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도개걸이 다녀가고 이틀 후, 저녁.
성문이 닫히기 전 성을 나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기척보다 시큼한 거지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도개걸이었다.
“준비는 끝났냐? 그렇게 둘만 갈라고?”
“제 몸 하나 지키는 데 창천 하나면 충분하겠죠. 어수룩한 사람이 여럿 가기에 좋은 곳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나는 품에서 야명주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물건. 이 정도면 흑시에서도 제법 상등품으로 거래될 물건이다. 흑시에 참가하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보여줘야 한다나 뭐라나.
참고로 도개걸은 그냥 자신의 흑죽 타구봉을 들이민단다. 다들 정체를 숨기고 참가하는 흑시에 개방 방주의 신물을 덥썩 내밀다니. 하여간 보통내기는 아닌 노인이었다.
“혹시 몰라서 이런 것도 챙겼어요. 누구 살 사람이 있을까요?”
“그건 뭐냐? 빨대? 쇠로 된 것을 보아하니 피리더냐? 헌데 구멍이 없는데?”
“그러게요. 빨대로 쓸 수도 있긴 하겠네요. 용도는 저도 잘 모르겠고, 일단 금왕공방 물건이긴 하거든요. 공방장 금간양의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엇이냐 하면, 손바닥만 한 길이의 얇고 긴, 빨대 같은 금속 대롱이다.
오늘 아침 금간양이 와서 시범작으로 만들어봤다며 주고 간 것인데, 그러니까 주삿바늘을 만들다가 망한 물건이지.
수차가 돌아가질 않으니 할 일이 없어 만들어봤다는데 역시 내가 주문한 거 같은 가느다란 건 수차를 돌려야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한다.
역시 매화탄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것도 금리보다 빠르게. 그렇지 않으면 내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흐응, 그 유명한 금가장의 금손이 작품이더냐? 허면 별 용도가 없어도 사갈 놈이 있겠지.”
“그럴 거 같아서 친필 보증서도 받아놨습니다. 가실까요?”
“그래. 가보자꾸나.”
이번에도 제법 멀리 가야 하는 탓에 마차를 준비했다. 금왕표국에서 빌린 큼직한 짐마차에, 말도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빡 안 하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명마들이었다. 흑시 같은 곳엘 가는데 무림인에게 쉬이 겁을 먹는 말을 쓸 수는 없으니까.
도개걸은 마차를 타고 간다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무림인들은 대체 왜 다 이러는 걸까? 편한 이동수단을 놔두고 왜 굳이 두 다리로 힘써서 달리려고 하는 거지?) 야명주 대신 말을 내놔도 잘 팔리겠다는 농을 지껄였다.
창천은 저번에 정반합의 약속 장소에 갈 때 마차를 한번 타보더니 제법 익숙해진 건지 이번에는 군말이 없었다. 간지도 좋지만 역시 사람은 몸이 편해야지, 암.
그렇게 두 시간쯤 달렸을까.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 한구석에서 거지 둘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마차는 두고 가자. 우리 애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얼굴들이나 제대로 가려라.”
딱히 정사를 구분 짓진 않았지만 태양의원은 어느 정도 정파에 기울어져 있는 곳이다. 무당과의 관계도 그렇고, 나도 홍령 때문에 정파 쪽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곳에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돌아서 좋을 건 없다.
“차라리 가면이 편할 거 같은데.”
삿갓과 면사를 쓴 창천이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나도 이번에는 가면 대신 면사를 택했다.
“너나 나나 이미 가면이 알려져 있어서 안 돼. 군말 말고 가자고.”
녀석의 청가면이나(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태 돌려주지 않았다) 내 가면은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 인식이 되어있다.
오히려 나는 여기 맨얼굴로 돌아다니는 게 더 내 정체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될 걸? 여전히 맨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는 나지 않지만.
우리는 평소 입던 것과 다른 옷에 면사로 정체를 숨기고 도개걸의 인도를 따라 어둠이 드리운 오솔길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조금 더 들어가자 저잣거리의 소음 같은 게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엄청난데요.]
그러게. 진짜 엄청난데.
나도 전생에 블랙마켓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있다.
물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부장의 은밀한 취미를 위해서였는데, 한 번 사보곤 흥미를 잃어서 다행이었지. 거긴 현대의 암거래 시장인 데다 재벌들을 위한 희귀물품을 공급하는 곳이라, 음침하기보다는 고급 백화점 본점의 고급스럽고 프라이빗한 느낌을 한껏 살린 분위기였다.
중원무림의 블랙마켓이 그런 분위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뿌우우우우―!
여긴 거의 서커스 장 같은데.
입구 근처에서 밧줄에 묶여 우는 코끼리를 보고 든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호객하고 물건을 파는 모습이 거의 시장통이나 축제를 방불케 했다.
비록 팔고 있는 물건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 서른 구, 제물로 쓸 만한 동남동녀, 즉석에서 갈라 꺼내주는 신선한 장기 뭐 그런 것들이라 그렇지.
[위험한 물건들을 판다고 해서 좀 더 조용하고 은밀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평소에는 이렇게 요란하지 않을 텐데, 아마 명절이라 규모가 커서 그럴 거다. 중원 전역에서 팔 놈과 살 놈이 몰려들었을 테니까. 사기꾼 놈들도 이때 한탕 하려고 혈안인 거지. 흑사방 놈들도 많이들 몰려 들었구만.”
흑사방은 흑시를 주관하는 흑도문이라고 한다. 무한 외에도 중원 각지의 대도시에서 흑시를 연다나.
근데 솔직히 난 사파랑 흑도가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둘 다 정당하지 않은 행사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 행사의 방향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거예요. 흑도는 돈이 우선이죠. 작게는 시장의 질서관리를 하며 보호세를 받고, 크게는 이런 식으로 암시장을 운영하는 등의 일로 돈을 벌고요. 사파는 무공수련이 우선이에요. 잔혹무도하게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이지(理智)를 갉아먹으면서 빠른 속도로 무공수위를 높이는 등 정도가 지나친 방식을 택하는 이들을 사파라고 해요. 뭐, 그런 식으로 무공수위를 높여서 돈을 벌려고 하는 이들도 있으니 헷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하긴, 정파도 돈을 버는 일에 있어서는 비슷한 수익 활동을 하지만 어느 정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걸 정해놓고 일하는 듯했으니까.
그때 흑사방의 무인들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우리를 막아섰다.
나는 사전에 도개걸에게 들은 대로 말없이 야명주를 보여주었다. 놈들은 그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를 통과시켰다.
도개걸은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로 흑죽 타구봉을 들어 올렸고 역시나 통과되었다.
개방 방주가 정체를 밝히고 등장했으니 소란스러울 법도 했지만 여기서 그런 데 관심을 갖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거 같았다.
“네놈이 찾는 물건은 저기 있는 거 같구나. 흑사방 놈들 말이다.”
도개걸의 타구봉이 가리킨 곳은 흑시의 한가운데였다. 흑사방의 무복을 걸친 이들이 매의 눈으로 흑시를 둘러보고 있었고, 누가 봐도 흑사방주인 자가 임시로 만든 단상에 앉아 있었다.
그 뒤로 검붉은 숯을 채운 짐마차 세 개가 보였다.
[저거에요! 화산의 매화탄이에요! 기억났어!]
홍령의 보증이 있으니 확실하군. 나는 곧바로 그쪽을 향했다.
[내 안내는 여기까지다. 금가야, 미리 말한 걸 잊지 마라. 자정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그 이후까지 남아 있다가 뭔 일이 나도 나는 책임 못 진다. 알았느냐?]
도개걸의 전음이 뇌리를 스쳤다.
여기 오기 전, 도개걸은 반드시 자정 전에는 이 자리를 떠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아무래도 암거래 시장이라는 게 사기꾼도 많고 도를 넘는 흥정도 많아 과열되기 쉽다 보니, 그즈음이면 민간인이 있기엔 위험한 분위기가 되는 걸지도.
어차피 물건도 바로 발견했겠다, 값을 치르기만 하면 이곳에 더 볼 일은 없었다. 솔직히 더 있고 싶은 분위기도 아니고. 마음 같아선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을 모르던 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죠. 우리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마음을 단단히 먹어요.]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동남동녀에게서 겨우 눈을 떼고 단상 앞에 도착했다. 흑사방의 무인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볼일이지?”
“마차에 실려 있는 숯을 사고 싶은데.”
이게 흑도 무인의 기세라는 건가?
청운진인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보기도 했지만, 눈앞의 사람은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 죽이는 걸 밥 먹듯이 하는 자들이 풍기는 묘한 기류가 느껴진 달까.
실제로 지닌 힘이 강하고 약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는 무언가 말이다.
이런 자들을 상대할 때는 절대 기세에서 밀려선 안 된다.
기세가 아무리 험악한들 흑사방 방주도 아니고 일개 무인이 아닌가?
나는 태연하게 턱짓으로 매화탄을 가리켰다.
“흐음, 대리인을 보낸단 말은 못 들었는데. 잠깐 기다려. 방주에게 물어보지.”
[대리인이라니. 이미 거래할 사람이 있다는 걸까요?]
가능성이 있지.
소지가 간편한 귀중품이라면 한두 번 허탕을 쳐도 괜찮겠지만, 저 짐마차의 크기를 봐라.
저만한 마차 세 개 분량의 숯을 가져오려면 이동에 드는 물류비도 보통이 아니다. 허탕을 치면 영락없이 손해란 말이지.
게다가 매화탄은 엄연히 쓸 만한 곳이 한정되어 있다. 희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걸 구하는 사람도 희귀하다는 뜻이다. 예약된 물건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 어여쁜 중개인은 어딜 가고 이런 시커먼 사내놈들이 왔나? 네놈들은 뭐냐?”
무인이 어떻게 얘길 했는지 흑사방주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누구긴 누구야. 웃돈 줄 사람이지.”
예약자가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예약을 이유로 거절한 게 아니라 방주가 직접 내려왔다.
대리인임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 여긴 양지의 시장이 아니라 음지에서 벌어지는 흑시니까.
“그 중개인이라는 사람이 얼마를 준다고 했지? 아니, 얼마든 상관없어. 두 배를 주지.”
“호오? 이야, 이거 간땡이가 큰 손님일세. 어린애 같은데, 흑시에서 남의 물건을 가로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냐?”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이미 예약을 받아놓고도 다른 손님을 떠볼 정도로 상대가 제시한 금액이 썩 마음에 안 차나 봐?”
방주가 씩 웃었다. 왜 방주라는 작자들은 성격이고 말투고 다 이 모양일까. 좀 전까지 도개걸과 있다 와서 이런 무도한 사람을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나에게 매화탄을 넘기면 그자가 약속한 금액의 두 배, 거기에 이걸 얹어주지.”
나는 품에서 야명주를 꺼냈다. 흑사방주는 내 야명주에 얼굴을 들이대고 순도를 살피듯 눈알을 굴렸다.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나는 비장의 무기(?)를 하나 더 꺼냈다.
“재밌는 물건도 하나 더 있지. 무려 금왕공방의 공방장이 직접 만든 물건이야. 친필보증서도 있어.”
“……금왕공방장의 물건이라고?”
흑사방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지? 야명주를 꺼냈을 때까지만 해도 제법 혹하는 기색이었는데?
“고 간악한 게 무슨 수작질을 하려고 이러나? 이런 장난을 해서 그년에게 득이 될 건 없을 텐데?”
“그 간악한 년이 나를 말하는 겁니까, 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