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명절 당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목욕재계도 하고 새로 맞춘 옷도 입고, 가면도 가진 것 중 제일 고급을 골랐다.
[멋진데요? 부잣집 도련님 느낌이 나네요.]
그래 보여? 그렇다면 다행이고.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어 금가장에 방문하는데 추레한 차림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난 당신이 평소처럼 하고 갈 줄 알았어요. 그게 뭐 대수냐, 나는 나다! 이렇게요. 그게 멋지잖아요?]
그러게. 듣고 보니 홍령이 말한 것도 그럴싸했다.
하지만 역시 좀 긴장되어서 말이지.
[그건 그래요. 나도 떨리는걸요. 당신 아버지가 죽은 날, 당신이 받았던 대접을 생각해 봐요.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땐 또 어땠고요? 그 집에 가는 거잖아요. 나 같아도 그럴 땐 있는 대로 힘주고 갔을걸요?]
그래. 내 발로 뛰쳐나오긴 했지만 사실상 쫓겨난 거나 다름없는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가족으로서 갈 수는 없었지만 내 힘으로 초대장을 받아냈다.
[맞아요!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요.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너무 힘줬나? 나답게 할걸.”
[당신은 금가장 막내 도련님이기도 하잖아요? 보통은 이렇게 힘주면 어색한데, 당신은 아주 잘 어울려요. 누가 이러쿵저러쿵하든 당신은 당신이니까요. 아자!]
그래. 더 이상 나는 집안의 돈 먹는 귀신 취급을 당하던 골칫덩이가 아니다.
“스승님! 준비되셨어요? 마차가 왔어요!”
신생의 말에 밖으로 나가자 신생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스, 스승님! 엄청, 엄청 멋져요!”
“그러니? 다행이다. 내 제자도 아주 귀엽고 멋진걸?”
이번 방문은 나 혼자 가는 게 아니었다. 창천은 귀찮다고 거절했고 당당은 간양 누나와 합심해서 증기기관을 제대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금왕공방으로 간 상황이지만, 그 외에 나머지 태양의원의 의원들은 전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들도 호북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 금가장의 명성을 들었고, 같이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금 의원님! 옷이 날개 같습니다!”
“그렇게 입고 계시니 정말 금가장의 도련님다우시군요. 잘 어울리십니다.”
“고마워요. 다들 새 옷이 잘 어울리네요.”
“의원님 덕분이죠. 안 그래도 금가장에 가는데 낡은 옷을 입고 가야 하나 걱정했는데. 하루 만에 비단옷을 지을 수 있을 줄이야.”
“집에 가면 자랑해야겠습니다. 이게 바로 무한의 최신 유행이라고 말입니다. 하하하!”
다들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우리는 마차에 탑승했다. 금감양이 보내준 마차였는데, 여러 명이 타니까 적당한 거면 된다고 했는데도 금왕표국에서 제일 좋은 마차를 보내왔다. 금감양 전용 마차라는 뜻이다.
“국주께서, 기분이다! 공짜로 내주는 거니까 그냥 타! 내가 말한 그대로 토씨 하나 빠트리지 말고 옮겨!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야, 잘 탈게요.”
공짜는 거절하는 게 아니지, 암. 물론 내가 타는 것만 금감양 전용 마차고, 나머지 의원들은 다른 마차에 타야 했지만 그것도 금왕표국에서 귀빈을 모실 때 쓰는 마차였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명절 당일이라 다들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지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이동 시간이 단축되어서 생각보다 빨리 금가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오랜만이다.
금가장의 정문은 막대한 부(富)에 걸맞지 않게 심플했다. 사람이 많이 오가다 보니 실용성을 중시해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안다. 아버지 금왕이 이 정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말이다.
일견 심플해 보이지만 한 번에 수십 명이 일렬로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길고 이 층 높이의 짐도 통과할 수 있게 높다. 문부터가 거대하다는 뜻이다. 어릴 때 무한 성주가 업무를 보는 관부에 가본 적 있었는데 그곳의 문보다 컸다.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을 느낀단 뜻이다.
이 문이 거쳐 온 세월 또한 상당한 위압감을 주었다. 현판부터 문고리 하나까지, 처음 아버지가 이 금가장을 지을 때 쓴 그대로였다. 단 하나도 바꾼 것이 없었다. 재료의 품질이 탁월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옻을 먹인 검은 광택이 수십 년 동안 빛바래지 않은 문.
그 위압감은 한 사람을 닮았다.
[사람을 초대해놓고 이제야 나오다니. 집주인으로서 태도가 영 별로네요.]
금건양이 그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왔느냐.”
그 뒤로 오랜만에 보는 금가장 사람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뒤따랐다.
저 안에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압도적이긴 하군.
원래대로라면 들어가서 큰 형님에게 인사를 하고 올해의 인물로 뽑혀 기쁘다느니 명절날 금가장을 방문해서 영광이라느니 인사치레를 늘어놔야겠지만…….
“손님이 오기 전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지 않고 기별을 받은 후에나 나오다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참 많은 게 변했네요.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반말이나 하시고.”
나는 삐딱하게 대꾸했다. 아니, 엄연히 지적할 만한 부분들이기도 했다. 무한상련에서 뽑는 올해의 인물은 그만한 대접을 받는 존재로, 아버지도 상대가 누가 됐든 항상 예의를 다해 대했단 말이지.
한 번은 아주 어린 아이가 저수지의 구멍을 그 작은 몸으로 막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유명해져서 올해의 인물로 뽑힌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소년을 데리러 명절 아침부터 나갔다 오셨다고.
“그래도 네가 내 동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지.”
“그런 분께서 동생을 내쫓으시고요.”
“제 발로 걸어나간 것을 이제 와서 내가 내쫓았다 하는 것이냐?”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 못 하게 감금해버리셨는데, 그게 집에서 꺼지란 말이 아니고 뭡니까?”
“갈!”
“그거 그냥 귀만 좀 아프고 마니까 하지 마세요. 웬만하면 무림인들 앞에서는 더더욱 하지 마시고요. 어설프게 사자후 흉내 낸다고 뒤에서 흉봐요. 그리고 슬슬 들여보내 주시죠? 저도 큰 형님 뵈러 온 건 아니라서. 장례에도 참석 못 한 불효자라 명절에 아버지 사당에 향이라도 피우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
내가 한 마디도 밀리지 않고 대꾸하자 금건양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한 번도 그의 말을 거스른 적 없는 아이였으니까.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네가 내 동생이라는 것을 어찌 확신하지?”
“그러면 저 말고 누가 아버지 사당에 향을 피우러 와요?”
“내가 아는 태양이는 이렇게 건방진 녀석이 아니었지. 누가 녀석의 가면을 쓰고 그놈 행세를 하면서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 알 수 없지.”
의심도 많으셔라.
사실 저 방법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우리에겐 당신 아버지의 위패를 훔쳐야 하는 목표가 있으니까요.]
원래 생각한 계획은 그랬다.
우리 일행이 금가장에 들어갈 때, 누군가에게 내 가면을 씌워 내 행세를 시키고 나는 안에서 아버지의 위패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 과정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내가 결백하다는 알리바이는 만들 수 있다. 나를 비롯해 태양의원의 의원들이 전부 가면을 쓴다는 데서 착안한 방법이었다. 내가 왜 위패를 훔치는지는 몰라도, 그런 상황에서 나를 싫어하는 큰 형님은 나를 제일 먼저 의심할 테니까 말이지.
“그러는 큰 형님께선 변한 게 없으시네요.”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위험했다. 지금처럼 금건양이 내 정체를 의심하고 얼굴을 확인하려 든다면 도저히 거절할 방법이 없으니까.
나는 가면을 고정한 끈을 풀었다. 그리고 고급스럽게 치장된 가면을 벗었다. 맨얼굴에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이 묘하게 상쾌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당신의 동생인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셨죠?”
가면을 벗었을 때, 이처럼 기분이 편안했던 적이 없는데.
“……맞군.”
일그러지는 금건양의 얼굴과 그 뒤에 선 이들의 표정까지, 전에는 나를 움츠러들게만 만들었던 것들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러면 이제 아버지 사당으로 가죠. 빨리 뵙고 싶거든요.”
나는 다시 가면을 고쳐 쓰고 그제야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벌었겠지?
[네,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이제 가도 괜찮을 거 같아요.]
홍령의 확답이 돌아오자 나는 안심하고 걸음을 옮겼다. 금가장은 무척이나 넓어서 내부를 이동하는 데만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다. 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서서 나와 내 일행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나는 간만에 보는 얼굴들에게 일일이 말을 건네며 사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당 주변이 묘하게 어수선했다. 다른 곳들은 문지기부터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까지 나와 예를 갖추며 서 있었는데, 사당을 지키는 무인들은 우리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걸 그냥 두고 볼 금건양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잠깐 막아서고 먼저 앞으로 나섰다. 손님을, 그것도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던 나를 맞이하는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는 건 꽤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나는 모른 척하고 뒤에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예리해진 청각 덕분에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당에 불이 나서…….”
“불? 사당은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명절이라 높게 쏘아올린 불똥이 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갑자기 불길이 일었습니다. 크게 탄 것은 없습니다.”
돌아선 금건양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내가 떠나기도 전에 사당을 지키던 무인들이 대거 해고될 것은 자명해 보였다. 좀 미안한걸.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일 아니다. 들어가지.”
금건양이 앞장섰고 나는 뒤따라 들어갔다. 표정을 가다듬으며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앞장서던 금건양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왜 그러세요?”
“위패가……!”
위패가 없었다. 아버지의 위패, 정반합이 내게 요구한 그것이 물건을 보기도 전에 사라졌다. 금건양이 몸을 홱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뭡니까? 위패는 어딜 갔어요? 아버지의 위패요!”
“어제만 해도 여기 있었다.”
“지금은요? 누가 훔쳐가기라도 한 겁니까?”
“……정황상 그런 거 같군. 누군가 불을 내고 위패를 훔친 모양이다.”
“그런데 절 왜 그렇게 보세요?”
나는 나를 노려보는 금건양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나는 꿀릴 게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금건양 바로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쓸 만한 검을 부린다는 얘길 들었다.”
“그 녀석은 이런 일은 귀찮아서 절대 안 할걸요. 제가 시킬 리도 없고요. 게다가 녀석의 실력은 제가 잘 알아요. 금가장의 경비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텐데요?”
그리고 그건 진짜였다. 창천의 실력은 대단하지만 무림에는 항상 천외천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금가장의 사대호위가 허락받지 않은 이가 금가장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했을 리 없다. 내가 창천에게 시키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정 의심스러우시면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보시든가요. 대나무 숲에서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 테니까.”
“……”
“그나저나, 좀 실망스럽네요.”
“……무엇이 말이냐.”
“큰 형님은 흔들리지 않는 금가장의 기둥과 같던 분이었는데, 아버지의 위패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분이었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