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명절 전 날.
무한의 시내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명절 당일은 가족끼리 보내기 때문에 거리에 사람이 없고 조용하지만, 전날은 친지를 방문하거나 못다 한 명절 준비를 해야 했기에 일 년 중 거리가 가장 붐비는 날이었다.
“이보시오! 저리 비키시오!”
“여기부터 저기까지! 자리 마련해!”
“실례하오만, 여기서 큰 행사가 있을 예정이니 자리를 비켜주시오.”
발 디딜 틈도 없는, 무한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갑자기 자리를 만드는 이들이 나타났다. 금왕표국의 표사들, 그리고 포쾌들이었다. 그들은 예의 바르거나 혹은 다소 무례하게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점을 차린 이들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물건을 사던 이들도 표사들이 넓게 만든 자리 너머로 밀려났다.
안 그래도 사람이 붐비는 곳. 헌데 거리 하나를 통째로 비워버리니 사람들은 더 미어 터졌다. 자리에서 밀려난 이들 중 몇몇이 불만을 토했다.
“저 망할 금가 놈들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누?”
“난들 아나. 저놈들이 무한 주인처럼 구는 게 하루 이틀인가?”
무한에서 금가장의 밥을 먹지 않고 사는 이가 드물다지만 그럼에도 금가장에 반감을 가진 이들은 존재했다. 왕도 황제도, 하물며 신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금가장이라고 그런 이들이 없을 순 없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강하게 반발하지 않는 건 표사들 사이사이 껴 있는 포쾌들 때문이었다. 관의 인물이 껴 있다면 제아무리 부당한 처사를 해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서민의 설움 아니던가.
그러나 대부분은 반감을 가지기보다는, 다른 기대를 품고 표사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금가장 큰 도련님이 잔치라도 베푸시려는 게 아닌가? 명절이면 항상 그래 오지 않았나.”
“큰 도련님이라니. 이제는 금가장의 주인이지.”
“그렇긴 해도 아직은 그분이 금가장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그렇지 않나, 금왕이 돌아가시고 나선 금가장의 씀씀이가 영 전 같지 않단 말이야.”
“하긴. 전에는 명절이 아니어도 이런 자리가 많았는데. 지난번에 한 번 금왕의 이름으로 거지와 빈민들에게 음식을 풀었던 거 이후로는 별 게 없었지.”
“그것도 사실 큰 도련님이 아니라, 금가장 막내가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금가장 막내? 금왕이 죽고 나서 집에서 쫓겨났다던 그 어린애 말인가?”
“어린애는 무슨! 약관을 넘긴 당당한 사내일세. 무한을 떠나서 북쪽에 자리를 잡았단 얘기가 있네.”
“허어, 어미가 다르다고 그리 괄시를 받았다더니. 그래도 성공했다고 제 아비 이름으로 베풀 줄도 아는구만.”
“금가장 같은 건 그런 인사가 주인을 맡아야 하는데 말이야. 헌데,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지 않나?”
냄새는 그 무엇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힘이 있다.
금가장의 행사로 볼멘소리를 내뱉던 사람들과 이 자리에 있을 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물론, 금왕표국이 무슨 일을 하든 말든 어서 집으로 돌아가 명절 준비를 하거나 친지를 방문할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까지 맛깔나는 음식 냄새가 풍겨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마솥을 통째로 실은 금왕표국의 표마차 수십 대가 공터로 진입했다.
“자리를 펴라! 음식을 날라!”
“덜어먹을 대나무 접시는 다 왔나? 젓가락은?”
“표두님! 술도 도착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예상대로, 금가장이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풍겨오는 음식 냄새와 표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란에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좀 전에 금가장의 일에 불평불만을 내뱉었던 이들도 있었다.
“이제야 시작인가? 기다리다가 배곯아 뒈지는 줄 알았네.”
“대장, 대장! 이제 먹으러 가요?”
“기다려, 이 거지 새끼들아! 아직 판을 덜 깔았잖아!”
어디선가 개방 무한지부장 윤모가 새끼거지들을 대거 이끌고 나타났다. 근처에만 있어도 콧속을 찔러오는 톡 쏘는 냄새에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심 기대감은 커졌다.
다른 거지는 몰라도 개방의 중진인 윤모는 무한에서 유명인사였다. 개방의 거지가 왔다는 건 이 잔치가 보통 잔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지나치려던 사람들, 특히 무림인들이 윤모를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아직 잔치는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모여든 사람만 인산인해였다.
“자, 시작하자!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식과 술을 드립니다! 표사의 안내를 받아 입장해주십시오!”
“천하객잔의 숙수가 솜씨를 발휘한 진미는 이쪽입니다!”
“금화청을 한 분당 한 잔씩 드립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표사들이 나눠준 표를 받고 차례대로 입장해 술과 음식을 자유롭게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그 술과 음식이라는 것이, 보통 때 금가장이 잔치를 벌일 때 나누던 것들보다 훨씬 상질의 것이어서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 년을 쪼잔하게 굴어서 금가장의 영화도 옛말이거니 했는데, 이번 한 번을 잘하려고 그랬던 건가?”
“지난 일 년간은 상중이라 자중을 했나 보이. 역시 부자는 인심도 삼 대를 가는 법이야!”
“헌데 금가장주는 왜 보이질 않나? 슬슬 나와서 인사를 해야 할 때인데.”
“그러게. 하다못해 장주의 딸인 금 행수라도 나올 텐데. 이상하구만.”
지금까지 금가장에서 벌이는 잔치가 그랬기에 모두들 금가장의 인물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금왕 생전에는 금왕이든 아니면 그 많은 자식들 중 누군가든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치고 많이들 드시라, 무한 사람들 덕분에 금가장이 이런 복을 누린다 같은 인사치레라도 하고 갔던 것이다.
게다가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좌판을 펴고 음식과 술을 나눠주고 있었지만 공터의 중앙은 여전히 넓게 비어 있었다. 그냥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 표사들이 바쁘게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커다랗고 붉은 비단을 깔고 비단을 씌운 상을 놓고 여기저기 붉은 비단 천을 깃발처럼 장식했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술과 호롱박 같은 것을 날랐다.
붉은색은 경사를 의미하는 행운의 색이다.
그냥 음식을 나누는 잔치가 아니다. 뭔가 경사스러운 행사가 있는 게 분명했다.
주인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모두가 그 사실을 예감했다. 이 잔치는 주인공이 오고서부터 제대로 시작될 것이다.
다들 평소보다 호화스러운 술과 음식을 양껏 즐기면서 주인공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공터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악대가 크게 연주를 시작했다.
“어? 저거 코끼리 아닌가?”
눈 밝은 누군가, 아마도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그 말에 다들 음식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뿌우우―!
코끼리. 붉은 비단을 옷처럼 걸치고 관을 쓴 데다 금과 보석을 장식한 코끼리가 노랫소리에 맞춰 표사들의 인도를 받으며 중앙의 공터로 들어오고 있었다.
“진짜 코끼리잖아?”
“성주의 코끼리 말인가? 아, 저 옆에 계시는군. 성주님이다!”
정식 관직은 승전포정사사지만 보다 널리는 무한 성주라 불리는 이가 코끼리와 나란히 말을 타고 들어왔다. 그는 이리저리 손을 흔들며 자리를 잡았다.
“이야, 성주님이 코끼리를 선물받아 키운단 소문은 들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로군!”
“나는 저번에 한번 봤지. 무한 외곽의 의원에 치료를 받으러 갈 때 보았다네.”
“코끼리를 치료하는 곳이 다 있는가? 신기하구만.”
“저걸 봐요! 코끼리가 혼례복을 입었어요! 장가를 가나 봐요! 코끼리 신랑이에요!”
한 어린이가 무등을 타고 외치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코끼리 신랑이라니,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참으로 귀여웠다.
“코끼리 장가라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긴 하군. 지금 보니 딱 혼례를 치르는 거 같지 않나?”
“예끼, 이 사람아. 그것도 혼례를 치를 상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혹시 모르지. 성주가 코끼리를 애지중지한다니, 산신에게 가난한 처녀를 시집보내는 것처럼 할지도. 어떤 불쌍한 처자가 희생양이 되려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하고 혼인을 시키려고? 말이나 소 같은 걸 데려오지 않겠나?”
사람들은 이런 저런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코끼리가 같은 코끼리와 혼인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귀한 영물이던가? 성주쯤 되어도 직접 사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싸고, 황제의 선물로나 받아야 모실 수 있는 짐승이다.
그 코끼리가 등장했다.
“코끼리다! 코끼리가 하나 더 있어!”
“신부 코끼리야!”
코끼리가 하나 더?!
처음 코끼리가 등장했을 때는 놀라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술과 음식을 즐기던 이들이 그릇과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서 구경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코끼리 하나도 신기한 일인데 둘이나 등장을 한다니, 그것도 그 코끼리들이 혼례를 올린다니!
“신부 코끼리 위에 누가 타고 있다!”
“가면을 썼는데? 어? 어디서 많이 본 가면인데?”
“금가장의 막내도련님 아닌가?”
“우리 막둥이를 구해준 분일세! 내가 말하지 않았나, 금태양 도련님이 의원이 되어 돌아왔다고! 아주 신묘한 의술을 가진 분이야!”
금태양을 알아본 이들이 곳곳에서 입을 열었다.
장돌뱅이 하나는 자신의 전 재산이자 길동무인 말 막둥이의 병을 금태양이 무료로 고쳐주었다며 제 동료인 장돌뱅이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어떤 부인은 집안의 암소가 출산을 하다 죽어갈 때 금태양이 그 배를 갈라 새끼를 꺼내고 암소도 구한 이야기를 꺼냈다.
일부러 부탁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금태양이 <태양의원―수의 무한출장소>에서 행한 일들을 떠들었다.
마침내 두 코끼리가 나란히 섰고 금태양은 코끼리 등자에서 내렸다. 금태양이 벌인 판이었지만 그의 예상보다 사람이 많았다.
‘다행히 분위기는 좋군.’
술과 음식을 있는 대로 푼 데다 코끼리 두 마리가 등장해 혼례를 올리는 상황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기분 좋은 흥겨움이었다.
올해의 인물 투표를 노리고 벌인 판임에도 금태양도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일 정도였다.
[돈도 한 푼 안 들었고요. 앉아서 고급비단으로 코 풀기, 최고예요!]
홍령도 흥에 겨웠다. 몸이 있었다면 이 자리의 음식과 술을 마음껏 즐길 기세였다. 그녀의 말대로 이 자리를 준비하는 데 금태양의 돈은 한 푼도 들지 않았다.
전부 금리의 계략이었다. 이런 판을 준비하려고 하는 데 조력이 필요하다고 하자 금리는 우선 외백모를 비롯해 태양의원에 자신의 반려동물을 맡겼던 부자들에게 또다시 막대한 후원을 받아냈다. 이미 태양의원에 후원을 했는데, 또!
[후원자 이름을 새긴 금왕공방제 장신구라니. 누구 조카 아니랄까 봐 참 머리를 잘 쓰네요.]
금리가 그들에게 후원을 받아낸 방식은 금태양의 전생에 봉사단체들이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후원팔찌나 후원목걸이 등을 판매했던 것과 유사했다. 금태양이 그런 방법에 대해 귀띔을 해준 것도 아닌데.
잔치에 후원을 한 이들은 이 거리 주변의 층 높은 객잔에서 대접을 받으며 곧 진행될 코끼리 혼례식을 구경하고 있었다.
금태양은 우선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코끼리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주에게 눈짓했다.
성주가 말에서 내렸다. 이제부터 무언가 시작될 것을 예감한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했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공터에서 성주가 입을 열었다.
“이 좋은 날, 우리 집 코끼리를 장가보내게 되었네. 허나 그 이전에, 앓던 이 녀석을 고쳐주고 신붓감을 찾아준 데다 무한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크나큰 잔치를 마련해 준 귀인을 소개하겠네.”
이미 모두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예상했다. 그러나 무한의 성주쯤 되는 사람에게 정식으로 소개가 되는 건 다르다.
사람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악대의 연주와 더불어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금태양을 잘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잔치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영문 모를 기대감을 안겨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태양의원의 신의, 금태양 의원에게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