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09화 (109/350)

109화

이곳 중원 무림은 내가 살던 전생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그중 하나가 이 위패를 모시는 문화다. 드라마를 통해 옆 나라에서 집에 작게 사당을 만들어 놓고 죽은 자의 위패를 모시는 풍습을 구경하긴 했지만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의미 정도는 안다. 나도 여기서 산 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나기도 했고.

그래, 위패를 가져오라는 건 무덤을 파오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아니지. 무덤까진 좀 심했나? 납골당에서 납골함 가져오기 정도? 둘 다 똑같긴 하지만 뭔가 심정적으로 관을 파내는 것보단 납골함이 좀 낫긴 하군.

젠장,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들어서 정신이 혼미하다.

“위패 이전에 이놈은 금가장에 들어갈 수단부터 강구해야 해. 황하 그 시부럴 놈이 명절 동안 향화객을 일절 안 받겠다고 했거든.”

“뭐라고요?”

“아, 못 들었냐? 하긴 나 오기 직전에 들어온 소식이었으니 네놈이 모를 만도 하구나. 어쩌냐? 이제 들어가는 거부터가 힘들어져서?”

미치겠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한에 오자마자 금가장부터 쳐들어갈 것을.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에요?]

아버지 사당에 향을 피울 손님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거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심각하지. 내가 가족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문제가 안 될 부분이지만…….

“뭐, 그러면 이 자리는 이렇게 정리된 거지? 야, 거지들아! 가자!”

어울리지 않게 탁자에 앉아서 술을 마셨더니 어깨가 결린다며, 도개걸은 처음 나타났던 대로 다시 절뚝거리며 거지들을 이끌고 나갔다.

좌수검도 나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일이 성사되면 굴다리 밑 무한 지부장을 통해 연락하게.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대에게 합에서 가하는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말고.” 하고는 저를 따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무인들을 데리고 나갔다. 나머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도 우리가 앉은 탁자를 한 번씩 보고는 문을 나섰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마지막 사람이 문을 나서기 무섭게 밖에서 대기 중이었을 표사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와 내 안부를 살폈다.

“괜찮아요, 괜찮아. 걱정 말고 돌아가죠. 마차 대기 중인 거 있죠?”

“예, 물론입니다. 가시죠.”

기싸움을 하느라 피곤해서 도저히 걸어갈 기력이 없었다. 그건 창천도 마찬가지였는지, 처음 올 때 주루에 가는데 웬 마차냐고 투덜거리던 것과 달리 얌전히 마차에 올라탔다. 다그닥, 다그닥. 새벽이 깊어 텅 빈 새벽의 거리를 달리는데 모두가 말이 없었다. 나도, 창천도, 그리고 홍령도.

* * *

다음 날 아침.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담…….”

피곤해서 오자마자 잠들었던 덕인지 다행히 잠은 설치지 않았다. 전생의 꿈을 또 꾸면 어쩌나 싶었는데. 푹 자고 일어나니 앞으로 닥친 일이 막막했다.

“하, 미치겠네. 큰 형님도 진짜. 자식이 아버지 사당에 향 한 번 피우러 가는 걸 그렇게 막을 일이야?”

장원에 돌아오자마자 장원지기에게 부탁해 확인해봤는데, 금건양이 향화객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벌써 무한 시내에 파다하게 얘기가 퍼졌단다.

부처님을 모신 불전도 아니고 개인에게 향화객이 얼마나 있겠냐 싶지만, 의외로 아버지의 경우 그 사당에 향을 피우면 금전운이 들어온다는 미신 같은 게 퍼져있는 모양이라 호북 일대에 돈 좀 만진다는 상인들은 물론 서민들도 자주 들르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고.

[무한에 온 상단주나 전장주들이 꼭 들러야 하는 필수 과정이라고 할 정도면 말 다 했죠.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긴 해요. 관운장이나 제갈공명도 신처럼 추앙받잖아요. 당신 아버지는 그럴 만한 명성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당장의 막막한 상황 그 이상으로 걱정했던 홍령은, 생각 이상으로 멀쩡했다.

[뭘 그렇게 봐요? 나 괜찮다니까요. 솔직히 그렇잖아요. 난 이미 죽었는걸요?]

그걸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게 더 신경 쓰인다고.

[정 신경이 쓰이면 머리를 좀 짜내 봐요. 우리가 그 비밀들을 전부 들은 것도 아니잖아요. 솔직히 뭐가 안 괜찮기에는 아직 제대로 아는 것도 없다고요.]

그건 그렇긴 하지.

화산파의 마두가 일으킨 참변, 섬서사변. 그 과정에 대해서도 제대로 못 들었고, 무당과 아버지가 이에 일조한 걸 넘어서 아예 뒤에서 조작했다는 것도 어떻게, 무엇을 조종한 건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틀린 걸 수도 있다. 숙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면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 외엔 답이 없죠. 뭐 없어요? 거기 들어갈 만한 다른 방법?]

“향화객을 제한한다는 건 어중이떠중이를 받지 않겠다는 거지. 무림문파들이 봉문을 하는 것처럼 모든 손님을 거부한다는 건 아닐 거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금가장의 코어가 뭔가, 금왕상단이 아닌가? 상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명절이면 금가장에 인사를 올리러 오는 거래처 사람들과 관부의 사람들이 수백이다.

수십도 아니고 수백.

나 하나 못 오게 하려고 그들이 오는 것까지 막지는 못하겠지. 그랬다간 당장 앞으로 금가장의 비즈니스에 영향이 갈 테니까.

그걸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엣 치!

[으아악! 쟨 왜 또 여기 들어온 건데요!]

언제 온 건지 금동이가 내 발치에서 재채기를 해댔다. 몸을 일으켜 녀석을 잡고 살피자, 전날에 비해선 확실히 눈꼽이며 눈의 충혈 등이 덜해 보였다.

“콧물도 괜찮네. 어제는 줄줄 흐를 거 같더니. 오늘도 침 맞고 약도 먹어보자, 알았지?”

야옹― 녀석은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야옹거리곤 내 품에 파고들어 고롱고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이렇게 소리를 내는 걸 전생에선 골골송이라고 불렀는데, 사람의 심신에 안정을 주는 파장과 같은 파장을 가지고 있어서 수면용 ASMR이나 애니멀테라피 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나도 이렇게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골골송을 들으면 뭔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으려나―

“금동아, 여기 있니? 스승님, 금동이 여기 있나요?”

문이 살짝 열리더니 신생이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물었다. 내 품에서 그새 잠든 금동이를 가리키자 신생이 난감한 얼굴을 하곤 들어왔다.

“스승님은 피곤하신데. 얘는 왜 여기 와서 이런대요. 금동아, 이리 와. 가자.”

“아냐. 괜찮다. 본 김에 검진도 해보고 침도 놓는 거지.”

신생에게 침구통을 갖다달라고 하고 나는 잠든 금동이의 맥을 짚어본 후 그대로 침을 몇 방 놓았다.

[하여간 신기한 짐승이에요. 어제 침놓을 때 얌전한 것도 그랬지만, 자면서 침을 놓는데 미동도 안 하고 잘 자잖아요.]

그냥 잘 자다뿐일까? 침을 놓는데 골골거리기까지. 자기 몸에 좋다는 걸 아는 건지. 하여간 신기한 녀석이었다.

“맞다. 어제 손님이 오셨었는데요.”

“손님? 누구?”

어제 정반합의 일 때문에 약속은 전부 취소했는데. 깜빡한 약속이 있었던가?

“장주님 소개로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스승님 주무시고 계셔서 내일 와달라고 돌려보냈는데. 오늘 오실지도 모르겠어요.”

“누님 소개라…….”

[약초 종자를 구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개방 무한 지부장을 만나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는데, 도개걸의 등장으로 완전 파투가 났으니까. 누님도 어제 일을 들었을 테니 그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은 건 들었겠지.

“금 의원, 안에 계신가? 어제 그 손님이 오셨는데.”

때마침 최 의원이 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정원의 정자로 안내를 부탁하고, 몸을 정돈한 후 나도 그쪽으로 향했다.

[꽤 부유해 보이는 부인이네요. 어디 상단주인가? 그냥 졸부 느낌도 아니고 돈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부인이에요.]

문을 열기 전, 손님에 대한 홍령의 평가는 그랬다. 돈 많은 부인이라, 이 무한에 돈 많은 부인이 한둘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의외로 그곳엔 내가 좀 아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태양아. 아니지. 이제 금 의원이라고 불러야 하누?”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외백모님.”

[외백모면, 당신 어머니 형제의 아내? 그런데 당신 어머니는 금가장의 하녀였다면서요?]

그렇지. 이분은 내 친어머니의 인척이 아니라, 아버지의 정실부인, 금가장 안주인의 인척이다.

[그러고 보니 그분은 어떤 분이에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당신 큰 형님을 싸고돌아요?]

글쎄,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분이라 나도 잘 아는 게 없어서. 아마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내가 아버지 아들로 인정받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눈앞의 이분은 내 외백모인 동시에, 금화상단의 주인인 사람이다. 이름만 들으면 얼핏 금왕상단의 자회사나 계열사 같은 상단이 아닐까 싶지만 엄연히 별개의 곳으로, 무한에서 제일 유명한 보석상이다.

[아하, 저 부유함이 이해가 가네요.]

금왕상단은 보석 같은 귀중품도 다루긴 하지만 그쪽이 주력은 아닌지라, 귀금속에 관해서는 금화상단에 한 수 접어 준달까. 아무튼 그쪽 방면으로는 상당한 힘이 있는 분이다.

다만…….

[약초 종자 때문에 온 건 아닌 거 같죠?]

그렇지. 보석을 심어서 약초가 자라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약간 기대했는데.

그렇다면 대체 이분은 뭐 하러 온 거지? 나랑은 그냥 데면데면한 관계인데.

“뭐, 오늘은 가족으로 온 것이 아니니 말이다. 내 진양이한테 얘기를 하나 들었거든. 그래, 저기 왔구나.”

[히익! 아까 재워놓고 오지 않았어요?!]

아까 침을 놓고 방에 재워놓았던 금동이가 언제 깼는지,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라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대.

“그 아이, 확실히 전보다 나아 보이는구나.”

“네. 누님이 걱정을 좀 하시기에 제가 좀 봐주었어요. 약한 감기 같은 건데 침을 맞고 약으로 몸을 보하면 완치될 거 같더라고요.”

“그래. 동물을 볼 줄 아는 의원은 실로 드문 편이지. 해서 말인데…….”

외백모는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동그란 보석함 같은 거였는데, 안에서 뭔가 소리가 났다. 금동이가 그 안에 든 것에 무척 관심을 보였다.

뚜껑을 열자―

찍― 찍쮝!

[쥐? 쥐 아니에요?!]

그 안에는 흰 털을 가진, 제법 귀엽게 생긴 쥐 한 마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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