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18화 (118/350)

118화

“금 의원님.”

신생을 달래주고 있는데 진맥을 보던 최 의원이 나를 불렀다. 그는 신생의 눈치를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진맥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최 의원님. 폐수종, 즉 수천(水喘)이 의심되니 약을 준비해주세요. 당장 먹을 걸로는 정력대조사폐탕을, 꾸준히 복용할 걸로는 평폐탕이 좋을 거 같군요.”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신비탕이나 소청룡탕도 재료를 미리 준비해 놓겠습니다.”

최 의원과 다른 의원들이 신생을 안쓰럽다는 듯이 쓰다듬거나 위로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낑낑 소리를 내며 여전히 신생의 이름만 불러대는 늙은 개와 그 말을 전해주는 홍령, 나, 그리고 신생이 남았다.

“신생, 내 말을 잘 들어.”

“……네, 흑.”

“왕이는 나이가 많아. 삼백 년을 넘게 살았지만 그게 천 년을 아프지 않고 산다는 뜻은 아니야. 그렇지?”

신생은 작은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안 그래도 생명의 죽음에 예민한 아이에게, 자신을 항상 지켜준 개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 아이가 의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늙은 개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여기저기 상했을 거야. 영물이라고 하니까 자기 마지막을 알았을지도 모르지. 아니, 지금 죽는다는 얘기는 아니야. 나와 다른 의원들이 최선을 다할 거고, 그 정성이 하늘에 닿는다면 조금 더 살지도 몰라.”

의원의 일은 환자를 치료하는 걸로 끝나는 걸까?

물론 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진단과 치료가 메인이고 친절과 서비스는 옵션이니까.

치료를 잘한다고 해서 정도를 넘어서는 무례함이 허용되는 건 아니지만, 동시에 정도를 넘어서는 상냥함이 반드시 갖춰져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환자와 보호자는 의원의 냉정한 태도에 오히려 마음을 잘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신생은 아니고, 나는 아니다.

“네게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네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있어.”

“뭔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어요.”

“네 사부를 여기로 불러도 될까?”

“……사, 사부님을요?”

품에 안겨 있던 아이의 몸에 눈에 띄게 굳었다.

나도 도개걸을 정반합 외에 다른 이유로 보고 싶진 않지만…….

“그는 너보다 걸왕을 더 오래 알았지. 지병이라든가 기저질환 같은 정보를 더 알고 있을 수도 있어.”

노화라고 치부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에게 정보를 얻어 신생을 아끼는 늙은 개를 한 번 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걸왕이라 불릴 정도면 개방의 거지들에게도 보통 의미를 주는 존재가 아닐 테니까. 그렇지? 개방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알리긴 해야 할 거야. 네 사부를 대하는 게 두렵다면 일단 무한 지부장에게 연락을 넣고 내가 따로 나가서 방주만 만나는 것도―”

“아뇨, 괜찮아요. 사부님을 불러주세요.”

신생은 눈물을 닦으며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걸왕의 곁으로 가 주름이 자글한 머리에 무릎을 내주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사부님을 부르세요. 사부님도 왕이와 오래 알고 지냈어요. 아셔야 해요.”

다정한 아이다.

홍령에게만 들리는 걸왕의 말이 신생에게도 그대로 들리면 좋았을 텐데.

“그래, 방주를 부를 테니 그동안 왕이와 함께 있어 주렴.”

전생에서는 가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 과학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병을 극복했다는 등의 얘기 말이다.

기적은 기적인 만큼, 그게 사막에서 바늘 찾기 이상의 확률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볼게요. 신생에게, 걸왕에게 저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해주고 싶어요.]

늙은 개와 어린아이가 서로를 끌어안고 애정 어린 슬픈 눈빛을 주고받는 걸 보고 있노라면, 제아무리 심장이 차가운 이라도 그런 기적을 한 번쯤을 바라게 되는 게 아니겠나.

* * *

개방 무한지부장을 통해 연락을 넣고 반 시진 후, 도개걸이 태양의원―수의 출장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 그 개새끼가 아프다고?”

바로 그와 걸왕을 대면하게 하진 않았다. 일단 보호자 문진이 먼저고, 그건 환자가 바로 앞에 있지 않아도 가능했으니까.

“예. 걸왕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아무래도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치료를 위해 물을 것도 많고요. 우선 나이가 정확히 어떻게 됩니까? 평소에 특별히 아픈 곳이 있었나요?”

“그건 신생 그 녀석도 알 텐데? 나이는 대충 삼백 살이 넘었다 들었고,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비루먹은 개새끼였지. 걸핏하면 낑낑대면서 숨 차 하는데 곧 뒈질 거 같더니 이십 년을 꼬박 버티대.”

[신생이 얘기한 거랑 크게 다를 게 없네요. 괜히 불렀어요.]

아냐.

도개걸 본인이 의식하고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생이 말하지 않은 다른 정보가 그의 말에 숨어 있었다.

“이십 년을 버텼다고 하셨죠. 그 이전에는 그렇게 숨 차 하는 증상이 없었단 겁니까?”

“흠? 아, 그랬지. 그전에는 비루먹기는 해도 그럭저럭 멀쩡했어. 웬만한 거지들 다 찜 쪄먹고 말이야. 애초에 그 개새끼가 말이지, 우리 개방의 개파 사조가 잡아먹으려고 몽둥이를 들었다가 삼일 밤낮을 싸우고도 결판이 안 나서 결국 친구를 먹은 개란 말이야. 나이를 처먹긴 했어도 보통 일 가지곤 그렇게 앓지는 않지.”

좋아. 도개걸을 부르길 잘했다. 역시 신생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캐내고 치료에 접목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

“개방 방주과도 맞먹는 무공 실력을 가진 개가, 갑자기 그런 병증을 앓게 된 계기가 뭡니까?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너 머리 좋잖냐. 눈치도 제법 있고. 그 대갈빡을 팍팍 굴려봐. 애초에 개방 거지한테서 정보를 꽁으로 얻으려 드느냐?”

“다른 개도 아니고, 개방의 정신적 지주인 걸왕입니다. 치료하는 데 돈도 안 받는데 그 정도 정보는 그냥 주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헹, 그 개새끼가 걸신이니 뭐니 동냥그릇을 수호한다느니 믿는 거지새끼들이 꽤 많긴 하지. 내 사형도 그랬고.”

나는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들을 재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한 방에 답을 줄 위인도 아니고, 내가 거짓된 답을 내밀면 옳다구나, 그게 정답이다! 할 만한 위인이었으니.

[도개걸에게 사형이 있다니 뭔가 이상하네요. 보통 문파의 장은 장문인의 첫째 제자가 맡는 법이거든요. 대사형이라는 말은 그래서 특별한 거고요. 아주 가끔, 무재(武才)가 너무 뛰어나서 장문인 일을 맡기기 아깝다 싶으면 소질이 있는 다른 이가 되는 경우도 있긴 한데…….]

도개걸이 그런 자리에 소질이 있어서 방주가 된 건 아닌 거 같지?

“혹시 방주의 그 사형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걸왕을 아끼셨다면 그분도 아셔야 할 거 같아서요.”

“헹, 개새끼가 저승 가면 만나겠지.”

역시 그렇군. 몇 가지 퍼즐이 짜 맞춰진다.

이십 년 전. 갑작스러운 병증. 현 개방 방주의 죽어버린 사형.

“전대 개방 방주였던 사형분께서 묻히신 자리가 혹시 섬서입니까?”

“……그게 개새끼 치료하는 데 중한 정보더냐?”

“역시 그렇군요. 걸왕의 병증은 섬서사변 때 생긴 거군요. 생기를 빼앗겨서.”

삼백 년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영물이다. 그런 영물이 생기를 빼앗겼다면 노화로 인한 병증이 납득이 간다.

“흥, 그러면 적당히 안 아프게 뒈지는 침이나 놔 줘라. 이미 놈은 살 만큼 살았어. 고통 받을 만큼 고통 받았고.”

“그걸 정하는 건 당신이 아닙니다.”

“그럼 개 주인이 난데 그걸 내가 정하지 누가 정해?”

“걸왕은 신생을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마지막을 예감한 거겠죠. 그 마지막에 찾은 게 방주 당신이 아니라 신생이란 말입니다. 그래도 정말 당신이 걸왕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신생이 보고 싶고, 도망쳐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고, 보살피고 도와주고 싶어서. 늙은 개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아이를 찾아왔다.

하고 싶은 게 있는 존재는 삶을 갈망한다.

홍령을 통해 걸왕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생은 제게 걸왕의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 둘이 남은 시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노력할 겁니다.”

“흥, 뚫린 입으로도 그 개새끼를 완치시키겠단 말은 안 하는구나. 그거 하난 마음에 든다. 허나, 만에 하나라도 놈을 들먹여서 뭘 뜯어낼 생각은 말아라. 우린 거지야. 다 썩어빠진 동냥그릇이라도 원한다면 주겠다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곳 태양의원 수의 무한출장소에 오는 모든 동물은 치료비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걸왕이라고 해서 예외도 아니고요. 후원이라면 받고 있습니다만.”

“차라리 치료비를 받아라. 거지가 후원이라? 하!”

도개걸은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늙은 개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신생과 걸왕이 있는 방은 마당을 건너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늙은 개가 앓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릴 정도의 거리다.

그 소리에 도개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 얼굴에 드리운 감정은 회한이었다.

“걸왕이 미우십니까?”

그 표정을 보자 금왕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던 것, 동시에 그가 보였던 어떤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사형이 죽은 곳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개가 미우신 겁니까?”

일련의 대화로 걸왕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나는 물었다. 인간적으로 싫어하고 더는 얽힐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지만, 눈앞의 개방 방주에게서도 아주 오래된 마음의 상처가 느껴진 탓이었다.

가정폭력의 가해자인 부모는 그 또한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전생의 한 육아 전문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마냥 미워만 할 수는 없지. 저 개새끼가 물어 나른 새끼 거지가 몇인데.”

“걸왕이 그곳의 거지 아이들을 구했군요.”

“거지 아이라고 하지 마라. 이젠 다 너보다 나이를 먹었어. 그래 봤자 수십 명이지. 그날 죽은 거지가 만 명이 넘는데. 뭐, 그때 개새끼가 물어 나른 새끼거지가 지금은 다 개방의 중진이 됐지만 말이다.”

개방을 일컬어 십만 거지들의 문파라 한다.

그중 일만이 죽었다.

사형의 죽음이 아니라도 늙은 거지의 마음에 크나큰 한으로 맺혀 있을 만했다.

“그때 네놈 아비는 그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어. 헌데 평생을 알고 지낸 나나 사형에게 언질도 주지 않았지. 우리는 금가장이 왜 섬서에서 발을 빼나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그 일이 터진 게야.”

아버지가 마냥 정당하게 돈을 벌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전생에서 대기업의 이면을 수도 없이 보았으니까. 그중에서는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나 몰라라 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만 거지의 죽음이라니.

[……그 거지들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마요.]

그래. 그들은 섬서사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 일부지. 잊을 리가 없잖아.

“나는 네 놈이 탐탁지 않아. 그 교활하고 비열한 금가 놈의 자식이니까. 그 놈이 쌩하니 내뺀 내 제자 새끼를 싸고도는 것도, 그 어린놈이 네 놈을 스승이라 부르는 것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거 아느냐?”

“무엇 말입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사형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그 개새끼를 맡길 만한 게 너 뿐이라는 거 말이다.”

문득 나는 도개걸의 손을 보았다. 주먹 쥔 양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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