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06화 (106/350)

106화

“시작한다!”

“빨리 남은 술을 비우라고!”

술꾼들이 요란을 떠는 사이 점소이들이 큰 술독을 들고 들어와 취객들의 빈 술병에 술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 주루는 자정이 되면 이런 서비스를 마구 뿌린다. 지금부터는 술도 반값이다. 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와 자리를 차지했다.

[이래서야, 무슨 일을 벌일래도 벌일 수가 없겠네요.]

무림인과의 약속 장소로 객잔이나 주루를 골랐다간 반드시 사달이 난다며, 부서질 인테리어 값을 물어줄 게 아니라면 다른 델 고르라고 조언하던 홍령도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시장통이나 다름없는 주루에 누군가 들어왔다.

얼굴에 긴 흉터가 있는 무인이었는데, 반값 술을 노리고 문을 열 때부터 희희낙락한 얼굴로 들어오는 이들과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곧장 우리가 있는 탁자로 다가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쪽이 태청장원의 창천이겠지?”

“그러는 그쪽이 날 나오라고 한 사람인가.”

“연화지의 서찰은 잘 받았어. 우선 돈부터 확인할까? 쉬운 정보가 아니라서 말이야.”

흉터의 무인은 다짜고짜 돈 얘기를 꺼냈다. 창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뭐야, 이 녀석. 진짜 당황했는데?

하긴 수중에 돈도 없고 내가 천금을 내줄 생각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법도 하지.

[정말이지, 당신이 같이 안 나왔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벗겨 먹혔겠는데요.]

홍령이 혀를 끌끌 찼다.

“당연히 이 사람이 아니지. 신장 한쪽 팔 일 없으니까 표정 풀어.”

“신장 한쪽? 이 사람이 아니다?”

“척 보면 몰라. 대역이잖아?”

내가 대역이라고 말하자마자 흉터 무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떻게 알았지.”

“그쪽, 들어오자마자 우리에게 직진했잖아요.”

내공이란 건 대단하다.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고 맨손에서 장풍을 일으켜 바위를 부술 수도 있다.

온갖 신기한 일이 가능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아니다.

벽을 뚫고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어디에 앉아 있는지 보는 투시력 같은 건 구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안에 있는 누가 당신한테 일러줬겠죠. 일 층 가운데 탁자에 목표가 앉아 있다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렇게 본다고 알면 이미 알아차렸겠지.

“네 기준으로 찾으면 한참 걸릴걸? 세 보이는 사람을 찾지 말고 이상한 걸 찾아봐.”

둘러보면, 확실히 이 주루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술과 안주가 중저가부터 고가까지 고루고루 있고, 일 층은 북적하고 이 층은 나름 담소를 나누기 좋아 누가 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의 술집이다.

“……거지가 있군.”

내가 말한 ‘이상한 점’을 찾은 창천이 매처럼 눈을 빛냈다.

“그래.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도 그럭저럭 마실 수 있는 곳이지만, 고쟁이에 동전 몇 푼 넣어놓고 사는 거지들이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실 정도는 아니지.”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구석구석에 앉아 술과 음식을 먹고 있는데 술은 입만 댈 뿐이고 음식은 젓가락 하나 가지 않았다. 창천이 자신들을 찾아내자 눈매도 매서워졌다.

[왔어요.]

이쯤 되면 누가 올지 뻔히 예상되는 부분이다.

문이 벌컥 열리고 주루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한 도개걸이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왔다.

개방 방주의 등장에 왁자지껄하던 주루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는 지나가는 탁자 위의 술병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어 입 안에 들이붓고는 절뚝절뚝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 가면새끼를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또 보다니. 오늘 하루 재수 옴팡지게도 없구나. 내 제자는 안 데리고 온 게냐?”

“제 제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나 해서 두고 나왔는데 그러길 잘했군요.”

“흐응, 두고 나왔다?”

“그렇다고 그 애를 건드릴 생각은 마시길. 무한 거지들 동냥밥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독극물에 죽어 자빠질 테니까요.”

“이거 봐, 아주 극악한 놈이라니까? 하여간 외팔이 새끼, 사람 보는 눈도 없어 가지고. 이딴 걸 인의를 아는 의원이네 뭐네 지랄을 해요, 지랄을.”

“그래서, 태청장원의 비사에 대해 알고 계시다고요? 개방의 방주시니 아셔도 이상하진 않네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창천을 대신해 내가 질문의 주도권을 잡았다. 도개걸은 그 말에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빈 술병을 탁 내려놓았다.

“그게 개방 방주라고 당연히 알 얘기 같냐?”

“아닙니까?”

“에라이, 썩을. 웬 놈의 새끼들이 개방이니 하오문이니 황제 속곳 색깔까지 안다고 퍼트려 가지고. 그 정도로 죄 알고 있으면 지금 동네에 거지새끼 발가락 하나 남아 있겠냐?”

“허면, 개방도 무당과 썩 사이가 좋은 건 아닌가 보군요?”

내 말에 갑자기 주루의 소음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아니, 완전히 조용해진 건 아니다. 금왕표국의 표사들만이 아닌 척 떠들다가 갑작스러운 정적에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잠깐만요. 설마 이 사람들이 다?]

이 주루는 넓고, 사람이 많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술을 마셔도 어색하지 않은 곳. 그곳에 거지들이 껴 있는 것은 분명 이질적이었고 그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했군.

도개걸의 사람은 수상쩍게 앉아 있는 거지들뿐만이 아니었다.

금왕표국의 표사들 몇을 제외하고, 모두가 도개걸과 같은 눈을 하곤 나를 노려보았다.

“주인장! 여기 술 좀 내와! 에라이, 외팔이 새끼는 사람을 불러놓고 왜 오질 않누? 이 가면쟁이랑 계속 얼굴 부딪치면서 술을 마셔야겠나? 야, 이 새끼들아. 눈 깔어! 술맛 떨어져! 아직 얘기 시작도 안 했어!”

도개걸이 버럭 호통을 치자, 젓가락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주루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정적이 만든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아 아까에 비하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좋을 정도의 소음이 났다.

금왕표국의 표사들, 거지들, 그 나머지 사람들 모두 이쪽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거지들이 분장한 건 아니에요. 전부 무림인도 아니고요. 개방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무당하고 악연이 있는 이들일 수도 있지. 지금까지 얘기한 걸 떠올려보면 말이야.

자세한 건 당사자가 와봐야 알겠지만.

“저 거지 노인이 말하는 외팔이라는 건, 좌수검을 얘기하는 건가.”

“아마도.”

약간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도개걸이나 좌수검이 무당과 악연이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럴 수 있다. 무림의 은원이라는 건 참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지 않던가? 아버지 금왕과 악연이 있다는 좌수검이 내게 은혜를 입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 도개걸도 좌수검도 아버지와 악연이 있다.

한 개는 그럴 수 있다 치는데, 이제 두 사람이 동시에 두 개의 악연을 가지고 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뭔가 관계가 있는 걸까?

때마침 문이 열리고 한 팔이 없는 사내가 빈 소매를 속절없이 휘날리며 들어왔다. 좌수검이다.

“이 새끼야. 사람을 불러놓고 어딜 다녀와?”

“의장의 호출이 있었네.”

“의장은 개뿔, 그냥 돈줄이지. 그래, 신입이 있다고 해서 와봤더니 이 가면새끼가 있는데. 진짜 이게 새 신입이냐?”

의장이라는 자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니 이들이 어떤 종류의 집단이라는 내 추측은 맞았다. 그가 이들에게 금전적으로 후원을 한다는 사실도 알았군.

돈줄이라 불릴 정도로 상당한 금액을 이들에게 준다는 건, 그만한 돈이 들어갈 만한 일을 한다는 얘기겠지.

“……금 의원이 여기 있는 건 내 예상 밖의 일이군. 혼자 올 줄 알았네.”

“그럼 이 가면 새끼는 불청객이라는 얘기구만. 거 거들먹거리는 표사 놈들 데리고 썩 안 꺼져?”

좌수검의 말에 도개걸이 나가라는 듯 문 쪽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절 빼놓고 무슨 재밌는 얘길 하시려고요? 죄송하지만 창천 이 녀석은 저희 식구라서 그냥 두고 갈 수는 없겠네요. 보기와는 다르게 길치라서, 두고 가면 집에 못 찾아올 거거든요.”

“그대와는 관련이 없는 얘기네.”

“정말 관련이 없는 얘기였으면 창천이 제게 그 서찰을 보여주지도 않았을걸요? 이 녀석이 무당의 손에서 길러진 실험작이라는 사실은 제가 밝혀냈는데. 그리고 저도 그쪽하고 썩 사이가 좋은 건 아니고요.”

“하! 저 새끼 말 한번 번지르르하네. 야, 외팔아. 지금 내가 금가 그놈이 금가 자식 놈하고 사이가 썩 안 좋단 얘길 듣고 있는 거냐?”

“저는 무당하고 사이가 썩 안 좋다고 얘길 했는데요. 왜 도개걸 선배님께서 아버지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몰라? 진짜 몰라? 하, 이거. 눈치 빨라 보이더니 이럴 때 또 눈치가 없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진 알겠어요. 아버지와 무당이 한 편이다, 함께 그 지저분한 짓들을 했다. 그런 말씀이신 거죠?”

“그래. 아주 글러먹은 놈은 아니구만? 그러니까 네놈은 어서―.”

“그렇다면 더더욱 못 갑니다.”

나는 눈에 힘을 바짝 주고 도개걸의 시선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 녀석과 난 한 배를 탔어요. 그러니까 갈 수 없습니다. 나도 알아야 해요.”

“금태양, 나는―”

“창천, 가만히 있어.”

지금 나는 금가장과 느슨한 연결고리를 가진 채 무당의 영역에서 무당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며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무당과 한 편이었다고 하면 얘기가 복잡해진다. 나는 생존을 위해서 다른 전략을 찾아야 했다.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다면 그게 나중에 큰 위협으로 돌아올 테니까.

이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만큼 얻어낸다.

그게 설령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보라고 해도.

“다만 방주의 말씀에 이상한 점이 있어요. 저도 아버지의 일에 대해선 적잖게 알아요. 금가장 정도 규모가 되기까지 그 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혈이 고이게 되는지도 알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무당과 썩 사이가 좋지 않았죠.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았지만, 아버지는 분명 무당을 꺼려했어요.”

이십 년의 투병 생활 동안 들었던 말들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내 방에서 은 파파를 만나기도 하고 잘 풀리지 않는 일들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만큼 금가장의 깊숙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중에 무당과 손을 잡았다는 얘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의 말투에는 무당에 대한 묘한 거부감과 거리감이 존재했다.

“호북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방주의 귀에 들어가진 못해도, 소림에서 영광스러운 무승의 별호를 가진 사람이 저희 둘째 형님인 건 아시죠? 그만한 기재를 무당이 아닌 소림으로 보냈다고요. 방주의 말처럼 아버지와 무당이 손을 잡았었다면―”

“아따, 시끄럽다. 머리는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상상력이 부족한 놈이구만. 꺼려 할 만큼, 제 자식을 멀리 보내야 할 만큼 그 전에 뭔가 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냐? 너 새끼 몇 살이냐? 네가 금가 그 새끼의 평생을 알아?”

도개걸은 귀를 후비적 파더니 귀지를 후 불어냈다. 멀리서도 육안으로 구분될 정도로 큼직하고 지저분한 귀지가 방치된 채 식어가던 음식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음식을 먹을 생각도 없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입맛이 싹 사라졌다. 그 귀지에 머리를 한 대 콩 얻어맞은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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