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저놈은 영물이다. 아무에게나 제 몸을 맡기지도 않지. 네놈 말이 맞다. 녀석이 마지막을 직감하고 내 제자를 찾았다면, 제 몸에 침을 놓게 내버려 뒀다면 사실 난 뭐라 거들 게 없다. 내가 데리고 가려고 하면 오히려 내 다리짝을 물어버리겠지. 놈이 신생을 도망치게 했을 때처럼 말이야.”
“다시 말씀드리지만, 완치할 수 있다는 장담은 못 드립니다.”
“차라리 그게 낫다. 고쳐보겠다고 콧김 빵빵해가지곤 침 한 방 못 놓고 놈에게 쫓겨난 다른 의원들보단 낫겠지.”
[안타깝네요……. 그래도 다른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았다면 지금처럼 상태가 나쁘진 않았을 텐데요.]
모르는 일이지. 완치하겠다고 덤볐다면 지금보다 악화되었을지도 모르고.
지나간 일에 대한 가정은 관두자. 지금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데 집중하자고.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라. 후원을 받는다 했지? 거지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마.”
“정말이십니까?”
개방 방주가 해줄 수 있는 것의 범주는 얼마나 될까?
물론 사안에 걸맞은 정도까지만 가능하겠지만, 좀 전까지 그냥 안락사시키라느니 한 푼도 못 주느니 했던 것에 비하면 굉장한 심경의 변화가 분명했다.
“조건 없이 정반합에 껴달라는 거 같은 건 안 된다. 그건 개방의 일이 아니니까. 위패를 훔치는 걸 도와달라는 것도 안 돼. 하지만 다른 거라면 뭐든 좋다. 개방의 의술도 필요하다면 알려주지.”
개방의 의술? 개방에 의술이 있어?
[당연하죠! 오래된 문파는 각자만의 의술을 발전시켜 왔다고요. 그중에서도 특히 희소성이 있는 게 개방의 의술이에요! 무당과 당가를 떠올려 봐요. 구파의 의술은 비무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오대세가는 자신들의 체질을 개선하는 동시에 그로 인한 다양한 질병을 고치는 데 방점을 두죠.]
그건 그렇지.
무당의 의술은 무당의였다가 지금은 태양의원에 고용된 이들과의 세미나를 통해, 당가의 의술은 당당과 산공독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댈 때 접하며 새로운 것들은 모조리 흡수했다.
물론 그 지식을 흡수하는 건 내가 아니라 홍령이긴 했지만, 아무튼.
[개방은 말이죠, 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처와 병증에 통달해 있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치료를 함에 있어서 정통 의술을 접목하지 않는다고요. 거지들에게 침이나 약재는 사치잖아요? 그들 나름의 방법이 있는데, 재료도 간단하고 방법도 쉽다고 하더라고요.]
알겠다. 민간요법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거군.
확실히 거지생활은 여러 가지 병증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식생활부터가 식중독에 걸리기 좋고, 영양실조는 당연하거니와, 차고 더운 데서 자니 몸이 남아날 리 없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거지 생활이니 상처나 멍을 치료하는 방법도 발전했겠지.
[휴! 너무 기대돼요! 개방은 의서 같은 건 안 만들고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수하는 데다, 거지들끼리 아니면 잘 해주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빨리, 빨리 들어봐요!]
홍령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한다.
전생에서 민간요법은 한의학보다 낮은 취급을 받다 못해 사이비나 사기꾼 취급이었지만, 개중에는 현대과학이 아직 그 원리를 증명하지 못했을 뿐 확실히 효과를 본 사람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의술로도 걸왕을 고치진 못했으니까,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떤 물건을 구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물건이라면? 걸왕의 치료에 쓰이는 거냐?”
“직접적으로 쓰이진 않지만, 유용한 물건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상당히 희귀한 물건이라 솔직히 정보를 얻는 것도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대체 뭔데? 손에 넣을 순 없어도 정보 정도는 알아봐 줄 수 있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개방 방주인데, 그 정도도 못 할까?”
“매화탄이라는 이름의 숯인데요. 엄청 구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 이름을 꺼내자 도개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고얀 놈. 내가 알 만한 거라 밑밥을 깔았구만. 이런 야비한 놈을 봤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들이라서요.”
“하, 사내대장부가 한 입으로 두 말 할 수도 없고. 그래, 그건 왜 구하는데?”
나는 금간양에게 부탁한 물건과 금왕공방의 수차, 그리고 금리와의 내기까지, 매화탄에 얽힌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걸왕의 상태를 관리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지도.
황폐화된 섬서에서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숯, 매화탄.
섬서사변의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정반합이 아니고서야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좋아, 그 정도 농간이야 넘어가지. 걸왕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진심이렷다? 신생을 걸고 진짜다 맹세할 수 있느냐?”
“걸왕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지만, 제가 그 아이의 스승 됨을 걸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태양의원을 걸지요.”
“하! 농담 하나 안 통하는 재미없는 녀석이로군. 뭐, 진짜 그 애를 걸었다면 오히려 의심했겠지만. 그래, 매화탄이란 말이지.”
도개걸은 뭔가 생각하는 투로 잠시 입을 닫았다.
“네놈, 흑시(黑市)가 뭔지는 아느냐?”
흑시? 까만 시장? 그게 뭐야?
[……흑시라, 그렇군요. 그런 곳이라면 확실히 매화탄이 있을 만해요.]
설마, 암거래 같은 건가? 블랙마켓?
[맞아요. 하지만 그냥 암거래가 아니죠. 흑시는 무림인들이 주축이 되는 암거래 시장이에요. 흑도와 사파는 물론이고, 정파의 인물들도 정체를 숨기고 참가한다고 들었어요. 구파일방의 심처에서 훔친 절세 무공서나 보물 같은 장물부터 시작해서, 뇌나 심장 같은 장기, 남해태양궁이나 북해빙궁의 신비한 동식물에 심지어 절대고수의 시신까지. 없는 게 없다고 하더군요.]
다른 건 알겠는데, 시신은 왜? 그걸 사는 사람이 있어?
[사파나 사외마도 중엔 강시술을 다루는 이들이 있거든요. 절대고수의 시신으로 강시를 만들면 엄청나게 강력한 강시가 된다나. 전생의 무공수위를 그대로 갖고 있는데, 신체를 박살 내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는 강시라고 생각해봐요.]
음, 그렇네. 가능하기만 하다면 비싸게 팔리긴 하겠네. 생각만 해도 징그럽지만.
[아무튼, 그런 곳이 흑시예요. 그곳에 나오는 물건들은 희귀하기도 하지만, 그 물건을 사고파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죠. 황폐해진 땅,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는 그 땅에서 원재료를 구해야 하는 거니 흑시라면 매화탄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네. 그 흑시가 이곳에서 열립니까?”
“그래. 마침 명절을 앞두고 무한의 흑시가 아주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지. 거기에 매화탄을 갖고 나오는 놈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솔직히 대단한 기대는 안 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네놈이 그걸 구해야만 한다면 장소와 일시는 알려주마. 대신 그곳에서 매화탄을 구해오는 것은 네놈의 일이다.”
“예, 그것까지 기대하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나참, 보통 놈이라면 어떻게든 내게 더 뜯어먹어 보려고 난리일 텐데.”
“어떻게 거지의 동냥그릇을 깨겠습니까. 매화탄이 흑시에 나온다는 것과 흑시의 장소, 일시를 알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묘하게 욕심이 없는 놈이라니까…….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위패를 훔치는 일은 어떻게 잘 되고 있는 거냐?”
“궁금하십니까?”
“궁금하다. 금가 그놈 자식 같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그 사갈 같은 구석을 닮은 네놈이, 제일 빌어먹을 놈의 금건양을 어떻게 엿 먹일지 아주 궁금하거든. 그 공방이란 곳에 다녀온 걸 제외하고는 여기 틀어박혀서 짐승들 치료만 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예 포기한 건 아니지?”
“포기라뇨. 계획은 세워놨습니다. 아직 필요한 게 좀 남아 있긴 하지만.”
도개걸 덕분에 매화탄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으니, 이 정도는 알려줄까?
“매해 명절 전날, 금가장이 주축이 된 무한 상련이 회합을 가지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아아, 무한 상단 놈들이 죄 모여서 밥 먹는 거? 윤모 놈이 그거 때문에 내 눈치를 살살 보고 있지. 무한 거지들이 한 해 동안 그날 구걸밥 얻어먹는 것만 기대하고 있는데, 나 때문에 못 갈 거 같다고 말이야. 낄낄.”
도개걸은 그 회합을 그냥 상인들이 모여서 밥 먹는 모임이라고 일축했지만, 사실은 장강을 통해 흐르는 중원 물류의 한 해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회합이다.
뭐, 모여서 거하게 밥을 먹는 것도 맞는 말이고, 거지를 포함해 빈민들에게 명절 음식을 베푸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래서, 상련 회원의 동반인으로 들어가려고? 확실하긴 하지만 꽤 시시한 방법이구나.”
“아쉽지만 그건 이미 자리가 다 차서요. 무한에서 인맥 만들기론 최고인 자리라 경쟁이 엄청 치열하거든요. 그냥 밥이 맛있어서 오는 사람도 있고요.”
“호오, 그럼? 날 더 재밌게 해줄 뭔가가 있는 거구만!”
나는 빙긋 웃었다. 개방 무한 지부장인 윤모라면 여기까지만 말했어도 내가 어떤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무한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 데다 그간 신생을 찾는 데 집중하느라 개방 방주의 역할도 내팽개치고 있던 도개걸로서는 영 감이 안 잡히는 눈치였다.
“딱 하나, 거기에 들어갈 수 있지만 아직 결정 안 난 자리가 있죠.”
“그게 뭔데?”
“무한상련은 매해 회합 때 올해의 인물을 뽑아요. 그 사람은 명절 당일 금가장의 초청을 받죠.”
“호오……! 그런 것이 있더냐, 흥미롭구만?”
“뭐, 그렇게 쉽게 뽑힐 수 있는 건 아니긴 한데요. 상련의 표가 칠 할이고 그 외 무한 시민들의 표가 삼 할을 차지하죠. 그리고 지금 우리 의원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중 부자들은 대부분 상련 소속의 상인이고요.”
처음에는 불가능한 옵션이라고 생각했기에 제껴 놨지만, 태양의원―수의 무한출장소를 시작하고 나선 가능성 있는 옵션이 되었다.
내가 그간 별다른 외부활동 없이 동물들을 치료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건, 바로 그 투표를 위해서였다.
“사특한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진짜로 제 아비의 위패를 훔칠 작정이로구만?”
“그걸 요구한 건 방주시고요.”
“하하핫! 그래, 그 불효막심한 짓을 시킨 건 나지. 그래, 네놈을 흑시에 데려다주기로 하고, 정말 거지들의 의술은 필요가 없느냐?”
[말해 뭐해요! 빨리 필요하다고 빌어요! 발가락이라도 핥아요!]
이번에도 필요 없다거나 다른 걸 달라고 했다간 저 귀신에게 내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물론 전혀 아프진 않지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하죠. 천하의 그 어떤 의원도 범접하지 못할 길 위의 의술을 가진 개방 아닙니까.”
“고놈 아주 혓바닥에 기름을 발랐어. 윤모 그놈이 일가견이 있으니 그놈을 보내주마.”
도개걸이 돌아가고 곧바로 무한 지부장 윤모가 다른 거지 의원 둘을 데리고 태양의원을 방문했다. 우리 의원들은 밤낮으로 동물들을 돌보는 데 이어 냄새나는 거지들과 의술을 교류하느라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지만, 홍령과 마찬가지로 반색을 하며 쉽게 접하지 못하는 거지들의 의술을 맘껏 흡수했다.
나는 나대로 도개걸이 일러준 대로 흑시에 갈 준비를 하며 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