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만큼이나 멀었다. 장강의 물줄기를 타고 다시 무한 시내로 돌아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풍경을 구경하던 외백모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헌데, 너와 리는 썩 사이가 좋지 않은 거 같더구나. 내가 잘못 본 거니?”
“외백모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나요?”
“그래. 내가 먼 인척이라 너희 집과 그리 교류가 잦진 않았지만, 리와 간양이가 친히 지내는 걸 보면서 너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이가 안 좋을 만한 일이라도 있었니?”
사이가 안 좋을 만한 일이라.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나는 아파서 병석 생활을 했고 그 애는 무한 제일 미소녀 소리를 들으며 금가장 안팎으로 떠받들리며 자랐는데. 가족이라고는 해도 접점이랄 게 없다.
간양 누나와 비슷한 이유로 나를 싫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간양 누나가 나한테 호의적으로 돌아온 지금 리의 태도도 그래야 하지 않나?
“딱히 짚이는 건 없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쉽게 알 수가 있나요. 리에 대해서는 외백모께서 저보다 아는 게 더 많을걸요. 예를 들면 그 애가 그런 귀품을 받는 거래처가 어딘지라든가?”
“후후, 귀여운 시도였다만 나도 그건 잘 모른단다.”
“그만큼 귀한 물건을 취급하는 상단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금화상단의 물건을 구매했을 텐데요. 거래를 위해서든 선물을 위해서든.”
나는 매화탄을 구할 루트가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상대가 물건을 얻는 경로를 알아내야 했다. 그 경로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내게도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리가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꽤나 희귀한 물건만을 다루는 듯한데. 어쩌면 상단 같은 게 아니라 개인과 거래를 하는 걸 수도 있지. 리의 물건을 사는 이들도 소수의 거물들뿐이니까.”
“금왕공방의 물건이 아니라, 리의 물건이요? 공방의 총관만 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 대단한 사업을 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중개업을 하는 거 같더구나. 보통 인맥으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들을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게지.”
큰 형님에게서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났다더니, 그런 식으로 돈을 벌었나.
자본도 물건도 없지만 인맥과 지식이 있을 때 할 만한 사업이지.
금가장에서 자리보전만 했던 내가 리의 인맥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는 없으니 이 또한 별로 쓸모가 없다.
[조카님 쪽을 캐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아요. 일단 우리도 우리가 가진 걸 활용해보면 어때요?]
<태양의원―수의 무한 출장소>에 찾아오는 사람들 말이지?
내게 소중한 동물들의 진료를 맡기는 사람들은 권력이 있고 부유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무한에서 오래 산 사람이거나 장강을 타고 먼 상행을 다니는 이들이다.
이들에게서 정보를 잘 모아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면서 배에서 내렸는데, 의외의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 왕이를, 왕이 좀 살려주세요……!”
눈물범벅이 된 신생과, 신생의 품에 안겨 색색 숨을 몰아쉬는 지저분한 개.
지난번 나와 신생이 개방의 무한 지부장에게 쫓겨 위기를 맞았을 때, 지부장의 다리를 물어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던 그 개였다.
* * *
일단 서둘러 태양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는 도중 마차에서 개를 진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외백모는 우리의 심각한 표정을 보더니 자신은 다른 마차를 부르면 된다며 본인의 마차를 흔쾌히 내어주셨다.
[빈맥이 심해요. 심장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인 거 같은데, 나이가 많나? 일단 당장 급한 건 숨넘어갈 거 같은 호흡인데, 이 정도로 맥이 빠른데 숨이 가쁘다면―]
“―폐수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 어떻게 알았어요?!]
잊었어? 나도 신생이랑 같이 공부하고 있잖아. 임상 경험은 신생보다 더 많다는 걸 잊지 말라고.
“일단 기를 다스리는 침을 놓을 건데, 제대로 치료를 하려면 이 개의 내력을 알아야 해. 알고 있는 건 다 말해주겠니? 나이가 아주 많은 개인 거 같은데. 몇 살인지는 알고?”
“흑, 흐윽…… 몇 살인지는 몰라요. 아주, 아주 많다는 것만 알아요.”
“그래도 대충은 알 수 있을 거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어? 그때 강아지였니, 아니면 지금처럼 큰 개였니?”
“제가 알기론, 흑, 제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큰 개였을 거예요. 왕이가 폐허에서 울던 저를 물어왔다고 그랬어요.”
지금 신생의 나이가 얼추 십 대 초중반. 그때 이미 다 자란 개였다면…….
[많이 장수했네요.]
그렇지. 전생에서도 열 살을 못 넘기는 개가 적지 않았으니까. 소형견일수록 수명이 길고 대형견이면 좀 더 짧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 정도면 최소 중대형견일 테니까―
“흑, 그리고 사부님도, 사부님이 처음 개방에 들어왔을 때도 큰 개였다고…….”
뭐라고?
[사부님이라면 그 개방의 방주죠? 나이가 최소 예순은 넘어 보였는데요?!]
혼란스러웠다. 아마 이 얘기를 한 게 신생이 아니었다면 기억력을 의심했을 거다.
하지만 신생이 누군가. 단 하루 만에 9권짜리 의서를 독파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은 통째로 암기해버리는 머리를 가진 천재가 아닌가. 개방 방주가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다닐 정도의 오성(悟性)을 지녔단 말이다.
[그 방주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요?]
지금으로선 그게 제일 설득력 있긴 하지. 시답잖은 걸로 농을 칠 만한 위인이기도 하고.
“전대, 전전대 방주님하고도 함께 지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정확히는 몰라요. 사부님은 걸왕이 삼백 살 정도는 됐을 거래요. 영물이라고, 그래서 제가 꼬부랑 할배가 되어도 죽지 않을 거라고 그랬는데…….”
영물이라니.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림인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기까지도 시간이 꽤 걸렸는데, 이제 삼백 년을 넘게 산 걸로 추정되는 개방의 영물 개라.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아요. 분명, 개방에 타구봉법을 익힌 개가 있다고 그랬어요. 어느 문파나 하나쯤 있는 설화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삼백 년을 넘게 산 데다가 개방의 무공을 익힌 개. 그것도 개 때려잡다가 만들어졌다는 타구봉(打狗棒)을 개가 시전한다니. 허구도 이 정도로 겹치고 겹치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는 법이다. 얼마 전 개방의 무한 지부장인 윤모와 팽팽하게 대치했던 걸왕의 기세도 설득력을 더했다.
“일단, 나 말고 다른 의원들에게도 진맥을 부탁해봐야겠다. 그냥 개가 아니라 영물이라면 뭐가 달라도 다를 테니까.”
최 의원을 비롯해 개를 다뤄본 적이 있는 의원들을 불러 걸왕의 상태를 더블 체크하는 동안 신생에게 걸왕에 대한 다른 내력들을 물었다.
이중에서 삼백 년 넘게 산 걸로 추정된 생물을 치료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평소의 일에서 실마리 하나라도 잡는 게 현명했다.
“그래. 나루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가 갑자기 헐떡이면서 달려왔다고?”
“네…… 원래도 숨을 자주 헐떡거리긴 했는데 유독 심해 보였고, 숨이 넘어갈 거 같았어요.”
“원래도 라고 하면 대충 언제부터?”
“제가 기억하기론 칠 년쯤 전부터요.”
[그 정도면…… 여태 살아있는 게 신기한 수준인데요.]
“제가 도망치기 전에 가장 심했어요. 사부님하고도 자주 싸웠고, 아, 저 때문에요. 왕이가 저를 많이 감싸줬거든요. 수련이 너무 심할 때도, 왕이가 데려와 준 강아지를 제가, 제가…….”
“괜찮아,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다시 생각해도 개방 방주는 치가 떨리는군. 정반합의 존재만 아니었으면 다신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다.
“……그날 밤, 왕이는 사부님하고 엄청나게 싸웠어요. 왕이는 정말 강하거든요. 사부님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요. 사부님 다리를 물어서 옴짝달싹못하게 만들고 제 옷깃을 물어서 멀리멀리 데리고 갔어요. 그리곤 제가 도망칠 때까지 지켜봐 줬어요.”
무공을 쓸 수 있는 개라고는 하지만 걸왕이라는 이름은 너무 거창한 게 아닌가 했는데, 찬찬히 들어보니 오히려 그 이름이 약한 수준이다. 현 개방 방주와 맞짱 뜰 수 있는 실력이라니.
이 정도면 걸왕이 아니라 걸신(乞神)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걸왕이 쫓아와서 대치했을 때 무한 지부장 윤모가 망설임 없이 포기하고 돌아간 이유를 알겠다.
[만약 신생이 말한 걸왕의 나이가 진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의 상태는 노화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이 커요.]
노화.
그 어떤 신묘한 치료도 수술도 천하의 영단도 자연스러운 나이 듦으로 인한 죽음을 피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심장의 기능이 약해지면 폐에 물이 차는 일이 생겨요. 이뇨를 활발하게 하는 침을 놨으니 체수분이 빠져나가면 조금 나아지겠지만, 그 이상은…….]
“스승님, 우리 왕이 괜찮겠죠? 스승님은 최고의 의원이잖아요. 그죠?”
의원이 된 이후 가장 씁쓸할 때를 꼽으라면 지금 같은 순간일 것이다.
괜찮아지겠죠? 그렇게 물어보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그저 쓴웃음과 함께 진실을 말하며 증상을 완화시켜 드리는 거 외에 방법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 말이다.
“금왕공방에 다녀온 일이 잘 해결되면 좀 더 편하게 해줄 수 있을 거 같구나.”
청진기가 있다면 심장과 폐의 소리를 더 정확하게 듣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좋은 주사기가 있다면, 체수분을 전부 짜내서 폐에 있는 물도 빼내는 무식한 방법 외에도, 주사기를 찔러넣어 직접 폐의 수분을 빼내는 방법도 취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아까처럼 급한 상황에서는 쓸모가 있겠지.
“그건, 하지만…… 저는 왕이에게 아무것도…….”
이미 벌게진 눈으로 눈물을 참고 있던 신생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이의 작은 등을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신생을 부르고 있어요.]
응?
[걸왕 말이에요. 계속 신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최 의원에게 몸을 맡긴 채 잔기침을 계속하고 있는 걸왕은 고개만큼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끄응, 앓는 소리가 뭔가를 부르는 거 같기도 했다.
맞아. 반드시는 아니지만, 홍령은 동물들의 어떤 간절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막둥이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던 것처럼.
[아가야, 왜 우니. 배가 고픈 거니? 밥을 먹여야 할 텐데. 신생아, 신생아…… 이 조막만 한 게 언제 크나…….]
홍령은 한참 동안 걸왕의 말을 옮겼다. 영물이라 그런지 한 마디가 아니라, 꽤 긴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늙은 개는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신생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댔다.
지금도 어린아이긴 하지만 내 식구가 된 이후로 잘 먹고 쑥쑥 자라서 지금은 걸왕보다 큰 데도, 걸왕은 신생을 갓난아이처럼 걱정하고, 염려했다.
전생에서 내가 고등학생일 때 돌아가셨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도 걸왕처럼 나를 갓난아이처럼 대하고 걱정하셨다.
……치매는 할머니를 그 시절에 가둔 채 놓아주지 않았다.
삼백 살이 넘었다는 개, 걸왕도 아마 그런 과정에 있는 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