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 말에 금건양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얼음장 같던 저 얼굴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수치스러운 줄은 아나 보네요. 하긴, 이만한 재력에 이만한 사람들을 부리는데 그 작은 거 하나 훔쳐 가는 걸 못 알아차리다니. 내가 저 사람이었으면 지금 혀 깨물고 싶었을 거예요.]
“뭣들 하고 있는 거지. 왜 그냥 보고 있느냐! 당장 찾아라!”
“예, 옛!”
금건양이 분노를 태우며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동안 나는 그를 지나쳐 빈 제단 앞에 섰다.
위패는 없지만 이곳은 아버지의 사당이다.
병약한 나를 포기하지 않고 항상 사랑을 주셨던 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내 괴로움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홍령을 만났고, 목숨을 이어가는 걸로도 모자라 다 죽어가는 환자가 아니라 나, 금태양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향을 집어 들어 촛불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향로에 초를 꽂고 그 앞에 세 번 절했다.
“아버지.”
그립다.
“제가 왔어요, 아버지. 아버지 아들 태양이가 왔습니다.”
보고 싶다.
“꿈에라도 한 번 오시질 않으셔서 제가 왔어요, 아버지.”
내게 항상 다정하기만 했던 그분의 주름진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 아픔 때문에 그 중요한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인생을 처음 사는 것도 아닌데.
그랬기에, 금건양에 의해 감금당해 보내드리는 자리마저 참석하지 못했던 그것이 진실로 서러웠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섬서사변과 정반합에 대한 얘기라든가, 한 번도 말해주시지 않았던 자신의 친모에 대해서라든가. 금가장의 하녀였던 친모는 난산으로 나를 낳고 바로 돌아가셨다 들었다. 그 이상은 아는 게 없었다.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지만 아버지가 지금껏 보지 못한 슬픈 얼굴을 하시기에 그 뒤로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룰 수 없게 된 일들이다.
나는 눈가를 훔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을 찾은 유일한 목적도 달성했고, 위패를 찾는 일로 바쁘실 테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초조한 얼굴로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있던 금건양이 뒤에서 외쳤다.
“잊지 마라. 아버지를 죽인 건 너다. 너만 아니었으면―!”
그 말에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내가 병석을 뛰쳐나간 날, 아버지가 빗속을 헤매셨고 그 때문에 몸이 안 좋아지셨다는 건 알고 있다.
허나 그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원망했을까?
큰 형님이, 금건양이 나를 원망하다 못해 증오하는 것처럼?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돌아서 말했다.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셨고, 저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큰 형님이 아무리 제가 당신의 동생임을 부정하려고 해도 말입니다.”
잠깐의 침묵 속 치열한 시선이 오고 갔다.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증오 어린 눈빛을 받아냈다.
그 전까진 큰 형님을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다.
큰 부자답지 않게 조강지처 한 명만을 지고지순 사랑하며 그 사이에 일곱 자식을 둔 아버지다. 그랬던 아버지가 말년에 집안의 하녀와 정분이 나 아들을 보았다면 기분이 묘해지지 않을 자식이 없을 거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하필 천하의 질병을 가진 채 태어나서 천금을 들여도 겨우 자리보전이나 할 정도라니.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 대신 금왕상단을 이끌며 금가장의 입들을 책임진 입장에서도 내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아비 잡아먹은 아들 같은 허황된 소리를 들어줄 이유는 없다.
“가 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사당을 나섰다.
* * *
“이야, 역시 금가장은 금가장이더군요. 내 살아생전 그 장원에 가보는 일이 있을 줄은!”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쉽지만, 오늘 가볼 곳이 워낙 많으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의원을 오래 떠나지 못하니 서둘러 갈 곳을 다 가봐야지요. 저는 사실 금가장보다 지금 가는 금왕공방이 더 기대가 됩니다.”
금왕공방으로 가는 배 위에서 의원들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반쯤은 업무차 왔다고 해도 이들에게는 휴가 겸 무한이라는 대도시를 구경할 기회였는데, 출장소를 내면서 그 계획이 어그러졌다.
다행히 다들 취지를 이해하고 수의학을 발전시킬 계기라며 열정적으로 임해줬지만 내심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명절 하루라도 이렇게 구경을 시켜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저기 보이네요.]
뱃전에서 나루터가 보이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배를 나루에 대자마자 그 아름다운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는 내 조카, 금리가 서둘러 내게 다가왔다.
“공방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여기까지 나왔어?”
“어떻게 기다립니까?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서 받으세요.”
“잠깐만. 다들 마차 타고 먼저 출발하세요! 난 조카랑 얘기하면서 뒤에 따라갈게요!”
의원들이 슬금슬금 금리의 얼굴을 훔쳐보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한층 멀어지고 나는 금리와 함께 말을 탔다.
나루에서도 멀어지고 앞선 마차와도 거리가 벌어져 누구도 우리의 얘기를 들을 수 없다 싶을 때, 금리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가져가십시오, 빨리요.”
“알았다, 알았어.”
금리가 누가 볼세라 품에서 묵직한 비단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 안의 물건을 확인했다.
아버지의 위패다.
“잘했어. 쉽지 않은 부탁이었는데, 고맙다.”
양동작전이었다.
오늘 금건양의 이목은 내게 쏠렸다. 그걸 예상하고 입구에서 금건양과 그 휘하 사람들을 붙잡아두어 금리가 안에서 움직일 시간을 벌었다.
쫓겨났다지만 여전히 금리는 큰형님 금건양의 딸이고 금가장의 잠정 후계자다. 금왕상단의 행수로서 직위를 잃은 것뿐 딸로서는 여전히 금가장을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에 금리가 금가장에 들어가는 것은 천하고수가 은밀히 그 안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웠다.
잠정 후계자인 친손녀가 할아버지의 위패를 훔칠 거라고 그 누가 예상을 했을까?
아무도 그것을 해내지 못했고 그 결과 위패는 내 손에 들어왔다.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솔직히 처음 듣고는 삼촌이 미쳤나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어줬네.”
“삼촌이 조부님의 위패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장례 때 쫓겨나신 것도 있으니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고요. 그래도 여전히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과격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합니다.”
내가 위패를 필요로 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나는 품 안에 위패가 든 비단 주머니를 잘 챙겼다.
이걸 정반합에게 넘길지는, 아직 생각 중이다.
“과격한 건 너도 마찬가지지. 불을 지를 줄이야. 사당 무인들의 시선을 돌리는 건 맡겨놓으라고 하더니. 사당까지 다 타면 어쩔 뻔했어?”
“그럴 만한 양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사당도 살짝만 그을렸고요. 매화탄은 그 화력이 대단하지만 한 줌 부스러기로는 그 정도가 한계입니다.”
“매화탄? 공방에 남은 게 있었어?”
“삼촌이 정신을 잃고 계신 동안 창천이라는 자가 제게 주고 갔습니다. 불화살의 불이 옮겨 붙었을 때 급하게 한 줌 챙기는 게 전부였다고 하더군요.”
이 자식이? 그런 게 있으면 날 줬어야지!
[창천이 조카님한테 넋 나간 거 당신도 봤잖아요.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렇죠, 뭐.]
이 개자식이? 내 조카한테 첫 선물로 그런 걸 줘? 타다 만 숯가루를?!
[왜 또 이상한 지점에서 열 받고 그래요?!]
반한 여자한테 숯가루를 선물로 주는 게 제정신이냐고. 그것도 내 귀한 조카한테!
[그 숯가루가 숯가루 중에선 천하에서 제일 귀한 데다 이제 구할 수도 없는 귀물인 건 일단 둘째치더라도, 덕분에 조카님이 위패를 잘 빼돌렸잖아요?]
그건 선물이 아니지!
좋아, 결정했어. 다른 놈은 몰라도 창천 녀석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걸 왜 당신이 결정하냐고요…….]
홍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내 조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아끼던 손녀다. 그런 손녀한테 창천 같은 되먹지 못한 놈이 접근하게 둘 순 없지!
“그런데 삼촌은 언제 말 타는 법을 배우신 겁니까? 승마는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닌데.”
“어? 아…… 의원 내면서 배웠어. 여기저기 출장 다닐 일이 많아서.”
실제로는 전생에 익혔다. 승마는 상당한 고급 취미인 동시에 본부장의 취미이기도 해서 나도 익혀야 했다. 다 사회생활을 위해서였지, 별로 좋은 기억은 없다.
뭐, 차도 없고 승마술이 있으면 유용한 세상에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으니 손해는 안 본 셈인가?
“너도 말을 잘 다루는데.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혔으면 경신법도 익힌 거 아냐? 그러면 말을 잘 안 타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만, 상인들과의 사교를 위해서 타야 할 때도 있으니 배웠습니다. 집에서 쫓겨났을 당시엔 마상(馬商)을 해볼까 싶어 공부하다 보니 더 늘었고요. 비루먹은 말을 사서 다른 용도로 비싸게 팔 방도를 궁리했으나 넓은 목초지가 필요하더군요.”
“승마용이 아니라 운송용, 농사용 말이라면 굳이 평원일 필요도 없잖아? 산에 풀어놓으면 알아서 풀도 뜯어먹고 땅도 다져서 경작지 만들기에도 보탬이 될 텐데.”
“그 산 또한 다 주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공방에서 총관 일을 하며 돈을 모았지만 이곳 무한 일대의 땅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기사 이 무한 일대는 산지 또한 장강을 끼고 있어서 경치가 수려한 곳이 많다.
멋진 경치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니까, 부자들이 별장이니 산장을 세우려고 비싸게 사들인 곳이 많지.
말을 이용해 경작지의 땅을 다지는 것도 그 땅을 농지로 쓸 때나 의미가 있는 얘기니까.
“괜찮은 구상인데 아쉽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저를 태양의원의 총관으로 쓰십시오.”
“응?”
[어라라?!]
“삼촌의 재산 중 지난번 청화검문과의 일을 통해 얻은 농지와 산이 상당하더군요. 헌데 면적에 비해 소출이 지나치게 낮습니다.”
그건 나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였다. 약재 비료를 통해 소득을 올리려고 계획도 세웠고.
“금왕상단에 있을 때 밀과 잡곡 거래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지주가 아닌 소작인들과 거래를 맺고 그들이 일정 이상의 생산량을 내면 값을 더 쳐주어 지주로부터 경작하던 땅을 구매할 수 있게 돕고, 그렇게 품질 좋은 곡식을 지주를 거치지 않고 더 좋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도록 진행했습니다. 그때 얻은 농부들의 비법이 제법 많습니다. 보탬이 될 겁니다”
“구미가 당기는데? 더 해봐.”
“무한의 마상들과도 끈이 있습니다. 삼촌께서 손을 쓰신다면 폐물에 가까운 비루먹은 말도 그럭저럭 살려낼 수 있겠지요. 그 말들로 산지를 개간하는 등 큰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약초 재배를 위해 종자를 찾으신다는 소문도 입수했습니다. 적어도 삼촌보다는 제가 그 입수처를 신속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끌리는 제안이었다.
의원을 확장하면서 분원이 여럿 생기고 고용하는 의원도 수십이 된 데다, 이번에 무한 출장소를 내면서 수의원의 가능성도 생겼다.
제약방도 점점 주문이 많아져서 장 의원은 약을 만드는 것과 제약방을 관리하는 두 가지 부분에서 일에 치이고 있고 규모가 커진 만큼 약재의 물류와 보관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관리할 총관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다.
“제가 총관이 되면 다른 것보다, 태양의원에 대한 정보를 이리 쉽게 손에 넣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최우선입니다. 또한, 급여는 삼촌께서 책정해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지금 금왕공방에서 일하는 것처럼 이익의 일 할이 아니라, 고정 급여를 받겠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
이해가 안 될 건 없다.
금리는 명백한 장점을 제시했고, 그 제안엔 단점이 없었다. 누가 봐도 금리가 손해를 보는 조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다.
“그 정도 급여를 받고 싫어하는 내게 득이 되는 일만 하겠다고? 넌 날 싫어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