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24화 (124/350)

124화

“……제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라요. 화산파 제일의 기재는 자하신룡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그것도 알고 있나. 하긴, 그대는 화씨의문의 후계를 자처했지. 그렇다면 알 수도 있겠군. 자하신룡은 후기지수에게 붙이는 이름이네. 그녀가 무림에 갓 출도했을 때 그 이름을 얻었고, 나이를 먹으며 사질에게 그 별호를 물려주었지. 섬서사변이 일어나기 직전, 그녀의 검은 그런 풋내 나는 별호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그래.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 아닌가? 홍령이 화산파의 인물이었다는 것 말이다. 화씨의문의 후계자이고, 감추지 못하는 무인의 본성까지.

“과거의 일은 거기까지 해두죠. 혈교의 정보를 얻기 위해 리가 필요하단 거군요.”

“그래. 그녀가 어떻게 매화탄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 알고 싶네.”

나는 종을 흔들었다. 근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생이 달려왔고 나는 금리를 불러와 달라 부탁했다.

“리가 오는 동안 마저 얘길 하죠. 흑사방은 혈교의 일원인 겁니까?”

“그래. 혈교가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물건들을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지. 그대가 구해온 자들 또한 그렇네. 덕분에 다른 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지.”

“설득이라 하면?”

“원래 우리는, 그대의 조카가 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 의심하고 있었네.”

“리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우리와 마주친 혈교의 고수들은 금왕공방의 물건을 지니고 있었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이 바로 금왕공방의 무기야. 우리는 그 무기의 출처를 추적했고, 이곳 무한의 흑시라는 것을 확인했네. 그대의 조카가 물건을 대고 있었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애는 아버지에게 쫓겨났어요. 돈을 벌려면 정상적인 거래로는 불가능했겠죠. 리가 혈교에게 무상으로 공방의 무기를 받아 건넨 게 아니라면 그 추측은 무의미합니다.”

“무한의 흑시가 이렇게 커질 수 있었던 게 자네 조카 덕분이라고 해도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인맥으로 무한 흑시에 손님을 불러왔지. 흑사방은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손에 넣었네. 그 돈이 혈교로 흘러들어 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리가 금왕공방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선 매화탄이 필요했을 겁니다.”

나는 침착하게 금리를 변호했다. 금왕공방의 일로 대립하긴 했지만 그 애는 내 조카니까.

“아버지에게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난 아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죠. 실제로 그 애는 흑사방이 사고파는 물건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대는 그 난리통을 벗어나면서 흑사방의 상품이었던 이들을 풀어주고 데려와 치료해주었지. 합의 일원들은 그 지점을 좋게 평가했네. 해서 그대 조카를 끌고 가는 대신 내가 와 대화를 하는 것이고.”

“부디 끝까지 대화로 마무리됐으면 좋겠군요.”

때마침 금리가 도착했다. 수척해 보였지만 크게 이상은 없어 보였다. 좌수검이 금리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했고 내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네가 한 일을 솔직하게 말하면 돼. 숨기거나 거짓을 말한다고 득이 될 판이 아냐.”

우리 집안사람들은 매사를 계산적으로 판단하는 편이라 어떤 사실을 비밀로 하는 데 능숙하다. 하지만 그게 이득인 판이 있고 아닌 판이 있단 말이지.

지금도 금리 표정 변한 걸 보라고.

“……알겠습니다. 삼촌 말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금리는 자신이 흑사방과 연이 닿았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금리가 매화탄을 찾아 수소문을 하는 걸 듣고 흑사방의 무인이라고 하는 자가 먼저 찾아왔다고 한다.

매화탄을 얻는 대가로 무한에 흑시를 대대적으로 벌일 수 있게 관에 뇌물을 먹이는 일을 돕거나 손님을 소개해 주는 등의 일을 한 것, 그리고 그들의 주문을 받아 금왕공방의 무기를 공급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겐 어디까지나 상업 활동이었을 뿐입니다. 제 스스로 불법적인 물건을 팔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흑사방이 그런 상행위를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격이 되긴 했지만…….”

금리는 말을 흐렸다.

“그쯤하면 좌수검이 원하는 정보는 다 들은 거 같은데요. 금리도 그 일이 양심에 걸리던 차였고, 흑사방은 전멸했으니 더 이상 흑시가 열리는 일도 없을 거 같고요. 덕분에 간양 누나가 좀 곤란한 처지가 되긴 했지만, 그건 해결책이 있고.”

“해결책이 있다고요? 정말입니까, 삼촌?!”

“응. 확실한 건 아니라서 일단 비밀로 하고 있긴 했는데. 매화탄이 다 타버렸으니 어쩔 수 없잖아.”

매화탄을 손에 넣으려던 건 금리와의 내기도 있지만, 비장의 한 수를 숨기기 위함이기도 했다.

내가 가진 전생의 기억이 겨우 주사기와 청진기, 증류기가 다 일 리 없잖아?

“그러니까 너도 내놔. 흑사방 말고 혈교와의 연결고리, 있지?”

“삼촌, 그건―.”

“네 안전을 위해서기도 해. 좌수검에게 넘겨.”

금리의 말대로라면 흑사방은 매화탄의 생산자가 아니라 중간 거래상에 불과하다.

맨 처음 금리가 매화탄을 수소문했을 때 거래 제안을 보낸 이들은 혈교의 끄나풀일 것이다.

좌수검이 찾는 것도 그거일 거고.

“……알겠습니다. 삼촌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금리는 연락책의 정보를 좌수검에게 알려주었고 좌수검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사방이 궤멸한 상태에서 연락책이 도주할지 모르니 서두르는 모양이었다.

“삼촌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 연락책을 건넸으니, 이번에는 삼촌 차례입니다. 매화탄을 대신할 수 있는 물건을 보여주시죠.”

“좋아, 따라와.”

원래는 간양 누나에게 제일 먼저 보여 주려고 했지만, 상관없겠지.

나는 정자를 나서 대나무 숲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 당당이 파충류를 돌보고 있었다. 은근히 따뜻한 걸 좋아하는 녀석들의 습성 때문에 항상 불을 때서 굴뚝에 연기가 풀풀 올라왔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불을 때는 아궁이 쪽으로 들어갔다.

“어! 일어났음? 마침 잘됐음, 다 됐거든!”

“벌써?”

“이게 뭡니까?”

금리가 아궁이 내부에 있는 거대한 기관진식을 보고 물었다. 건물 하나를 데우기에는 과한 불길이 거대한 솥을 데우고 있었고, 그 솥에 담긴 물이 파글파글 끓으며 막대한 양의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증기는―.

“설마, 이 수증기가 이 기관을 돌리고 있는 건가요?!”

“바로 이해하다니. 역시 금왕공방의 총관답네.”

내가 매화탄을 구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것.

바로 증기기관이다.

[세상에…… 당신이 전생의 자산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게 진짜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전생에서도 18세기에나 개발된 거였으니까, 이곳 중원에서는 확실히 이른 기술이긴 하지. 하지만 이게 있어야 내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 수 있다.

“금왕공방이 가진 차별점은 바로 그 거대한 수차야. 장강의 거센 물살로 쉬지 않고 공정을 돌릴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지만 동시에 그건 단점이 되기도 하지.”

“그만한 수력이 되는 곳은 흔치 않으니 자리가 한정되고, 한정된 자리에서 최대의 효율을 뽑으려면 거대한 수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수차의 축도 크기가 커지고 동시에 쉬는 시간이 없으니 부품의 내구도가 빠르게 닳습니다. 게다가 수차의 축은 매화탄 같은 강력한 화력이 아니면 녹일 수 없어 수리도 까다롭지요.”

“거기에 하나 더. 아무리 거대한 수차라도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금왕공방에서도 반드시 수차가 필요한 공정에만 사용하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다른 공정에도 수차를 이용할 수 있다면 그 속도나 완성도는 올라갈 겁니다.”

“이 증기기관은 그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어. 지금은 시제품이지만, 아마 간양 누나의 손이 닿으면 더 효율이 발전하겠지. 금왕공방을 지금의 세 배, 아니 다섯 배 정도는 키울 수 있을걸?”

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그 가능성을 전부 파악했다는 표정이다. 긴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람은 오랜만인걸.

[미안하게 됐네요. 긴말해야 통하는 사람이라서!]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하지만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요. 이게 수차의 역할을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금왕공방을 다섯 배로 키운다는 거예요?]

“다섯 배, 아니 열 배도 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렇지?”

[자기들만 통하는 얘기 하고! 나 삐질 거예요?!]

“수차의 단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축을 망가트리는 요인은 수차가 하루 종일 돌아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증기기관은 사람이 원하는 시간만큼 작동시킬 수 있으니 기관을 아껴 사용할 수 있겠군요. 힘의 강도도 조절 가능해 보이고요. 수차는 섬세한 힘이 필요한 작업이나 짧게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는데 이건 작업 공정별로 맞춤 제작이 가능해 보이니 훨씬 활용도가 높습니다.”

홍령이 삐지기 전에 금리가 알아서(?) 증기기관의 장점을 찾아내며 설명을 해주었다.

“수차를 움직이는 물의 흐름은 공짜지만, 이건 불을 때야 한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지. 돈이 들잖아.”

“매화탄만큼 비싸진 않을 테니 괜찮습니다. 이런 게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걸 제시하지 그러셨습니까?”

“만사 불여튼튼이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야 개념만 갖고 있는 거라, 당당이 간양 누나에게 내보일 만 한 물건을 단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으니까. 사천당가가 기관진식에도 조예가 있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연출적인 효과를 노린 것도 있었다. 매화탄을 가져오겠다! 해놓고 증기기관을 내밀면 더 그럴싸하잖아.

결론적으로는 매화탄마저 없는 상태에서 증기기관을 내놓게 된 거라 더 큰 효과를 봤지만 말이다.

“간양 고모가 보면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좋아하시다 뿐일까요. 매화탄을 전부 잃어버린 데다 앞으로의 매화탄 공급도 어려워진 상황. 삼촌은 금왕공방을 구하셨습니다. 금왕공방의 총관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금리가 자세를 단정히 하고 내게 예를 올렸다. 공방에서 재회했을 때의 싸늘한 태도와는 달랐다. 진심이 담겨 있는 인사였다.

“동시에 저 또한 구하셨지요. 삼촌이 그 자리에 오지 않으셨다면 저도 불의의 화를 입을 뻔했습니다. 좌수검의 방문 또한, 삼촌께서 계셨기에 그가 제게 예의를 갖춘 것 같더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절을 올렸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온 바닥이 재투성이인데, 금리는 아랑곳 앉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금가장의 딸로서,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다 삼촌께 약조 드립니다. 삼촌께서 원하신다면 그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세요.”

“과하다, 리야. 우리는 가족이잖아. 난 오히려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 너를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아뇨. 가족일수록 계산은 철저해야 한다, 할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또한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죠. 구명지은은 그 배를 주더라도 갚아야 한다고요. 상인이라면 빚을 졌을 때 이자까지 붙여서 제대로 갚을 줄 알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아버지도 참. 어린 손녀한테 별 소릴 다 하셨네.”

하지만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공짜로 받는 호의도 아니고, 내 품이 들어간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금리의 성격상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면 더 불편해하겠지.

마침 좋은 생각이 나기도 했고.

“좋아, 그럼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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