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05화 (105/350)

105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평소라면 본부장이나 회장 일가 외에는 이렇게 인사할 일이 없지만, 지금은 상대에게 최대한 저자세로 나갈 때다.

나의 인사에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의 여성과 어린 남자애. 이들의 인적사항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어린 엄마와 아들이라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유일한 보호자인 할아버지를 최근에 잃은, 대학 새내기와 초등학생 남매다.

“이쪽으로 오셨다는 건, 저희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될까요?”

아직 자리에 앉지 않은 이들에게 의자를 빼주며 물었다. 누나 쪽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지만 동생 쪽은 꿋꿋이 서 있었다. 저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들의 조부는 자사의 제품으로 인해 사망했으니까.

……라고 내가 인정하면 안 되지만.

“우선 피해자 연대 대신 저희 측을 선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미리 유선상으로 약속드렸다시피, 동생분의 치료비 일체와 두 분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 전액, 거기에 희망하실 경우 해외 유학비용과 생활비까지 본사에서 지원 예정입니다.”

내가 앵무새처럼 말을 늘어놓는 동안 남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누나 쪽에 준비해둔 서류를 내밀었다.

“확인해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포켓에 꽂아놓았던 만년필을 뽑아 건넸지만 누나 쪽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결정에 오 분 이상은 걸리겠군.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이가 어려도 냉정하게 처신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많아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괜찮은 조건입니다. 더 버티셔도 이보다 좋은 제안은 어려울 겁니다. 동생분을 생각하세요. 본인 미래도 지키셔야죠.”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여리고 지킬 게 남은 이들을 설득하는 편이 제일 쉽다.

“……사인할게요. 여기 하면 되는 거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지 누나 쪽은 내가 건넨 만년필 대신 자신의 싸구려 가방에서 싸구려 펜을 꺼내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우는 거 같기도 했다. 서류가 젖으면 곤란했기에 나는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은 안 돌려주셔도 됩니다. 제안을 받아주셔서 감사드리고, 가능하면 다른 피해자분들도 합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보상금은 바로 되는 거죠?”

“보상금이 아니라 위로비입니다.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서류에도 있으니 다시 꼼꼼히 읽어보시고.”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보상금이라는 단어를 유족이 언론에 흘리면 합의를 한 보람이 없어진다. 이들은 앞으로의 생계를 대가로 단어 하나하나에 족쇄를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볼 일을 마쳤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에게 더 이상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인사를 하고 서류를 챙겨 자리를 뜨려는데 여태껏 바닥만 노려보던 동생 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백 배로! 천 배로 돌려받을 거야! 만 배로 아플 거라고! 할아버지가 아팠던 것처럼!”

동생 쪽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콜록콜록 거친 기침을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증상을 완화하는 데만도 거액의 치료비가 필요할 것이다. 누나가 동생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무척 작아 보였다.

……무척, 작아 보였다.

“한 가지만 조언해드리겠습니다. 불행히도 이런 일이 다시 생기게 된다면 꼭 변호사를 대동하세요. 연락 주시면 제가 변호사 선임을 도와드리죠.”

지금까지 몇 번 이런 말을 건넨 피해자들이 있었다. 기준은 없었다. 그저 그때 마음이 내켰을 때 그렇게 행동했고, 지금껏 다시 연락이 온 이들은 없었다. 꼴도 보기 싫어서일지 아니면 그렇게까지 다급한 일이 없기 때문일지. 나는 그 이유가 후자이기를 바랐다.

그래도 기왕이면, 그게 더 나을 테니까.

“예, 본부장님. 네 번째 방금 사인했습니다. 이번 주 내로 일곱 명 다 마무리 짓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장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예, 마음 편히 즐기고 오십시오.”

통화를 끝내고 나자 눈앞이 어지러웠다. 몇 시간째 깨어 있는 거더라. 76시간? 80시간은 안 넘었던 거 같은데.

귀에도 멀리서 웅웅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달에는 이비인후과에 갈 시간을 낼 수 있을까. 어린아이가 내뱉은 저주가 멀리서 끊임없이 달려오는 메아리처럼 머리를 울렸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건 그로부터 일 년 후의 일이다.

* * *

온몸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전생의 꿈을 꿀 때면 항상 이랬다.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린 채 끈덕지게 엄습하는 격통에 신음한다. 머리에서는 이명이 울리듯 귀신들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흘렀다.

― 너의 업(業)은 살아 해결될 것이 아니라 누누이 얘기하건만. 질긴 목숨이로고.

그래도 오랜만이다, 전생의 꿈을 꾼 건.

홍령을 만났을 때가 마지막이었지.

그때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의 꿈을 꿨던 걸로 기억한다.

[……괜찮아요?]

괜찮아. 전에 비하면 한결 덜 아픈걸.

[그래도요. 보통 사람은 못 이겨낼 고통인걸요. 심지어 당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았잖아요. 다 큰 성인도 투병하면서 성격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하하.

[정말로요. 부잣집 도련님 같지 않은 면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아팠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때가 많아요.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하면서 운명을 탓하거나 염세적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그냥 말없이 웃었다. 나의 전생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했지만, 홍령에게도 말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아니, 많다.

……그녀가 나의 꿈을 들여다볼 수는 없어서 다행이다.

“금태양! 나 들어감!”

땀에 젖은 몸을 물수건으로 닦고 몸을 정돈하자 밖에서 요란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뭔데? 이따 나갈 일 있어서 쉰다고 했잖아.”

핀잔을 주긴 했지만 사실 녀석의 등장이 내심 반가웠다. 이 녀석이랑 있으면 번잡한 생각에 심력을 소모할 일은 없을 테니까.

“만났다며, 좌수검! 창천이 얘기함! 물어봤음?”

아아, 난 또 뭐라고, 좌수검 얘기였군. 하긴, 그건 딱히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미안, 깜빡했어.”

“너무함! 왼손잡이용 도구를 만들어주겠다며!”

“그런 걸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꼭 좌수검에게 묻지 않아도 그런 걸 만들어 줄 장인을 알고 있어.”

“정말? 왜 진작 말하지 않음?”

그야 그 사람이 날 만나줄 지부터가 확실하지 않으니까.

나와 사이가 안 좋은 건 둘째치고서라도 금간양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당당이 사천당가 직계임을 내세워 만남을 청한다고 해도 거절할걸?

“원래 장인들은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까 기다려.”

“흐음, 기다리는 거 싫음. 답답해.”

“원래 약이나 독도 달이는 데 충분한 시간이 걸리는 법이잖아. 집 잘 지키고 있어. 알았지?”

“알았음. 신생도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셈.”

도개걸이 또 신생을 잡으러 올까 봐 자리를 비우는 게 걱정됐지만, 함께 가는 것도 위험할 수 있으니 당당에게 신생을 부탁했다.

거기에 금왕표국에도 경비 강화를 부탁했으니, 도개걸이 정말 무한 거지들의 동냥그릇을 죄다 빠개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함부로 여기 쳐들어오진 못하겠지.

“시간이 다 되어간다. 가지.”

“좋아, 가자.”

* * *

자정이 되진 않았지만 밤은 이미 깊었다. 달이 휘영청 뜬 무한의 거리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왈패들과 왁자지껄 떠드는 호사가들이 넘쳐났다.

어떤 이들은 비장한 얼굴을 하곤 그림자 속을 소리 없이 오고 갔고 또 어떤 이들은 야음을 틈타 밀회를 즐기기 바빴다.

우리를 태운 마차는 화려한 무한의 밤거리를 헤치고 달리다 어느 한 곳에 멈췄다.

“……이런 곳에 마차를 타고 오게 될 줄이야.”

[이번엔 나도 창천의 말에 공감해요. 이 야밤에 주루에 오면서 마차라니. 자고로 중요한 약속장소에 나가는 무인이라면 지붕과 지붕 사이를 넘고 뛰어서 주루 앞에 탁! 하고 착지해주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문을 열고 들어 가주는 거라고요! 마차라니. 풍류가 없어, 풍류가.]

홍령의 말에 장 의원의 말버릇처럼 떼잉, 쯧! 같은 추임새를 넣어줘야 할 거 같은 기분은 뭘까?

“신법을 수련하긴 했지만 난 아직 너처럼 지붕 사이를 날아다니거나 할 수는 없다고. 게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뭐 하러 힘을 빼? 마차가 어때서, 이렇게 길이 잘 깔려 있는데 마차를 안 타면 오히려 손해지.”

나는 툴툴거리며 옷차림을 정돈했다. 하여간 무림인들이란 은근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사는 경향이 있다니까.

“들어가자.”

창천과 홍령이 이동수단에 불만을 갖든 말든 우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산하고 사람이 드물어 밀회를 갖기 좋은 연화지의 정자가 아니라, 사람이 북적북적한 주루가 내가 새로 지정한 장소다.

“……사람이 정말, 많군.”

“무한이니까. 특히나 여긴 더 그렇지. 무한에서 제일 큰 술집이거든.”

제일 큰 술집이라고 하지만 저쪽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몇 층짜리 고급 주루가 아니다. 그런 곳은 오히려 사람이 적고 고아한 분위기가 있지.

여기는 그에 비하면……

“점소이, 여기 술 세 동이 더!”

“안주 추가요!”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 쭉쭉쭉!”

전생으로 치자면 번화가나 대학가에 있는 대형 술집에 가까운 곳이지. 술과 안주의 가격도 합리적인 선부터 호기롭게 즐길 수 있는 메뉴까지 다양해서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오고 가는 주루다.

일 층에는 주로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이들이, ㅁ자 복도로 되어서 아래층이 내려다보이는 이 층에는 그보다는 조금 사정이 나은 이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창천이 계단을 오르기 전에 그의 소매를 잡았다.

“저기 앉자.”

내가 가리킨 곳은 객잔의 일층, 정중앙에 위치한 탁자였다.

“이 층으로 가지 않는 건가? 그곳이 오는 이들을 확인하기는 편할 텐데.”

“아니, 여기가 좋아.”

이 층의 ㅁ자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정수리가 보이다 못해 소채볶음 중 뭘 편식해서 하나하나 골라내고 있는지 보일 거 같은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 창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옆 의자에 앉았다.

“음식은 알아서 시켜.”

메뉴 선정은 은근히 입이 까다로운 창천에게 맡겼다. 우리가 뭘 먹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창천도 그 부분은 공감했는지 메뉴판을 뒤적이는 대신 나를 따라 이 층을 곁눈질했다.

은근하게 내리꽂히는 시선들.

[금왕표국인가?]

창천의 전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이 정도 보험은 들어놔야지.

이 층에는 금왕표국의 실력 있는 표사들이 손님을 가장해 앉아 있었다.

만약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저 위에 있는 이들이 곧장 뛰어내려 나를 보호할 것이다.

때문에 일부러 2층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은 거고.

모르긴 몰라도 1층 자리에도 구석구석 앉아있을 거다.

―댕, 댕, 댕

큰 종소리가 성내를 울렸다.

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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