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30화 (130/350)

130화

“네, 알겠어요. 근데 계속 저한테 말을 높이실 거예요?”

“불편하면 그만두겠습니다만, 그대는 제 삼촌의 제자입니다. 제가 존중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생은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아이들이 미인에 더 정직하게 반응한다. 스승의 아름다운 조카가 자신을 존중해주는데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었다. 조금 어색했을 뿐이지.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에요?”

“말을 조금 사왔습니다.”

금리의 뒤로 말을 실은 수레 수십 대가 뒤따랐다. 조금? 신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충 세어 봐도 몇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걷지도 못하는 말들을요?”

보통 말을 운송할 때는 그냥 말을 걷게 시킨다. 이렇게 수레에 실어 나르는 일은 드물었다. 비루먹었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바짝 마르고 볼품없는 말들.

걷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말들을 왜 사온 걸까?

“삼촌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말 농장에 병이 돌아 고기로도 팔 수 없는 것을 헐값에 사왔습니다.”

“아! 스승님이 이 말들을 치료하시는 건가요?”

“그럴 겁니다. 삼촌께선 돌아오셨습니까?”

금태양은 아침부터 중요한 볼 일이 있다고 외출했다. 무슨 볼 일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직이요! 금왕표국에 가셨는데, 정 급한 일이라면 사람을 보내라고 하셨어요.”

“감양 삼촌께? 알았습니다.”

금리는 금태양과 금왕표국주 금감양이 제법 긴밀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태양의원 분원과 금왕표국의 정기표행이 손을 잡고 환자를 운송하는 등의 사업은 금리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이번엔 또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

* * *

“이게 전부 무공비급이란 말이지?”

금왕표국에 온 건 금감양과 사업에 관련된 얘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무한에 오기 전 들었던 금감양의 개인 서고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진짜 많네요. 이중에 쓸모 있는 게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대한 훑어보자고.”

금감양 본인도 무공이 수준급이니 하찮은 무공서를 갖다 두진 않았을 거다. 그중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걸맞은 것을 찾아내야 했다.

“일단은 절화팔단도부터.”

내가 가시추를 흘려내는 걸 보고 금감양이 그 무공이 생각난다며 추천해주었던 그것. 홍령이 가르쳐 준 화산의 무공서를 찾았다. 미리 금감양의 언질이 있었는지 그 책은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맞아요, 화산의 무공이에요. 화산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두루뭉술하게 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귀신은 넘기지도 못할 책장을 그리운 표정으로 쓸었다. 나는 홍령이 그리움을 더듬을 수 있게 혼자 책장을 뒤졌다.

“어?”

몇 권을 꺼내 내용을 훑어보려는데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책장 뒤에 수상한 장치가 있었다. 남들의 눈에는 그냥 벽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이와 비슷한 처리가 된 비밀 문을 금가장에서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뭐예요? 그건?]

잠깐 기다려 봐.

분명 아버지가 이렇게 했었는데―.

해당 책장의 책을 다 비운 후, 일정하지 않은 나뭇결을 보고 결에 맞춰 나무벽을 밀자 예상대로 벽이 퍼즐처럼 밀려나며 맞춰졌다. 작은 기관진식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 부분을 밀어 맞추자 벽은 하나의 모양이 되었다.

[어라? 여기가 열렸어요.]

비운 책장 중 한 칸에 해당하는 벽이 수납장 문처럼 열렸다. 그 안에는 낡은 고서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건.]

아는 책이야?

홍령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제 얼굴을 흐릿한 두 손으로 덮었다.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등이 들썩거렸다.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거나 하는 대신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책들을 꺼내 책상 위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이십사 수 매화검법.”

“육합검법.”

“혼원공.”

“매화분분.”

이름만 봐도 화산의 무공인 것들이 있었다. 나머지도 아마 화산의 것일 테다. 그러니까 기억을 잃고 구천을 떠돌던 귀신이 흐느끼다 못해 오열을 하고 있는 걸 거다.

나는 홍령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며 무공서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하지만 무학 수준이 일천한 내가 그걸 본다고 이해할 리는 없다. 나는 정작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금감양이 숨겨둔 건 아닐 거다. 화산파가 어쩌다 망했는지 관심도 없던 그가 아닌가. 그게 연기일 수도 있지만, 금감양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연기 같은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

뭣보다, 이 비밀공간은 그간 열린 흔적이 없다.

나는 퍼즐처럼 끼워 맞춘 벽면의 먼지를 손으로 쓸었다. 아무리 정교하게 맞춘다 해도 퍼즐은 틈새가 생기기 마련. 그 안에 먼지가 빼곡히 차 있었다.

기관진식이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아버지가 쓰던 비슷한 비밀공간은 기관진식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같은 기관진식을 사용했다면, 여기 있는 건 적어도 십 년은 사용하지 않아 뻑뻑해진 거겠지.

지금은 금감양이 금왕표국을 맡고 있지만, 표국 건물을 처음 세울 때까지만 해도 그 모든 사업은 아버지의 주관 하에 있었다.

화산의 무공서를 보관해둔 것은 아마도 아버지일 것이다.

품 안의 위패가 무겁게 느껴졌다.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이거. 우리가 찾던 그 무공비급이에요.]

한참을 울던 홍령이 눈가를 훔치며 돌아섰다. 귀신은 울어도 눈가가 붉어지지 않는다. 괜히 그 사실에 마음이 쓰렸다.

“찾던 거라면, 어떤 거?”

이 많은 무공비급을 전부 훑고 가져갈 수는 없으니 처음에 목표를 정했다. 하나는 내가 쓸 만한 무공,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태양의원의 의원들이 배울 무공이다.

[의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잖아요. 이거예요. 화산에서 화씨의문 의원들에게 가르치던 무공이요.]

홍령이 두 권의 무공비급을 가리켰다.

[이쪽은 내공심법. 안전하고 성취 속도도 빨라요. 재능이 일천해도 성취를 보장할 수 있고요. 유일한 단점은 속도가 빠른 대신 한계가 명확하다는 거죠. 재능이 뛰어나다면 모를까, 삼류무인 정도의 내공밖에 갖지 못할 거예요.]

“대신 의원 일에 필요한 정도의 내공은 확실히 확보된다는 거겠지?”

[그럼요. 고수가 아닌 보통 사람을 치료 목적으로 점혈하는 정도론 충분해요.]

“내공심법끼리 부딪치는 건? 같은 문파의 내가기공을 익히는 게 아니라면 충돌해서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던데. 우리 의원들은 대부분 무당파 속가의 내공심법을 익혔잖아?”

[모든 내공심법이 충돌하는 건 아니에요. 정파의 심법과 사파의 심법처럼 극단에 있는 것들이라면 모를까. 무당은…… 개인적인 감정은 제쳐두고, 같은 도가의 뿌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고급심법으로 가면 갈래가 달라지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오히려 효과가 배가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다른 하나는? 절화팔단도 같은 건가?”

[절화팔단도는 이십사 수 매화검법의 갈래예요. 이건 그보다는 쉽고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대인무술이죠. 오금희를 기초로 한 체술에 의원들이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물건들을 무기로 활용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게 만든 무공이에요.]

홍령이 말한 무공서를 펼쳐 훑었다.

정말 무공서라기보다는 호신술에 가깝군.

가장 손쉽게 무기로 쓸 수 있는 침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많았고, 그 외에도 뜸을 집어던진 후 불을 붙여버린다든지 팔각 같은 뾰족한 약재를 바닥에 흩뿌려 상대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든지, 여차하면 탕약기를 투척기처럼(!) 던져버리라는 등의 조언들이 적혀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의원에는 별별 진상이 많으니까요.]

의원들에게 가르칠 무공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지. 태양의원 본원이라면 창천도 있고 나도 있지만, 분원에서 생긴 분란까지 어쩔 수는 없으니까. 의원들이 자기 한 몸 지킬 수단 정도는 내가 마련을 해 주는 게 맞다.

이게 소문이 나면 훌륭한 자질을 가진 의원들이 태양의원으로 몰려들 거라는 계산도 있었고.

“좋아. 다 가져가자.”

비밀공간에서 꺼낸 화산파의 무공비급을 전부 챙기고 비밀공간을 원래대로 복구했다. 그 외에도 홍령이 괜찮다고 말한 무공서 몇 개를 챙겼을 때, 금왕표국의 표사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여기 있는 보퉁이들을 태양의원 출장소로 옮겨줘요. 손님은?”

“밖에 계십니다.”

어쩐지, 고약한 냄새가 난다 했다.

표사가 무공비급을 싼 보퉁이를 들고 나갔고, 밖에 있던 손님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도개걸이다.

“네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본 거지를 금가 놈의 텃밭에 불러?”

“어차피 이 무한 땅이 전부 금가장 텃밭인데 새삼 그리 말하실 필요까지야.”

“하여간 어린놈이 하나하나 말대꾸는. 그래, 물건은 잘 손에 넣었느냐?”

“이미 무한 전역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지 않았나요? 금가장이 금왕의 위패를 도둑맞았다고. 아무리 개방 일에 관심이 없으셔도 그 소문이 방주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저는 좀 실망인데요.”

“그걸 훔친 게 네놈인지 아닌지 알 게 뭐냐.”

나는 품 안에서 비단주머니에 든 위패를 꺼냈다. 위패를 본 도개걸이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 전에 다시 휙 위패를 품에 넣었다.

“뭐냐? 내놔라.”

“진짜 필요한 건 위패가 아닐 텐데요?”

나는 대신 다른 주머니를 꺼내 도개걸에게 던졌다. 도개걸은 그걸 받아들고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지도였다.

“아무리 아버지가 미워도 위패를 훔치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 텐데, 왜 위패를 가져오라고 했는지 의아했습니다. 근데 위패를 손에 넣으니 알겠더군요.”

금리를 통해 위패를 손에 넣긴 했지만 여전히 정반합에게 아버지의 위패를 넘기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어찌할까, 위패를 쥐고 고민을 하다가 이상한 것을 찾았다.

화산파의 무공비급을 숨겼던 것처럼, 그 안에도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숨겨진 유산. 당신들이 찾는 건 바로 그거죠? 위패 안에 들어있던 그게 유산이 숨겨진 곳의 지도고요.”

“……그래. 맞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거지.”

도개걸은 표정을 구기고 지도를 품에 넣었다. 위패를 줬으면 위패를 빠개서 지도를 꺼냈겠는데. 역시 고민해보길 잘했다.

“네놈은 조건을 훌륭히 수행했다. 가서 합주에게 전하지. 네놈을 정반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아, 그건 좀 보류해주세요.”

“어째서?”

처음에는 정반합, 그 집단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위패 안에서 발견한 또 한 장의 종이 때문에.

그건 편지였다.

그냥 편지도 아니고, 나에게 쓴 편지.

아버지가, 나에게.

“지금 들어가든, 좀 늦게 들어가든. 그쪽에선 별 상관없지 않나요?”

“그렇긴 하다만, 뭐, 알았다.”

“그리고 물어볼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위패 안에 숨겨진 유산의 지도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누가 알려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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