…… 하나하나 제가 배운 무당 속가의 무공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이런 걸 창안하셨다니, 그런데 명의이기도 하시잖아요?! 금 의원님, 천재세요?!”

[오홋홋홋! 내가 좀 천재긴 하죠!]

잠깐만. 지금 그게 중요해?

대놓고 고서인데 청화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갔잖아?!

[무공이 대단해서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안 쓰이나 보죠.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천재라는 거라고욧!]

의술도 무공도 다 홍령으로 인한 것이니 홍령이 저렇게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있어서 가능한 거거든?

[알지만요, 동시에 내가 있어서 가능한 거라고요!]

화씨의문의 무공비급은 네가 창안한 게 아니잖아?

[우리 조상님 거니까 내 거기도 하죠!]

어휴.

그래, 기분이 좋으니 됐다.

무한에서 일련의 과거가 밝혀지고 화산의 비급을 찾으면서 홍령이 무척 심란해했는데. 이렇게라도 웃으면 됐지.

24시간 떨어질 수도 없는 귀신이 우울한 것보다야, 밝고 명랑한 게 백만 배 낫다.

“그런데 의원님, 여기 있는 무공의 대부분이요, 체술이긴 한데. 제대로 활용하려면 내공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여기도요. 이건 점혈을 할 줄 모르면 딱히 효과가 없을 거 같은데. 아니, 의원님이 창안한 무공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요! 점혈을 할 정도로 내공을 쌓는 것만 해도 오래 걸려서요!”

“그것도 생각해둔 게 있으니 걱정 마세요. 의원들의 내공 지도는 내가 할 겁니다. 청화문주는 의원들의 무공 체득을 도와주시면 돼요.”

“설마, 설마?!”

설마 뭐?

“‘그것’을 개발하신 건가요?”

갑자기 청화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것’이라뇨?”

“‘그것’ 말이에요. 명의라 이름난 의원들, 그중에서도 무공에 조예가 있거나 이름난 무림문파 소속인 명의들만 만들 수 있다는, 콩알만 한 크기인데 하나만 먹으면 갑자기 내공이 일 갑자씩 생기기도 한다는 ‘그것’……!”

“아, 영약이요?”

청화가 고개가 부러질까 걱정될 정도로 끄덕여댔다.

“영약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영단들을 제법 가져오긴 했죠. 그걸 만드는 것도 좀 생각해보긴 해야 하는데.”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라고 하실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한 달이면 태양의원의 의원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점혈을 할 수준은 될 겁니다.”

내가 만든 건 아니고 금감양에게 받아온 거다. 무공비급을 주면서 영단 하나 안 줄 거냐고, 무슨 빛 좋은 개살구냐고 따졌더니 표국에서 공을 세운 표사들에게 지급하는 영단을 줬지. 솔직히 영단이라고 하기엔 급이 떨어지지만…….

[내가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당신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라니까요? 당신이 먹던 영단, 영약들은 손에 꼽게 귀하고 비쌌던 것들이고요. 당신 셋째 형이 내준 것도 보통 사람들에겐 충분히 영단이라고 불릴 만큼 귀한 거라고요! 청화가 당신을 보는 저 눈 좀 봐요!]

“……저기, 청화문주? 저기요? 청화 소저?”

“아, 네! 네!”

그러게. 어찌나 이글이글한 눈으로 날 보는지 식은땀이 날 지경이네. 영단 얘기에 넋이 나갔는지 사람이 불러도 대답하는 데 한참 걸리고.

그렇단 말이지―.

“한 달을 드리죠.”

“예? 무슨―.”

“의원들이 내공을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인 한 달. 그 안에 한 명이라도 이 비급의 무공을 완벽히 익힌다면 교관으로서 실력을 인정해 청화문주에게도 영단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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