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15화 (115/350)

115화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쌩쌩 들어왔다.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냉랭한 표정을 짓고 들어와 묵직한 서류철을 금간양의 옆에 내려놓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금 의원님. 무한에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여기서 뵐 줄은 몰랐군요.”

“어…… 그래, 오랜만이다.”

얘가 대체 왜 여기 있지? 어색해 죽겠네.

[뭐야, 누군데요? 이렇게 엄청나게 예쁜 여자애랑 아는 사이라고요? ……둘이 기류가 묘한데, 혹시 전 애인이라든가? 어머어머, 눈빛 봐. 설마! 당신 약혼자예요?!]

뭔데. 대체 그 한 순간에 어디까지 가는 건데.

[그렇잖아요? 당신 나이도 있고, 게다가 금가장 막내였잖아요. 몸이 많이 아팠다고는 해도, 그런 게 또 통속소설 단골 소재잖아요. 천형의 병을 타고나서 가면으로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부잣집 도련님이 집안이 어려운 미인과 정략결혼을 했는데, 짜잔! 신부가 첫날 밤 두려움에 가면을 벗겼더니 절세 미남이더라!]

의원에서 대기 중일 때 환자들 심심하지 말라고 인기 있는 통속소설이나 무협지 몇 권을 비치해뒀더니 그걸 본 모양인데, 절대 아냐.

[그러면 뭔데요? 저 차가운 기류는? 당신이 병환이 있다고 저런 미인을 냉정하게 거절한 게 아니라면 대체?]

가만히 있어 봐. 그럼 알게 될걸.

홍령이 얼토당토 않는 얘기를 하는 동안 그 애는 나를 지나쳐 외백모님께까지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간양 누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어제까지 마감이었던 건은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왕부에서 주문한 휴대용 시계 열 점을 삼 일 후까지 주셔야 합니다.”

“고작 삼 일?!”

“마감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건 공방장님이에요.”

“아니, 그렇긴 하지만! 금 총관, 이건 너무해!”

[흐음, 총관이군요. 그런데 금 씨라고요? 친척이에요?]

친척 중에서도 꽤 가까운 친척이지. 그러니까 그런 관계 아니야.

[하긴, 친척 간 혼인은 드물지 않으니까요. 재산이 유출될 가능성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죠. 무림세가에서도 무공이 새어나갈까 봐 가까운 친척끼리만 결혼하는 곳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관계 아니라니까!

“게다가 태양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고. 봐봐, 엄청나게 재밌어 보이지 않아?”

“막내 삼촌 부탁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습니다. 현재 금왕공방의 주문은 약 십 년 치가 밀려 있고, 그중에서도 공방장님의 주문은 약 삼십 년 치가 밀려 있어요. 새 주문을 받으려면 일단 그거부터 해결하시죠.”

“사, 사, 사, 삼십 년?! 내 주문이 그렇게 밀렸어?!”

“그나마도 지금처럼 마감을 지키셨을 때 얘기고요. 그러니까 새 주문을 받을 생각은 마세요.”

금간양은 총관의 말에 얼이 나갔다. 그리고 여기 또 얼이 나간 귀신이 하나 있었다.

[삼촌? 설마, 얘가 조카예요? 이렇게 큰 조카가 있어요?!]

내가 그랬잖아, 그런 관계 아니라고. 애초에 내 형제가 몇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위로 일곱 명이 있는데, 나랑 동갑인 조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잖아.

[아니, 그렇지만요?! 이렇게 예쁘기까지 한데?!?]

홍령 너, 방금 그건 좀 그렇다? 내 조카가 예쁘면 뭐 어때서?! 진양 누님도 아름답잖아!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하지만요!]

혼란에 빠진 귀신은 내버려두자. 이런 생산성 없는 얘기를 계속할 상황은 아니니까.

“저기, 금 총관?”

“네, 말씀하시죠. 금 의원님.”

“내가 꼭 필요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좀 안 될까? 비용은 지불할게. 이런 걸 구현해 낼 수 있는 곳은 금왕공방, 그리고 간양 누나밖에 없어서 그래.”

“규칙은 규칙입니다. 정말 필요하다면 삼십 년도 기다리실 수 있겠죠. 아니면 그 기간 동안 공방장님만 한 기술자를 키워내는 것도 추천 드립니다.”

칼 같네. 바늘 하나도 안 들어가겠어.

이해는 간다. 이런 공방이야말로 한번 예외를 만들면 한도 끝도 없이 새치기가 생겨버릴 테니까.

하지만 이쪽도 삼십 년이나 기다릴 수는 없단 말이지.

“하, 하지만~! 저번에 항주에서 들어온 주문은 원래 그 순서가 아니었잖아! 네가 순서를 옮긴 거 아니었어?”

“공방에서는 총관으로 불러 달라 부탁드렸어요, 공방장님. 그리고 그 건은…… 그건 예외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만, 외부인이 있는 곳에선 말씀드릴 수 없어요.”

“듣다 보니 좀 너무하구나.”

외백모가 끼어들었다.

“외부인이라니. 나야 피도 안 섞인 남이라지만 태양이 얘는 네 삼촌이잖니. 건양이가 널 그렇게 가르치든?”

[자, 잠깐만요! 저 미인이 그, 그, 그! 당신 큰 형님 딸이에요?!]

그래.

이름은 금리. 우리 형제의 맏이인 금건양의 맏이이자 내 첫째 조카다.

[말도 안 돼……. 나는 당신 형제 중에 누구 딸일까 했거든요. 그 전장 하는 누님은 나이가 안 맞을 거 같았고, 내가 모르는 사람 딸인가 했는데. 적어도 그 큰 형님 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잖아요! 인상이 전혀 다르다고요!]

형수님이 워낙 미인이시거든. 그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지. 형님을 닮은 부분도 많긴 하지만.

“아버지는 말하셨죠,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요. 외백모님도 제가 왜 여기서 총관으로 일하고 있는지 알고 계실 텐데요. 그리고 제가 이곳에서 일하는 건, 핏줄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핏줄이 아니었어도 저는 금왕공방의 총관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럴 능력이 되니까요.”

금리는 당당하게 말했다.

“막내 삼촌께서는 금가장을 나가 태양의원이라는, 금가장과는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일을 시작하셨죠. 저는 삼촌의 그런 의지를 존중합니다. 제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드리는 건 삼촌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겁니다.”

[청산유수네요. 잘 들어보면 틀린 말도 아닌 거 같고.]

금리의 그 말에 외백모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우리 모두 꿀 먹은 듯 가만히 있자 금리는 간양 누나에게 서류철을 안겨주었다.

“열 개의 시계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요구했으니 꼼꼼히 읽어보고 제작해주세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그리고 금리는 나와 외백모에게 흠 잡을 데 없는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간양 누나가 나를 싫어해서 주문을 넣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정작 그 산을 가볍게 넘고 나니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으음, 미안하다! 리가 저러면 나도 주문을 받아줄 수가 없어. 우리 일정은 리가 다 관리한다고.”

“안 그래도 그게 좀 궁금했는데. 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금왕상단은?”

나야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집안의 사업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금가장의 핏줄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의 일을 배운다.

소림의 무승이 된 둘째 형님이나, 공방장을 맡고 있긴 하지만 본질은 장인인 간양 누나처럼 다른 쪽으로 소질이 보이면 적극 지원하지만, 그 외에는 금가장의 일을 맡는다. 보통은 그쪽으로 재능이 있는 편이기도 하고.

금리는 어릴 때부터 셈에 능숙하고 상재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데다, 맏형의 맏이라 아버지도 은연중에 큰형님 다음 대의 금가장은 금리가 맡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열다섯도 안 된 나이에 상행을 책임지게 하거나 장부를 맡기는 등 많은 기대를 보였고, 내가 금가장을 떠나기 전에는 금왕상단의 행수였는데―

“아, 몰랐구나? 쟤 너 집 나가고 나서 큰 오빠가 한 푼도 안 주고 집에서 쫓아냈잖아.”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누가 누굴 쫓아내?

[세상에. 당신 큰 형님, 탈모가 생겼다더니 아예 노망이 났나 봐요.]

아니, 그럴 나이까진 아니지만. 정말로 노망이 났나 싶을 정도긴 하다. 자기 다음으로 금가장을 이을 후계자를 왜 집에서 쫓아내?

“뭐 들어보니까, 금가장을 이어받고 싶으면 자기 힘으로 차지하라나? 그 인간 가끔 좀 이상할 때 있잖아. 그래서 나랑 의기투합했지!”

“말은 바로 하려무나. 리가 짐 싸들고 와서 오늘부터 금왕공방의 폐단은 다 뜯어 고쳐줄 테니 새경을 달라고 하지 않았니.”

“그게 그거죠! 뭐, 난 원래도 리랑 친했고, 리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아니까. 덕분에 금왕공방도 탄탄일로를 걷고 있다고! 전이랑은 차원이 다른 명성을 얻고 있단 말씀!”

“차원이 다르다면 어떻게? 전에도 금왕공방의 명성은 비교 불가, 범접불가였잖아?”

그에 대한 답은 외백모가 주셨다.

“품질도 뛰어난데 이제는 납기까지 빠르게 지킨다고 소문이 났지. 그렇다고 품질이 전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격은 올렸다고 하는데 주문은 더 넘친다더구나. 리가 아주 수완이 좋아.”

“……혹시 리가 받는 새경이, 정해진 금액이 아니라 수익 대비 삼 할 그런 건가요?”

“어떻게 알았니? 삼 할이나 되진 않지만, 처음 계약했을 때에 비해 많이 올려주었다고 들었는데.”

“맞아. 리가 새 주문, 그것도 장인들이 흥미 있어 할 만한 데다 단가도 비싼 주문을 많이 잡아 와서 양심상 비율을 높여줬지!”

일 났네.

안 그래도 금리의 칼 같은 태도에 바늘 하나 안 들어가는 상황이었는데 바늘이 뭐야, 티끌도 안 들어가게 생겼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간양 누나를 진득하게 설득하거나, 아니면 다른 장인들을 대거 꼬셔서 금리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만드는 방법뿐이었는데.

[금왕공방 장인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은 황제도 못 꺾을 정도랬죠? 당신 조카가 거기에 또 다른 명성을 얹어줬으니, 그녀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따르겠군요.]

진짜 난공불락이다. 머리를 굴려 봐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간양 누나나 금리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져 내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하는 그런 정도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 무리겠는걸.

[그런 일이 쉽게 벌어질 리도 없고요. 그렇다고 해도, 당신 조카 성격에 구명지은은 구명지은이고 공방의 일은 별개입니다, 라고 할 거 같은데요.]

홍령 네 생각도 그렇지?

답도 없고 착잡하기만 했지만 함부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진짜 금리 말처럼 어디 가서 될성부른 장인 떡잎을 주워 키울 생각인 게 아닌 이상에야―

우지끈―

그때 밖에서 범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금간양의 눈빛이 변했고 내가 어?! 하는 사이에 그녀는 신발도 신지 않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구나.”

“저희도 가보죠.”

[저 안쪽에 문제가 생긴 거 같아요. 수차라고 했나요? 그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요.]

시야가 넓은 홍령이 일러주는 대로 안쪽으로 들어가자 얼굴이 시뻘게진 장인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다.

수차였다. 거대한 톱니바퀴와 기계들을 돌아가게 하던 그 수차가 멈춰 있었다.

“아, 미치겠네! 올해만 몇 번째야!”

“방장, 이거 또 얼마나 걸려? 우리 지금 한창 중요한 거 하던 중인데!”

“총관님. 우리 이거 멈추면 마감 못 맞추는데, 괜찮아요?”

바쁘다며 자리를 떴던 금리도 달려와 있었다. 간양 누나와 달리 무공을 익히지는 않은 몸이라 숨이 차 빨개진 얼굴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갔던 금간양은 거대한 수차 위에 올라가 신중하게 구조를 살피고 있었다.

“또 축이 부러졌어. 해체해서 다시 만들고 조립해야 할 거 같아.”

금간양의 말에 주변에 모여들었던 장인들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만 몇 번째냐 그러더니 다들 익숙한 상황인지, 얼굴이 거무죽죽해지긴 했지만 서둘러 작업을 중단하고 살릴 수 있는 재료를 살리는 방향을 논의하며 흩어졌다.

[……병이 나서 쓰러지긴 했는데, 그게 사람은 아니었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