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네. 싫어합니다.”
금리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덧붙였다.
“정확히는 싫어했고, 지금은 보류 중입니다.”
“내 어떤 점이 싫었는데?”
좀 궁금했다.
나도 총관으로서 금리가 탐나는 만큼 그녀의 생각을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지금은 보류 중이라지만 어떤 부분이 싫었는지 안다면 나도 결정을 내리는 데 보탬이 되겠지.
“그 부분도 다시 생각해보는 중입니다. 제가 정말 삼촌을 싫어했던 건지, 아니면 아버지의 말을 듣다 보니 제가 삼촌을 싫어한다고 여겼던 건지.”
“그럴 수도 있지.”
금리는 나와 동갑이다. 아직 스무 살 언저리라는 말씀. 나야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스무 살보다는 더 경험이 있는 처신을 하지만, 금리는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지 고작 일 년밖에 되지 않았다.
실패한 부모도 아니고, 성공한 부모다. 금리에게는 롤모델일 것이다. 그런 부모의 말은 자식에게 절대적인 신념 같은 것이 된다.
금건양이 나를 싫어했기에, 자신도 내가 싫다고 생각했다라.
“너한테도 그랬어? 밥버러지라느니.”
“아버지가 삼촌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했습니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결론은 그거지 뭐.”
“제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삼촌이 금가장을 망칠 거라고 했습니다.”
“……망칠 거라고?”
“예. 삼촌이 할아버지를 욕되게 할 것이고, 금가장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경계하고, 견제하셨죠.”
이건 또 의외인데.
금건양이 나를 싫어하는 건 내가 돈 잡아먹는 병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거 때문에 아버지 금왕을 욕되게 하고 금가장을 무너트릴 거라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 아닌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금건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저는 그게, 삼촌께서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촌의 어머님이, 알려진 것처럼 금가장의 하녀가 아니라 유력 가문의 사람이라면 그걸 빌미로 금가장에 돈을 요구하거나 불리한 계약을 요구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어디까지나 제 상상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금건양의 말에는 다른 근거가 없었으니까. 금리도 나름 말이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 거겠지. 그럴싸한 생각이다.
달리 궁금해본 적 없던 친어머니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났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삼촌을 꺼려하던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뭔데?”
“아버지께선 항상 삼촌 얘기만 하셨거든요. 항상 나쁜 얘기였지만, 늘 그랬습니다.”
[저런. 안됐어라…….]
뭔데? 난 방금 이해 못 했는데. 홍령 넌 이해했어?
금건양이 항상 내 얘기만 했다는 게 왜 금리가 날 싫어할 이유가 되는 건데?
[그렇잖아요. 원래 형제 중 한 사람이 아프면 집안 전체의 관심이 그 사람에게 쏠려서 남은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라고요. 아버지의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해도 모자란데, 그 관심이 전부 당신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자식 된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죠.]
……모르겠는데?
아버지, 그러니까 금리에게 할아버지인 금왕의 애정과 관심이 내게 쏠린 것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금건양은 날 싫어하잖아. 아버지가 남을 미워하는데 그거에 소외감을 느낀다고?
[모르면 말아요. 어휴.]
“삼촌은 어떠십니까. 삼촌도 제게 맺힌 게 많으실 텐데요.”
“아니, 난 그런 거 없는데?”
상대가 나를 싫어하면 반감이 생기거나 똑같이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도 보통 사람이라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금리에게 딱히 그런 억하심정은 없었다.
“날 싫어한다고 해서 네가 내게 해코지를 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넌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기억하고 있는 일이 있거든.”
“!”
“기억하고 있나? 둘 다 어렸을 땐데. 아파서 눈도 못 뜰 정도로 힘들었는데, 입에 뭔가 달고 시원한 게 들어왔거든. 과일을 수저로 간 건데, 유모나 하녀들이 해준 것처럼 부드럽지 않고 양도 적었지.”
“알고 계셨군요.”
“누가 내 입에 독을 넣는 건 아닌지 확인은 해야 하잖아?”
그때 한 번뿐이었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나와 동갑인, 어여쁘면서도 능력 있는 조카에게 호의를 가졌다. 금리가 금왕상단의 일을 잘해 냈다는 얘길 들으면 괜히 내가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자라면서 금건양의 영향을 받아 나를 싫어하는 티를 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가면 할 일이 많을 거야. 알다시피 내가 몸이 하나라.”
“삼촌이 몸 하나 분의 일을 해냈다면 남들의 세 배 이상 대단한 겁니다.”
“그때만큼 아프지 않다니까. 아무튼, 바쁠 거야. 체계는 잡아놨지만 문서화된 게 거의 없고, 구술로 전달하는 일이 많아서 중간에 사람들을 거치며 세부적인 게 바뀐 것도 많을 거야.”
“괜찮습니다. 이미 있는 기틀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긴, 꽤 재밌긴 할 거야? 금왕공방처럼 다 있는 데서 손대는 게 아니라, 네 입맛대로 키울 수 있는 거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삼촌의 허락을 받고 진행할 겁니다.”
진지하고 단호한 금리의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금리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조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았다.
“리야, 태양의원의 총관이 되어줄래?”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우선 간양 누나가 새로 만든 도구들을 어떻게 할지 보러 갈까?”
나와 금리가 동시에 말의 배를 찼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금왕 공방을 향해 달렸다.
* * *
명절 다음 날 <태양의원―수의 무한 출장소> 앞은 방문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전에도 아픈 동물의 치료를 맡기려는 보호자들로 적잖은 사람이 오고갔지만 지금은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올해의 인물로 뽑힌 금태양이라는 사람이 궁금한 사람들과 그로 인해 아픈 동물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금태양을 만나러 온 이들이었다.
금태양에게 돈을 빌리고자 하는 이들, 새 사업을 제안하려는 이들, 혹은 태양의원이라는, 그럴싸한 먹잇감을 노리는 이들.
그런 이들은 올해의 인물로 뽑혔지만 무한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지진 않은 금태양을 이용하려 달려들었고,
“스승님은 지금 안 계세요.”
신생은 금태양 대신 그런 사람들을 거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생 선에서 정리가 됐다. 신생은 어리지만 영민했고 개방 방주의 제자로 자라며 수많은 종류의 사람을 봐왔다. 사람들은 약자 앞에서 본성을 드러내니까.
신생은 그런 이들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거절하거나 돌려보냈고, 한낱 어린아이라며 그를 얕보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에게는 개방 방주가 눈에 불을 켜고 탐을 내는 그 무인으로서의 기세를 발산했다. 나쁜 마음을 먹은 이들은 범접할 수 없는 기세에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그의 스승은 엄격한 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하다. 안쓰러움을 가장하고 오는 이들에게 속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신생이 가짜들을 물리쳐야 했다.
하지만 신생이 옴짝달싹못하는 유형의 인물들이 있었다.
“잠시 외출한 모양이지? 언제 돌아오는데? 그 전까지 내 친구 태양이가 하는 사업을 좀 구경해볼까?”
“그, 그건 안 돼요. 동물들의 병이 옮을 수도 있으니까 함부로 들어가시면―”
“왜 이래? 나 태양이 친구야. 그 녀석이 의술을 공부할 때 나도 같이 배웠어.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태양이 올 때까지 안내 좀 해봐라 꼬맹아.”
금태양의 친구들. 그들은 신생이 차마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스승이 어린 시절 함께 수학했던 동무라면 신생으로서는 깍듯이 대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눈에 어떤 의도가 보인다고 해도, 금태양이 사기꾼을 만나는 걸 미연에 차단할 수는 있어도 친구를 만나는 걸 막아서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영민하다고는 해도, 신생은 아직 어렸다.
“그쪽은 누구지?”
금태양의 친구를 자처하는 자 앞에서 신생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냉랭한 여인의 음성이 그 앞을 막아섰다. 금리였다.
“당신 같은 사람을 금가장에서 본 일은 없는데, 금 의원님의 친구라고?”
“그, 그,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자칭 친구가 금리를 보고 침을 꿀떡 삼켰다. 금리가 금태양을 금 의원님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그는 금리가 금태양의 시녀거나 아래에 부리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금리의 미모는 아름답고 널리 소문이 나 있었지만, 무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으니까.
“태양이와 저는 스승이신 의원 댁에 오가며 친구가 된 터라 금가장에는 가본 적이 없습니다. 태양이를 기다리는 동안 아가씨께서 안을 구경시켜 주겠습니까?”
사기꾼의 속내를 차마 감추지 못하던 눈빛에 금리를 향한 흑심이 번들거렸다. 금리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신생을 내려다보았다.
“쫓아도 좋습니다.”
“스승님의 친구가 아닌가요?”
“삼촌에 대해서 머리털 하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감히 금가장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하다니. 패 죽여도 이 금리가 후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
금리의 그 말에 신생의 눈이 빛났다.
사실 신생은 금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눈빛을 보니 나쁜 뜻을 가진 거 같진 않았지만, 사부인 도개걸이 항상 “이 무림에서 조심해야 할 세 가지 존재가 있다. 하나는 노인, 하나는 어린애, 마지막은 미녀! 특히 미녀를 조심해야해, 묘령의 미녀를!”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도개걸의 손에서 도망쳐 보니 보통 통용되는 말은 노인과 어린애, 여인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가 첫째였고, 둘째는 그녀가 스승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흑시에서 구해온 수상한 남매에게 스승이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는데, 스승과 피가 이어진 조카라니!
금태양은 다정한 사람이라 자기 외에도 여러 곳에 마음을 쓴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신생에게 스승 금태양은 한 사람뿐이니까. 지금 이상으로 금태양의 애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신생은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우리 총관님이 그렇다는데. 어쩌실 거예요?”
신생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금태양이 선물한 단검. 그 단검에서 한 자 길이의 검기가 쭉 뽑혀 나왔다. 친구를 자청한 자는 그 모습에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내 도망을 가버렸다.
“참고로 저와 혼약을 약속했다며 금가장을 찾아온 자는 아버지께서 혀를 뽑고 그 집안을 찾아내어 구족의 돈줄을 말렸습니다. 혹 저자 외에도 곤란한 자가 있었다면 언제든지 내게 얘기하십시오, 신생.”
자신은 아직 어렸고, 세상에는 무력 외에도 다양한 힘이 존재한다는 걸 영민한 아이는 알고 있었다.
금리가 그런 쪽으로 스승에게 힘이 되어준다면 신생은 갑자기 나타난 경쟁자와 한 편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