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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07화 (107/350)

107화

― 내가 아는 것은 아버지의 근 이십 년뿐이다.

그나마도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은 희미하다.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덕분에 그때도 말을 알아듣고 사고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아기의 몸에 쏟아지는 격통은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아버지와의 일을 기억하는 건 조금이나마 치료가 진행되었던 때부터다.

나는 그 이전의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말은 바로 하세, 방주. 금 의원, 그대의 아비는 태청장원의 일과는 관계없다. 그대의 친구와 적이 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게.”

좌수검이 나섰다. 나는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표행은 이걸로 끝입니다. 모두 돌아가시면 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표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 모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납득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아마 완전히 돌아가는 대신 주변에서 이 주루를 감시하며 남아 있겠지만.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구만? 하긴, 그깟 종이짝 같은 몸으로 내 앞을 막아섰을 때부터 건방진 새끼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낄낄.”

“금 의원, 나는 분명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네.”

“좌수검도 방주처럼 권주를 마다하면 벌주를 주실 생각인가요?”

“벌주라니, 그대는 나의 은인일세.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않나.”

표사들이 전부 자리를 뜬 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술병의 마개를 땄다. 술을 아주 마실 수 없는 건 아니다. 한 모금 정도가 최선일 뿐인 데다 다음 날 엄청난 숙취가 예고되어 있는바. 그럴 바엔 안 마시는 게 낫겠다 할 뿐이지.

하지만 지금은 술이 조금 필요하다. 맑은 청주가 잔 하나를 찰랑찰랑하게 채웠다.

“무당은 정파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뒤로 제법 지저분한 짓을 많이 하더라고요. 아마 그건 일부분에 불과하겠죠? 태청장원의 일처럼요.”

맑은 술의 표면에 일그러지기 직전의 내 얼굴이 비쳤다.

사실, 몰라도 되는 일이다.

죽은 사람의 허물은 들추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다. 간 사람은 그저 간 사람으로 남기면 될 걸 굳이 부관참시까지 해야 하나.

게다가 내게는 좋은 아버지였다.

돈 들어가는 늪이나 다름없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셨다. 마지막에는 연명 당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그 바탕에 아버지의 애정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 그러니까 업고 가자.

애정을 받았다면 그분의 부정(不淨)까지 짊어지자.

“아버지가 무당과 함께 무슨 짓을 하셨다면, 저도 알아야겠습니다.”

나는 술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간만에 맛보는 술맛. 쾌감보다는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통증만 느껴졌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일세, 금 의원.”

“그러는 좌수검께서도 지금 굉장히 현명치 못하게 행동하고 계시죠. 안 그런가요? 현명하게 행동하시려면 저를 먼저 쫓아내셨어야죠. 아니면 이 기회를 철저히 이용하시던가요. 여러분은 제 아버지를, 그리고 금가장을 원수로 생각하는 분들 아닌가요? 복수를 꾀하고 싶으신 거라면 지금 그 손에 아주 막강한 패가 들어온 건데.”

좌수검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도개걸마저도 뭐라 말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객잔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문득, 여기 오기 전 꿨던 꿈이 생각났다.

나는 내가 천형의 병을 타고난 게 나의 업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업보는, 그런 전생을 가진 아들을 늘그막에 얻은 게 아닐까.

― 반년 후, 남매의 이야기는 결국 세상에 공개됐다. 그들이 사인한 문서와 협박을 곁들인 통화록이 유출됐다. 사람들은 대기업의 횡포에 분노했고 사측은 이를 부정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내부 고발자가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알아야겠어요. 아버지와 무당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을 아프게 했는지.”

― 그 내부 고발자는 나였다.

“가면 쓴 놈아. 너, 화산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또 한 병의 술을 비운 도개걸이 병을 내려놓고 물었다. 이번에는 술을 추가로 주문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화산, 개방 방주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으니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해요.]

조용하던 홍령이 한마디를 하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화산.

지금까지 접한 화산은 부정적인 얘기가 많았다.

한때 구파일방의 일원이었으나 지금은 멸문,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문파.

구파일방의 앞에서는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되는 이름.

한때 자파의 후기지수를 일컫던 이름도 다른 가문에 빼앗기고 이제는 정보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아진.

……아마도 홍령의 뿌리일 그곳.

“큰 사변이 나서 문파도 그 일대도 전부 초토화됐다는 말을 들었다.”

이건 내가 한 얘기가 아니다. 창천이었다.

큰 사변이라고?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화산지회 예선을 시작할 때 무당의 장문인이 말하더군. 그 참상을 기리고 그런 일이 다신 벌어지지 않게 무림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여는 대회라고 했다.”

세상에. 창천이 이런 걸 귀 기울여 들었다니.

“헹, 그놈들은 아직도 그딴 말을 지껄이는구만. 아주 눈물을 쥐어짰겠어. 섬서사변에 도움 한 번 준 적 없으면서 말이야. 오히려 놈들은 그 일을 덮기 바빴지.”

도개걸은 다시 술이 땡기는 듯 빈 술병을 쥐고 흔들다가, 내가 한 잔을 따르고 내려놓은 그 술병을 다시 가져갔다.

“그러면 니들, 섬서사변이 뭔지는 아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변이라고 하는 걸 보니 사람이 죽었다는 거긴 하겠지.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섬서는 말이다, 예전에는 이 무한만 한 도시가 있는 곳이었다. 서안이라고 요새 것들은 잘 모르지? 그곳에 마두가 있었다.”

마두(魔頭).

주로 잔혹한 행위로 내공 증진을 꾀하거나, 자신의 무공으로 사악한 짓을 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

마을에서 여인을 희롱하거나 사람을 죽여 그 기운을 흡수하는 이들도 흔히 마두라 불리지만 개방 방주가 마두라 말할 정도라면 급이 다른 악인일 터.

“동남동녀 천 명? 그건 우습지. 그 마두는 말이다, 섬서 전체의 생기를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들려고 했어. 실패하고 죽었지만.”

“……그렇군요.”

“아직 어르신 말씀 안 끝났다. 중요한 건 마두가 아냐. 마두는 그 기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해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생기를 빼앗긴 섬서는 그 기를 돌려받지 못했단 말이다.”

사람이 생기를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죽음을 맞이한다. 양양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고독에게 생기를 빨려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섬서 전체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뜻이다.

적게 잡아도 수백만의 죽음.

그야말로 사변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좀 이상한 게 있는데요. 왜 섬서 사람들이 아니라 섬서라고 하는 걸까요?]

홍령의 말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좌수검이 덧붙였다.

“생기를 잃은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네. 만물이 힘을 잃었지. 지금도 그곳에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 많아.”

만물이 힘을 잃을 정도의 일이라니.

말로만 들어서는 도통 상상이 가질 않았지만, 나는 전생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곳들을 알고 있었다.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터지거나 원폭이 터지는 등의 사건을 통해 수십 년간 불모지가 되었던 땅들.

그런데 그 일이 원자력이나 미사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

“그 마두가 바로 화산파였다.”

“예?”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산이 그 자체로 마두 소굴이었지.”

도개걸이 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쏟아지는 정보의 양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구마 줄기를 뽑아내는 것처럼, 도개걸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한 번에 꿰어 엮어 올렸다. 머리가 아팠다.

“……누가 그러더군요. 화산파에 대해 물었더니, 구파일방이 그 이름을 언급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궁금해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렇겠네요. 같은 구파일방이었고, 도가문파였는데 그런 일을 벌였으면 언급 자체로 수치스러웠겠죠.”

“그르치. 특히 무당 그놈들이 화산을 지우려고 애를 많이 썼어. 그 뭐냐, 자하신룡? 그 이름도 억지로 뜬금없는 놈에게 갖다 붙이고 말이야.”

“화산파 제일 후기지수에게 붙는 별호를…….”

“그 일이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지. 무당과는 또 무슨 상관이고.”

뱅뱅 도는 이야기를 견디지 못한 건지 창천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내게도 그렇겠지만 녀석에게도 너무나 먼 과거의 얘기다. 태청장원의 비사에 관한 얘기를 들으러 온 녀석이 짜증을 낼 만했다.

“관계가 있지. 그 일의 뒤에는 사실 무당이 있거든! 네 아비도 말이야, 하하!”

“거기까지 하지, 방주.”

좌수검이 도개걸의 말을 잘랐다. 도개걸은 내 술마저 다 비워버리고선 입을 닦았다.

“알아, 알아. 내가 좀 입이 싸긴 해도 이 이상을 떠벌거릴 생각은 없어. 근데 이건 알아둬야지, 얘들아. 그 일 이후로 무당의는 의맹의 제일 자리를 차지했고 금가 놈은 천하제일의 부자가 됐지. 누가 폭삭 망한 대신 말이야.”

도개걸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아직 말하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나도 답답했다. 이들은 진실을 전부 꺼내지 않았다. 그렇겠지, 내가 자기들 편인 것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할까?

그나마 여기까지 얘기가 나온 것도 내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지만…….

“대충 배경 설명이 되었을 듯하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우리의 이름은 정반합(正反合). 우리는 무당으로 대표되는 정파의 부정한 짓에 피해를 입은 이들을 모아 그들이 숨긴 비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창천, 우리 합의 일원이 되는 건 어떠한가?”

“모르긴 몰라도 저 가면새끼 하나 믿고 설치는 것보다야 나을걸. 그건 내 개방 방주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좌수검이 창천을 향해 말했다. 도개걸의 시선도, 주루 안 모든 사람의 시선도 그랬다. 나는 순식간에 다시 대화의 변두리로 밀려 나갔다.

“조건은?”

“합에서 요구할 때 요구대로 움직이고, 소집이 있을 때 응하면 된다. 원하지 않는 일은 거절해도 되지만 그만큼 우리의 신뢰가 쌓이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

“그 일을 해내면, 내가 얻는 것은?”

“태청장원의 비사에 손을 댄 자들의 명단을 넘겨주지.”

“……!”

“그 계획을 입안한 자부터 그대 부모의 목숨을 거둔 이들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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