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리고 나도 홍령도 기계를 고치는 데는 별 조예가 없고 말이지.
[당신의 그 자산에는 도움이 될 만한 거 없어요? 지금이 기회인데!]
기회인 건 알지만 수차를 고치는 데 쓸 만한 지식은 없다. 내가 기술자였거나 하다못해 너튜브에서 그런 채널을 구독하는 사람이었으면 모르겠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라서 말이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게 고장 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손가락 빨면서 물러날 수는 없으니 일단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간양 누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이 수차는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였고 금가장에 있는 내내 고장이 나서 멈췄단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금왕공방의 물건들 중 이 수차를 이용하지 않는 것이 드무니 수차가 멈췄다면 당연히 금왕공방과 그 물건을 다루는 금왕상단이 난리가 났을 거고 그랬다면 나도 알았을 거다.
“으음, 지금까지는 고장이 나도 바로바로 수리가 가능했으니까. 강철로 된 축이 부러진 거라 다시 녹여서 붙이면 되거든. 문제는 당장 수리가 안 된다는 거지.”
“왜? 할 수 있는 장인이 없을 리는 없고, 재료가 문젠가?”
“정답! 엄청난 강도를 가진 놈이라 초 고열로 가열해야 녹는데, 그 화력을 낼 수 있는 숯의 재고가 떨어졌거든. 매화탄(梅花炭)이라는 건데, 그 재료가 되는 나무가―.”
“……섬서에서 자란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냥, 나도 금가장에서 자랐잖아. 병석에 누워서 주워들은 게 생각보다 많다고.”
매화탄이라는 이름에 설마 하며 찍어봤는데 진짜일 줄이야.
“그래. 그간은 아버지가 쌓아뒀던 엄청난 재고 덕분에 곤란할 일이 없었는데 그게 떨어졌단 말이지.”
“그럼 아예 수리를 못 하는 거 아냐? 거긴 불모지라며. 나무가 있을 리 없잖아.”
나는 정반합으로부터 들었던 섬서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말했다. 사람뿐 아니라 그 일대의 자연이 초토화됐다고 했었지. 동식물이 생기를 잃은 땅이라면 그 일대에 숯을 만들 수 있는 나무가 있을 리 없다.
“구할 수는 있어. 그걸 언제 받을 수 있느냐가 문젠데. 리야!”
“예, 공방장님.”
“어때, 저번처럼 구해올 수 있겠어?”
“예, 가능합니다.”
금리가 자신 있게 말했다.
“문제는 시일인데, 운이 좋다면 바로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양이 넉넉하진 않겠지만 임시방편으로 축을 붙이는 정도는 가능할 거예요.”
“끄응, 아예 녹여서 새로 만들어버려야 할 거 같은데.”
“그나마도 운이 좋을 경우의 얘기에요. 혹시나 싶어 물건을 부탁해두긴 했지만, 아시다시피 그곳에서 나오는 물산은 그 수량이 극히 적으니까요. 이번에 못 받으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어쩔 수 없네. 리가 거래하는 상단이 임시방편으로 붙일 양이라도 들고 오길 바라야지.”
[과연 금가장의 후계자 감이네요. 집에서 쫓겨났으면 금왕상단을 이용하는 건 아니란 얘기죠? 자기 인맥만으로 그 귀한 걸 구한다는 거네요?]
그렇지. 전에도 금리의 상재가 뛰어나단 얘기는 들었지만 초토화된 땅에서까지 물자를 끌어올 수 있는 수준인 줄은 몰랐다.
“이번 일로 납기가 더 밀리겠군요. 공방장님의 완벽주의 때문에 항상 조금씩 늦어지는 걸 감안해서 마감을 조금씩 당겨 알려드렸으니, 이번에 매화탄만 받을 수 있다면 납기에 늦지는 않을 거예요.”
“그, 그렇게까지 하고 있었어?!”
“금왕공방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게 제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때문에, 그 어떤 사유로도 막내 삼촌의 부탁은 받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금리가 정중하게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각 잡히고 예의 바른 인사인데 묘하게 기분이 껄끄러웠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여기서 더 금간양을 붙들고 늘어지면 넌 천하의 무례한 놈이다, 라고 말하는 거 같달까?
[저 조카님이요, 묘하게 당신을 싫어하는 거 같아요. 내 착각인가? 아까부터 영 싸늘하던 것이…… 지금도요, 일부러 선을 더 확 긋는 거 같고요.]
아니, 원래도 금리는 나를 싫어했어.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 고모랑 조카 사이긴 하지만, 공방에 틀어박혀 살던 간양 누나랑 어릴 때부터 상단을 따라다니던 금리랑 원래 친분이 있었던 이유가 뭐겠냐고. 둘 다 우리 집안에서 나를 싫어하는 대표주자였다니까. 간양 누나가 날 싫어했던 이유는 아는데 금리가 날 왜 싫어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서 거래처에 한 번 더 확인을 해봐야―.”
“만약에,”
금리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기 전 재빨리 말을 끊었다.
“만약에 내가 매화탄을 구해온다면?”
“엥? 태양이 네가?”
“응. 그것도 임시로 쓸 양이 아니라 당장 새 축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을 구해올 수 있다면,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해요.”
금리가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 쟤는 원래 날 저렇게 본다고. 내가 저한테서 뭘 빼앗아 간 사람처럼 노려본단 말이지.
“제 거래처를 제외하고 매화탄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없어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 네가 인맥이며 뭐며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나도 만만치 않거든? 네가 아버지 손녀라면 난 아버지 아들이야.”
[뭐예요, 진짜예요? 그런 걸 나한테 말도 안 해주고?!]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냥 블러핑이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느니 뭐라도 강짜를 놓아 봐야지.
두드리면 열린다느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느니, 그런 말은 싫어하지만. 급할 땐 어쩔 수가 없다.
“……태양의원의 가면의룡은 내기와 대결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의원을 차린 장원은 물론 무당의 청운진인과 겨뤄 큰 보상을 얻어냈다지요.”
그 소문이 그런 식으로 퍼졌나?
“만에 하나.”
눈을 피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던 금리가 나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걸 구해오신다면, 좋아요. 제가 매화탄을 가져오기 전까지 한 줌의 매화탄도 가져오신다면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주문을 받아드리죠.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말을 뚝 끊어? 긴장되게.
“제 사람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어? 뭐?”
[엥?!]
“간양 고모처럼 제게 태양의원의 관리 권한을 넘겨달란 얘깁니다. 금태양이라는 의원이 어떤 환자를 볼지부터 의원의 수익성과 의약당이라는 곳의 제품 관리까지, 전부.”
“……거기에 네 지분을 받아가고?”
“대가가 적지 않은 내기이니 금왕공방보다는 더 받아낼 겁니다.”
금리가 방긋 웃었다. 예쁜 얼굴에 미소까지 지으니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됐지만, 그 미소 때문에 오히려 더 식은땀이 났다. 카드값 명세서를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봤자 그 압박감은 그게 그거인 기분이랄까.
[취소, 절대 취소예요. 조카님, 절대 당신 큰 형님 딸이 맞아요. 출아법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홍령이 출아법은 어떻게 아는지는 둘째 치고, 금리는 내가 승낙 의사를 표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거래처에 연락을 해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건 내가 가부 결정을 안 했다고 뻗대도 안 될 게 분명했다.
애초에 내가 매화탄을 구해오면 되지 않겠냐고 나선 거부터가 낙장불입이긴 했지.
“동생! 힘내라! 넌 할 수 있어! 네가 제안한 이거는 내가 좀 연구해볼게! 어차피 축을 고치기 전까진 할 일도 없으니까! 아, 아까 왼손잡이용 뭐가 필요하다고 안 그랬나?”
“응, 왼손잡이용 검이랑 의료도구.”
“검은 이미 만들어둔 것도 있을걸? 솔직히 난 왜 전용을 찾는지 이해가 안 가. 다리 하나 없는 나도 잘 사는데, 있는 오른손 쓰면 될걸. 굳이?”
……갑작스러운 금리와의 내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이걸 가지고 지금 간양 누나랑 말다툼 하고 싶진 않다.
“그럼 검이라도 오늘 받아갈 수 있을까? 맞춤이 좋긴 하겠지만 그것도 수차를 돌리기 전까진 불가능하겠지?”
“그건 혁이 공방에 가봐. 그 녀석이 우리 공방이 자랑하는 제일의 검장이니까!”
수확이 아주 없지는 않군. 다른 건은 제작을 보장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여기까지 온 수고를 보상할 건 있어서 다행이다. 당당 녀석을 격려할 물건이 필요하기도 했고.
“왼손잡이용 검이라. 네, 있습니다. 이쪽에서 보시겠어요?”
남궁혁의 공방은 금왕공방 제일의 검장이라는 이름답게 벽면 전체에 다양한 도검이 전시되어 있었다. 태양보도와 비슷한 길이의 짧은 단검, 단도들도 있었다.
“호신용으로는 그만한 물건이 없죠. 찾으시는 건 이쪽인데. 혹시 좌수검을 쓸 분의 체격이?”
“아, 미안합니다. 딱 요만 한 키의 녀석이 쓸 건데요. 팔 길이는 이 정도?”
“흐음, 그렇다면 묵직한 중검은 어울리지 않겠군요. 이 정도가 괜찮을 거 같습니다.”
남궁혁이 내민 것은 척 봐도 날렵해 보이는 검이었다. 당당의 검법과도 어울릴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홍령?
……홍령?
뭐 해?
[아, 미안해요. 구경하느라 넋이 나갔어요.]
귀신에게서 넋이 나가면 어떡해. 정신 차리라고.
[뭐, 그 검은 괜찮아 보여요. 사천당가의 검과 어울리겠어요.]
“이거면 되겠네요. 얼마죠?”
“그냥 가져가세요. 좌수검의 검을 만들 때 시범작으로 만든 거라, 품질은 부족하지 않지만 쓸 사람이 마땅찮거든요.”
“좌수검의 검을 만들었다고요?”
내 말에 남궁혁은 멋쩍게 웃었다.
“그분의 옛날 검은 어느 장인이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분이 쓰고 계신 검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좌수검에게 그 검을 만든 장인이 누군지 물어보는 걸 또(!) 까먹었는데, 이 사람이 그 장인이었다니.
[정반합 회합 때는 솔직히 그런 걸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긴 했죠.]
“감사합니다. 이걸 쓸 녀석도 기뻐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솔직히 쓸 사람이 없어서 다시 녹일까 하던 참이라. 좋은 주인을 만나서 그 기량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무 대가도 없이 이런 명검을 받기는 좀…….”
남궁혁이 시범작이라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금왕공방 제일 검장의 검인데.
“정말 괜찮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뛰어난 의원이시라고 들었거든요. 아플 때 찾아가도 되겠죠? 장인들이 은근히 크고 작은 병을 달고 살거든요.”
“물론입니다.”
훗날 큰 병이 생기거나 수술을 해야 하면 그걸로 검 값을 대신하기로 하고 나는 금왕공방을 떠났다. 작은 수확이 있었고 큰 숙제가 생겼다. 해내지 못한다면 의원으로서 나의 자율성과 태양의원의 운영까지 간섭받게 되겠지. 구두로 한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그 앞에 간양 누나도 있었고 외백모도 계셨으니, 내기에 졌는데 금리의 관여를 거부한다면 내 평판은 곤두박질 칠 거다.
최악의 경우는 면할 방도를 세워두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