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처럼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
그러나 나는 그자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목소리도 그렇거니와, 이 상황에서 나타날 여인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당신 조카님의 거래처가 바로 흑사방이었군요.]
금가장은 대체로 양지의 사업을 하지만 그렇다고 음지의 거래를 아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덩치가 큰 사업을 꾸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곳에 손을 대야 하는 순간들이 오니까.
그렇다고 해도 금리 같은 거물이 직접 이런 곳에 오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는 수하를 보내는 법인데.
[당신 아버지에게는 은 파파 같은 그림자가 있었고, 큰 형님도 비슷한 뭔가가 있겠죠. 저 애는 제 아버지에게서 돈 한 푼 없이 쫓겨났다면서요. 그러면 두 발로 움직이는 수밖에요.]
“하, 우리 큰 손 오셨나? 갑자기 두 배를 부르는 손님이 있어서 말이야. 아가씨도 알지? 우리 같은 놈들은 큰돈 준다면 약속도 뭣도 별로 중요하질 않거든.”
흑사방주의 시선이 금리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눈에 음심은 감추지도 않은 채였다.
저 개자식이?!
내가 발끈하려는 찰나, 금리가 나를 흘낏 보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저 손님이 두 배를 낼 수 있는지 확인은 해봤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저만한 야명주를 대단치 않게 들고 다닐 인물이면 믿어도 될 거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흑사방 앞에서 허풍을 떨고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직접 체험을 해보면 될 일이고.”
흑사방주가 껄껄 웃자 주변의 흑사방도들도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는 듯 폭소를 터트렸다.
금리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허면 다음 거래는 어쩔 겁니까? 저 손님이 다음에도 두 배의 금액으로 사준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이번 일회성 거래로 끝날 거랍니까?”
“어? 그, 그건―.”
흑사방주가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의 유리함을 위해 지속적인 거래를 암시할 수도 있겠지만 흑사방주가 말했듯 저들의 노여움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내가 무림문파의 장이었으면 호기를 부려 봤겠지만 우리 의원들은 대부분 점혈을 위해서 무공을 익힌 게 전부인 사람들이다. 허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한 번의 거래로 기존 거래처의 신용을 잃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흑사방주 당황한 거 봐요. 두 배 판돈을 세 치 혀로 무산을 시켜버리네요.]
좋아, 잘한다! 마구 밀어붙여!
[잠깐만요. 우리는 당신 조카님을 이겨야 하는 입장이라고요!]
하지만 저 새끼가 먼저! 고작 그깟 돈으로 내 조카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요.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을 잊지는 말라고요!]
당연히 안 잊었어. 여기서 매화탄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금리에게 태양의원의 모든 권리를 넘겨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걸 잊을까 봐.
“허나 그쪽 아가씨께선 이번이 아니라 다음에도 매화탄을 구해야 하는 입장이죠. 안 그렇습니까?”
흑사방주의 마음이 계속 금리와 거래를 이어나가기로 기울락 말락 할 즈음 내가 끼어들었다.
“흑사방주가 이번에 저와 두 배 가격으로 거래를 해 아가씨와의 신용을 잃는다 해도, 아가씨는 다시 흑사방주에게 매화탄을 사러 올 겁니다. 흑사방 외에 이 물건을 취급하는 곳은 없을 테니까요.”
“!”
“그러니 방주는 나와 거래를 해서 이번에 두 배 값을 받고, 그 다음에는 이쪽 아가씨와 계속 거래를 이어나가면 돼. 이쪽 아가씨에게 가격을 더 올려 받아도 되겠지. 아가씨는 여기 아니면 물건을 구할 수 없는 처지니까. 갑은 그쪽이라고.”
내가 매화탄의 특성과 흑사방주의 처지를 조곤조곤 짚어주자 흑사방주의 얼굴이 다시 변했다.
“뭐, 그렇다고 이쪽 아가씨의 심기를 너무 거슬러 버리면 전혀 다른 대안을 찾을 수도 있을 테니 너무 판돈을 올리는 건 조심해야겠지. 동냥그릇을 깨먹을 게 아니라면 말이야.”
고작 이런 거래로 내 조카의 신변을 위협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냥 매화탄을 얻어서 내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고.
“좋아, 그러면 이쪽 선생과 두 배 가격으로 거래를―.”
“잠깐만요. 거래 전에 저와 얘기 좀 하시죠.”
금리가 나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똑똑한 애니까 면사를 쓰고 있어도 내가 누군지 이미 알아차렸겠지. 면사 두 겹 너머로 쏘아지는 시선이 따끔따끔할 지경이다.
“좋아, 두 손님이 적당히 타협하고 오라고. 하하!”
흑사방주는 우리가 말다툼을 하다가 싸워서 분위기가 과열되길 바라는 분위기였다. 경매에서도 그런 식으로 가격을 올리는 일이 드물지 않으니 판매자로서는 기대할 만한 상황이겠지.
우리는 구석진 곳을 찾았다. 코끼리를 싣고 온 거 같은 거대한 우리 뒤는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았다. 금리가 면사를 벗었다. 뒤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휴, 창천도 정말. 분위기 못 읽네요.]
북촌 그 시골에 틀어박혀 무공 수련만 하다가 이런 미인을 처음 보면 아무리 창천이라도 헉 소리가 날 만했다.
그래, 내 조카가 좀 예쁘긴 하지. 아니 심하게 예쁘긴 해.
“막내 삼촌 맞으시겠지요.”
면사를 벗은 금리는 매우 탐탁잖은 표정이었다. 냉랭한 분위기가 금가장의 후계자가 아니라 북해빙궁의 궁주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면사를 반만 들어올렸다. 금리는 약간 눈을 찌푸렸지만, 내 맨얼굴을 처음 보는 게 아닌지라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부분은 인정해드리겠습니다.”
“칭찬 고마워.”
“허나 매화탄을 넘겨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두 배라니요. 저 물건에 얼마를 주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태양의원의 수입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벌써 조사해 본 건가? 하긴, 자기 손에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사전 조사는 해야지. 그 부분은 칭찬할 만하다. 내기로 손에 넣었는데 빛 좋은 개살구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조카님은 모르죠. 우리가 신통의원의 비고에서 얼마만큼의 재물을 얻었는지 말이에요.]
그곳에서 얻은 금괴는 일부는 보관하고 일부는 이번에 무한에 가져와서 금왕전장의 전표로 바꿨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출장소를 차려도 지출에 여유가 있었지.
“……만에 하나, 막내 삼촌께서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르는 재물이 있어 그걸 살 수 있다고 칩시다. 정말 저 무도한 자들에게 그만한 금을 쥐여 주실 생각이십니까?”
호오, 이건 또 의외네.
흑사방과 손을 잡고 거래하기에 금리에게 지저분한 면모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건가?”
“당연합니다! 저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가격에 터무니없는 장사를 하는 자들과 손을 잡고 싶었겠습니까? 저자들이 파는 물건을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에 사람의 장기에 시신까지. 금왕공방의 사정이 급한 것만 아니었다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겁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냉정해 보여도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는 소저로군요.]
순수함보단 정상성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눈살을 찌푸리는 게 정상이잖아.
그보다 금리도 저들에게 반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거래를 하고 있다라…….
“매화탄의 소재를 찾아 여기까지 오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의원의 권리를 달라는 등의 얘기를 더는 하지 않을 테니,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막내 삼촌 같은 분이 오래 있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이곳의 구매자들 중에는 특이한 체질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이들도―”
“아니, 그럴 순 없어. 빈손으로 돌아가서 간양 누나한테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삼촌!”
“하지만,”
내게 큰소리로 따지려 들던 금리가 멈칫했다.
“내 조카가 그런 놈들한테 수모를 당하는 걸 지켜볼 생각도 없지. 어때, 나랑 손잡고 저 녀석들을 한번 멕여보는 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무슨 생각이냐면 말이지―.”
* * *
흑사방주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이 거래하는 상대가 금가장의 콧대 높은 영애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제법 애를 썼지만 그래 봤자 어린 계집이 하는 일이 아닌가?
금리의 미모는 뒷세계에서도 충분히 유명했다. 어떻게 한번 해먹어 보려고 몇 번 수작을 부렸지만 그년은 도도하게 콧대를 세우며 넘어오질 않았다.
흑사방주는 항상 군침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건드리기엔 뒤에 있는 금가장이 거슬렸다.
그들이 제아무리 음지에서 살아가는 흑도 방파라지만 양지의 금력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쉬운 대로 그년과의 거래가 짭짤하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매화탄을 구하는 건 중원 전역에 흑시를 여는 흑사방으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겐 다행히 그 저주받은 물건을 구할 끈이 있었다.
“야, 새꺄. 그 횃대 좀 치워라. 불붙으면 우리 다 뒈진다는 거 몰라?”
횃대를 들고 근처를 서성이던 흑사방도에게 잔소리를 내뱉은 흑사방주는 금리와 수상한 구매희망자가 사라진 쪽을 지그시 보며 그들이 과연 얼마에 가격을 협상해 올 것인지 기대감에 휩싸였다.
희소한 물건을 두고 반드시 물건을 구해야 하는 두 구매자가 있다면 가격은 치솟기 마련이다. 당장 흑시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구매 희망자가 두 배의 가격을 부르지 않았던가?
매화탄은 그 자체로도 가격이 비쌌지만 흑사방도 중간 거래상이나 다름없기에 가격만큼의 이문을 남기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물건을 쓰는 곳이 많은 것도 아니라 고정 거래처가 있다는 걸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오는구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금리와 거래희망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잘만 하면 본거지로 돌아가는 동안 기녀를 열 명은 사서 끼고 놀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흑사방주의 아랫도리가 불끈해졌다.
“그래, 대화들은 잘 나눴나?”
흑사방주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까지도 흑사방주는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물건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이 담합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금리에게 흑심을 품은 흑사방주다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 봐라. 아까보다 거리가 가까운데? 혹시?’
두 사람이야 서로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한 데다가 한 편이 되기로 했으니 아까보다 거리감이 줄어든 것뿐이지만 흑사방주는 다르게 보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금리가 가격 경쟁을 피하기 위해 제 몸을 내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자 흑사방주의 눈에서 불이 솟았다.
생각해보면 그냥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게다가 자리는 뭐 하러 옮긴단 말인가? 그냥 제 앞에서 하면 그만 아닌가?
흑시에서 제 정체를 까발리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인 흑사방주는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비밀리에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구매희망자를 질투 어린 눈으로 쏘아보았다.
“응, 대화. 잘했지.”
“하. 하. 하. 그래, 어떤 합의를 봤는지 나도 좀 듣고 싶은데.”
“별 건 아니었어. 그냥 우리 둘이 얘기를 좀 해보니까 두 배는 좀 비싸게 부른 것 같아서 말이지―.”
구매희망자가 말을 늘이며 금리와 시선을 교환했다. 면사 너머로 몸을 섞은 남녀의 끈적한 눈빛이 보이는 것 같아 흑사방주는 배알이 꼴렸다. 침 발라놨던 여자를 누가 먼저 맛을 봤다는 것 외에도, 그렇게 되면 두 배의 이익이 사라지는 일이다.
젠장, 두 연놈이 사라지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가격을 깎겠어. 저쪽이 부른 만큼 주지.”
“……엉? 뭐라고?”
“저도 그간 너무 비싸게 샀던 것 같아요. 지난 가격의 사분지 삼을 제시하죠.”
아니, 이 계집은 또 왜 이래?
가격 경쟁을 하느라 가격이 오를 줄 알았는데, 두 연놈이 오히려 경쟁적으로 가격을 깎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