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08화 (108/350)

108화

좌수검의 말에 창천의 눈이 떨렸다. 내가 생각해도 강력한 조건이었다. 부모의 원수가 무당파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실제 흉수가 누구였는지가 녀석에게는 더 와닿을 테니까.

“그렇게 얻은 정보를 이 녀석과 공유하는 건 안 되겠지.”

“뭐 되도 않는 걸 묻고 그러나? 당연히 안 되지.”

창천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고 도개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저건 천금을 줘도 못 살 정보야.”

“낄낄, 또 모르지. 천금을 주면 팔지도?”

“지금 전장에 가서 천금을 가져오면 됩니까?”

“갔다오든가. 네놈이 다녀올 동안 우리는 사라져 있겠지만.”

나와 도개걸이 시답잖은 농을 주고받는 동안 창천의 미간에 골은 더욱 깊어졌다.

뭘 고민하는 거람. 당연히 들어가야지.

내게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고 해도 창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내게도 정반합과 어느 정도 끈이 생기는 셈이고.

따로 얘기할 시간이라도 달라고 해야 하나? 이럴 때 전음을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해봐요. 오래는 힘들어도 몇 마디 정도는 될 거예요.]

어, 정말?

[딱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 같아서 가르쳐주지 않았지만요. 내공을 집중하고, 내게 말을 걸듯이 창천에게 말을 걸어 봐요.]

홍령이 하라는 대로 해봤다. 야, 창천. 들리냐?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그 순간 창천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봤다.

[뭐지? 전음을 보낼 수 있었나?]

다행이다. 잘됐군.

[뭘 고민하고 그래? 당장 한다고 해. 이런 기회가 어딨어?]

[하지만, 네가 없으면 난 자신이 없다.]

……아무래도 내가 같이 나오길 잘못한 거 같다. 개한테도 자립심을 키워줘야 하는 건데. 말을 못 알아듣고 뭘 이해를 못 할 때마다 내가 나서서 설명을 해줬더니 분리불안이 됐잖아?

“그래서 어쩔 거냐? 술도 떨어져 가고 밤도 깊어져 가는데. 이봐, 외팔이. 이 덜떨어진 녀석한테 우리가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있나?”

“방주의 말대로, 슬슬 결정해줬으면 좋겠군.”

젠장. 창천의 망설임 때문에 녀석의 가치가 실시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반합이 녀석을 마스코트로 내세울 생각이든 아니면 다른 이들처럼 일원으로서 받아들이든, 우유부단한 성격은 같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썩 선호되는 건 아니니까.

“창천은 여러분과 함께할 겁니다.”

“이봐, 그걸 왜 네가 결정―.”

내가 등 떠밀어주지 않으면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그러고 있을 게 뻔하니까 그러지. 그럴 땐 아예 남이 정해버리는 쪽이 낫다.

“그리고 저도, 정반합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 기회에 창천의 분리불안을 고쳐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기엔 물가에 애 내놓은 기분이라 불안해서 안 되겠다. 나랑 함께라고 한다면 녀석도 좀 제대로 처신하겠지.

“금 의원.”

“예, 좌수검. 말씀하세요.”

“우리는 장난하는 게 아닐세.”

“저도 장난이 아닙니다.”

좌수검은 조용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타입이 아니긴 하지만…….

“무당과 썩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이나, 무당의 저질스러운 행사에 대항하고 있는 부분은 말씀드렸고. 그 외에도 저는 정반합에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들어는 보지.”

허나, 좌수검은 그 말을 작게 내뱉다가 속으로 삼켰다. 떨리는구만.

“첫째. 여러분에 비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저도 아버지랑 꽤 감정이 좋지 못해서요. 제가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유산 한 푼 못 받고 쫓겨난 건 다들 아시죠?”

“그건 맞는 말이다, 외팔아. 거 뭐냐, 장례식에도 참석 못 했다 들은 거 같은데. 윤모가 그 집 장례식에 푸지게 얻어먹어서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지.”

“참석 못 했다 뿐일까요. 가는 길에 얼굴 비치지 말라고 제 방에 갇혀 있었는데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서가 아니고 큰 형과 갈등 때문이었고, 집을 나온 건 내 선택이었지만, 밖으로 드러난 부분에 있어서는 거짓이 없다.

“타고나길 천형의 병을 타고 나서 돈 들어가는 귀신에, 어디 제대로 내세울 수도 없는 얼굴을 가져 가지고 알게 모르게 구박도 많이 받았고요. 솔직히 어디 가서 내가 아버지 아들이라고 말하기 싫거든요. 그래서 제 의원 이름도 금왕의원이 아니라 태양의원이고요.”

나는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가면을 살짝 벗었다 다시 썼다. 내 얼굴을 본 이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도개걸은 깜짝 놀랐는지 들고 있는 술병을 놓칠 뻔한 걸 겨우 다시 붙들었다.

“그런 제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누군가한테 적대시 당하고, 잘못하면 복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솔직히 싫어서요. 그러니까 나도 알아야겠습니다.”

먹힐까?

이들이 누굴 적대하는지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척 연기를 할 것을. 아까 아버지 얘기가 나왔을 때의 태도가 인상 깊게 박혔다면 먹히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를 들어보지.”

안 먹혔군. 예상했지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어요.]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하잖아.

그리고 다짜고짜 이유를 들이대는 것보단 한 번 이렇게 쿠션을 깔아야 다음 이유가 설득력 있게 들릴 테니까.

“아까 화산에서 마두가 나왔고, 그 때문에 섬서가 큰 참변을 당했는데 그 뒤에 사실 무당과 금가장이 있다고 하셨죠?”

“맞네.”

“그렇다면 화산은 큰 누명을 쓴 거겠군요. 화산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화가 많이 나겠어요. 진실을 밝히고 싶을 테고요.”

“그대가 화산과 연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마 방주께서는 아실 거예요. 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가 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지 않으셨나요? 제 의술의 뿌리에 대해서 말이에요.”

“……설마?”

도개걸이 긍정하기도 전에 좌수검의 표정이 먼저 변했다. 하긴, 내가 좌수검의 팔을 수술했을 때도 그랬지.

― 의맹이 수술을 금한 이후로 몸에 칼을 대는 자들은 모두 사람을 속이는 사기꾼만이 남았다고 생각해서 그대의 실력을 오해했다.

그건 사기꾼이 아닌 진짜 실력자, 수술을 하는 의원을 만나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외과수술의 명의로 알려진 화타의 후인들 말이다.

“저는 화씨 의문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제가 추측하기론 화씨의문과 화산파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는 거 같은데. 아닌가요?”

홍령이 화타의 후손이고, 동시에 화산파 출신의 무인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타의 화(華).

화산파의 화(華).

두 글자가 같은 건 우연한 일이었을까?

“……화씨의문의 선조인 화타는 화산 출신의 의원이었지. 그 이름은 일종의 별호로, 화산의 이름을 땄다고 들었네. 화타의 사후 그 후손들이 화산에 숨어 화씨의문의 이름을 이었다고 하지.”

역시 그랬군. 무당에 태청의원이 있는 것처럼, 화씨의문은 화산의 의맥을 잇는 곳이었던 거다.

“허나 그 사변으로 화씨의문의 맥은 끊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대는 대체 어떻게―.”

“그걸 말하는 건, 저를 정반합의 일원으로 받아주셨을 때 생각해 보겠습니다.”

좌수검은 어두운 낯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에서는 자신의 출신을 말하지 않는 문파들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화씨의문의 맥을 어떻게 이었는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라고 홍령이 일렀었는데, 정말 생각한 것보다 잘 먹히는군.

하긴, 화산파에 그런 비사가 있으면 절대 그 출처를 말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긴 하지.

“확실히 그렇군. 그대가 합의 일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 건 맞아.”

“이봐, 외팔이. 화씨의문의 후예라는 건 검증하지 않아도 되고?”

“그건 이 팔이 증명하겠지.”

좌수검은 왼팔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품이 큰 무복 소매가 어깻죽지까지 쭉 흘러내렸다. 그곳에는 팔이 잘렸다 붙은 선명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당이나 다른 곳에서도 수술을 하긴 하지만 이와 같은 실력은, 화씨의문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네. 허니 다른 증명은 필요 없소.”

“하, 참나. 그게 애초에 말이 안 된다는 게야. 이 녀석은 이십 년간 금가장에서 투병을 했다고. 근데 금가 놈이 뒈진 지 일 년도 안 되어서 그만한 수술 실력을 손에 넣었다고?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가 아니지.”

귀신이 내 몸에 씌어서 가능하다는 설명을 할 수는 없을 테니, 적당한 변명이 없을까 홍령과 머리를 맞대려던 차였는데.

“무당이 기를 쓰고 세상에서 지운 이름. 그 이름을 내세우는 건 득은 없고 실만 있는 일. 그것만으로도 나는 금 의원이 화씨의문의 정통 후인이며 그들의 넋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네.”

“……끄응. 하긴, 누군가한테 사사한 게 아니라면 화산의 이름도 모르는 것들이 화씨의문의 이름을 알 턱이 없지. 좋아. 이유는 납득했다! 허나 그것만으로 이 가면쟁이 네놈이 합에 들어오는 걸 찬성할 수는 없다.”

“제가 뭘 더 증명하면 될까요? 이거면 되겠습니까?”

나는 태양보도를 뽑아 탁자 위에 꽂았다. 아버지 금왕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물건인 동시에 그 자체로도 천금의 가치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보물. 이거면 이들이 납득할까?

“흥, 그깟 건 어디 가서 엿이나 바꿔 먹거라.”

“방주께서 뭘 모르시나 본데요. 이건 태양보도라고 금가장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그까짓 거 갖고 있다고 금가장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누? 금가놈 핏줄인 네놈도 무한에 와선 제집에 안 돌아가고 어디 외딴 데 짐을 풀고 앉았건만. 그깟 게 뭐라고.”

윽.

도개걸이 정곡을 찔렀다.

“아, 외팔아. 우리 ‘그거’ 시킬까.”

“‘그거’라면……”

“그래, 그거네! ‘그거’ 시키자! 그거면 이놈이 지 애비랑 사이가 안 좋다는 것도 설명이 되고, 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거다! 어떠냐, 가면쟁이야. 해볼 테냐?”

다짜고짜 뭔지 설명도 안 해주고?

“음, 이럴 때 신뢰를 얻으려면 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겠다고 해야 할 거 같긴 한데요.”

“그런데?”

“제가 그런 화끈한 성격은 못 되어서, 확인은 해야겠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킬킬, 좋다. 금가 놈 아들이면 그 정도 신중함도 없어서야 이상하지.”

오히려 이편이 더 점수를 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도개걸이 마침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금가 놈 자식새끼인 네놈이 우리 편이 되면 확실히 유리한 부분이 생기지. 우리도 찾고 있거든. 금가 놈의 숨겨진 유산이라는 거 말이다.”

[……개방 방주까지 언급할 정도라면 이제 더는 헛소문으로 치부할 수는 없겠는데요.]

화산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들로 인해 한동안 말이 없었던 홍령이 입을 열었다. 아예 이쪽으로 생각을 돌려 마음을 다스릴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유산의 실마리가 숨겨져 있는 곳을 안다. 근데 우리가 차마 손댈 수 없는 곳이란 말이지.”

숨겨진 유산의 존재를 아는 걸 넘어서, 그 행적을 찾을 실마리가 어디 있는지까지 알다니? 도개걸이 개방 방주이니만큼 그만한 정보를 알아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자식인 나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그 실마리는 다른 사람보다는 금가장 사람이 접근하기 좋은 곳에 있단 얘기군요.”

“그렇지! 네놈도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보다 뭐가 나을까 싶긴 하다만. 썩어도 준치라고, 아니지, 이럴 땐 드러워도 핏줄이라고 해야 하나? 네놈은 어쨌든 금가 놈 아니냐?”

“좋습니다. 아버지의 숨겨진 유산, 그 실마리. 제가 정확히 무엇을 가져와야 정반합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까?”

“위패다.”

입을 다물고 있던 좌수검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네 아버지의 사당에 모셔져 있는 위패. 그것을 가져오면 된다.”

……미친, 뭘 가져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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