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무튼, 보통이라면 네가 그 돈을 지불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했을 거야. 엄청난 정보라고. 무당의 더러운 부분이 얽힌 일, 정보를 누설하는 것만으로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냥 정보 한 토막을 흘리는 일이 아니라고.”
녀석은 사안의 무게를 이제 깨달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공들여 너를 불러낸 걸 보면 상대는 그 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몰라. 천금의 가치가 충분한 정보 말이지.”
양양에서 태청의문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고 무당의 삼대제자인 현건을 심부름꾼처럼 부려먹긴 했지만, 항상 상대가 구파일방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주지하고 있다. 상대의 가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큰 실수를 하기 마련이니까.
무당의 비리는 나와 당당이 연구하는 산공독만큼이나 큰 무기다.
무당에게 타격을 입힐 수도 있지만 정보를 쥔 당사자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수도 있는 양날의 검.
“그런 정보를 주겠다고 말하는데, 발신인은 네가 줄 보상에 관심이 없어.”
발신인도 당연히 내가 돈을 지불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애초에 문장만 봐도 돈 욕심이 안 보인다. 너무 깔끔하다고.
[……맞아요. 무림인의 문장이에요.]
“하지만 공짜로 정보를 줄 생각도 없어 보이지? 그럴 거였으면 그냥 너한테 정보를 줬을 거야. 이 사람은 원하는 게 있어. 그게 천금은 아니지만.”
“그러면 뭐지?”
“맨 처음에 말했잖아. 널 포섭할 의도가 보인다고.”
정보를 공짜로 줄 생각도 없지만 천금을 받을 생각도 없다.
내가 돈을 주지 않는 한 빈털터리인 창천에게 정보 대신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답은 하나다.
“그쪽이 원하는 건 너 자체일 가능성이 높아.”
“풀어서 설명해봐라.”
“너의 무력, 화산지회 호북 예선에서 일 등을 했으니 부족하진 않지. 거기에 명성도 좀 있고, 무당의 비리에 희생당한 피해자라는 지점. 이것도 어떤 이들에겐 꽤 가치 있는 요소지. 비극적인 상황에 처했지만 그걸 딛고 일어섰다는 점까지. 아,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도 포함할까? 그것도 꽤 중요하거든.”
피해 보상을 촉구하는 시민 피해자 연대 같은 곳에서, 단체를 대표하는 얼굴로 쓰기 좋은 조건.
창천은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높은 확률로, 이 서찰을 보낸 사람은 무당의 저질스러운 행사에 당한 피해자일 거야. 너와 같이 실험을 당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모르지. 더 지저분한 짓들이 있었는지도. 원래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은 하나만 하는 게 아니거든.”
“그렇군.”
“발신인이 무당의 피해자라면 아마, 단수가 아닐 거야.”
[무당의 그런 행사가 다수 있었다면 피해자가 여럿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정확히는, 그들이 집단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무당의 그런 지저분한 일들을 세상에 공개하고 무당의 명예에 먹칠을 하거나 보상을 받는 게 목적인 사람들 말이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피해자 개인이라면 자기 피해에만 관심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피해자가 여럿이라면? 무당의 지저분한 짓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돼. 거기에 함께할 동지를 모으기 위해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 찾아보게 될 거고. 개인일 때는 무당에 당하기만 했던 이들도 모이면 무당이 무시하지 못할 힘이 되겠지.”
[그러면 혹시, 그들의 본부가 무한에 있어서 일부러 무한으로 불렀다든가?]
그것도 가능성 높은 추측이지.
내가 말한 건 전부 추측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기도 하다. 직접 부딪쳐 실체를 알아보는 게 가장 쉽고 빠르지만, 이렇게 수상쩍은 상황에선 상대의 윤곽을 그려놓는 게 앞으로의 대처에 유리한 법이니까.
“궁금한 게 있다.”
“또 뭐?”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지?”
창천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 젠장.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주면 안 되냐고. 왜 평소엔 별말 안 하다가 이럴 때 예리한 건데?
“……그냥 추측이라니까. 그리고 잊었나 본데, 난 금가장의 막내야. 금가장도 무한에 못지않은 큰 규모를 갖췄다고. 그만큼 성장하는 데 아무 부침도 갈등도 없었겠어?”
“내가 알기로 너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의술 외에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천하제일금가에서 이십 년을 투병하면 웬만한 비사는 다 알고 있을 만하잖아?”
녀석은 입을 꾹 닫았지만 여전히 확실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환자 앞에선 마음이 약해지는지 들어봤자 뭐에 쓰겠냐는 생각 때문인지, 가족들 전부 편하게 아무 말이나 해댔다고. 개방 방주가 아버지랑 불편한 사이라는 것도 그때 들었고. 좌수검이 아버지와 원한이 있다는 건 아까 들은 거지만―”
“좌수검?”
“아까 신생이 잡혀갔을 때 그 자리에 있었어. 덕분에 개방 방주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지. 하여간 너도 참 운도 없다. 그렇게 좌수검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더니.”
좌수검이 호북 예선에서 거침없이 일 등을 차지했다는 걸 들은 후로는 그와 검을 겨룰 수 있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수련했던 걸 기억한다.
본선에서나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상대가 근거리에 있다니 흥분할 만도 하지.
……아까의 화제는 잊어버린 것 같군. 다행이다.
“아무튼, 상대가 널 포섭할 생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거라면 너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야. 안 그래? 정확한 거야 나가봐야 알겠지만. 당장 오늘 밤인 거지? 잘 다녀와. 크게 사고 치진 말고.”
“네 말을 듣고 나니 알겠다. 나는 머리를 쓰는 데 약하군.”
“너무 자기비하하지는 말고. 아주 나쁜 것도 아냐.”
“그러니까, 네가 함께 가줘야겠다.”
“나? 왜?”
“너도 결국은 무당에 대항하는 자가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날 제 편으로 포섭할 수도 있지만 이용만 하려고 들 수도 있지. 나는 그런 자들의 의도를 분간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나보고 옥석을 가려 달라?”
“그렇다.”
으음, 고민되는데.
[뭘 고민해요? 당연히 나가야죠! 저 바보가 누구 손에 놀아날 줄 알고요!]
창천을 너무 바보 취급하지 마. 아주 멍청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는 당신이 창천을 제일 바보 취급하거든요?]
아니, 그건 가끔 말이 안 통하거나 일일이 설명을 해 줘야 할 때가 많아서 그런 것뿐이지, 딱히 바보 취급을 하는 건 아니라고.
[그게 바보 취급이거든요?]
“무슨 문제라도?”
내가 널 바보 취급한다고 핀잔을 받는 중……인 게 문제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중대한 문제가 있지.
“같이 나가는 건 괜찮은 생각이야. 하지만, 만약 저쪽에서 좀 나쁜 뜻을 가지고 있다면 난 인질이 되기 딱 좋다고.”
“그건 내가 막을 수 있다.”
“자신이 넘치는 건 좋은데, 상대의 실력이 내 형 정도면 어쩌려고?”
“.……그건, 좀 어렵다.”
“그치? 게다가 상대가 너를 포섭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그래. 일이 잘 안 풀린다면 그렇게 강경하게 나갈 수도 있어. 무당의 피해자라고 무조건 선인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뿐인가? 피해자라는 타이틀은 굉장히 강력한 정의라서, 어떤 이들은 그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더 잔혹한 일을 벌이기도 하고 그 결과에 피해자라는 사실을 들어 합리화를 꾀하기도 한다.
모든 피해자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내 안부가 걸린 일이니 신중해질 수밖에.
그렇다고 이 대형견을 목줄 없이 혼자 나가게 하는 것도 영 안 내키긴 하는데.
생각해보자. 내가 창천과 함께 움직일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인질이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좋아, 이렇게 하자.”
나는 지필묵을 꺼내 정갈하게 글씨를 썼다. 모 월 모 일 자정. 날짜는 같다. 거기에 기존에 상대가 지정한 연화지가 아니라 새로운 장소로 바꿨다.
“장소를 바꾸는 정도로 내가 인질이 될 위험을 완벽히 피하진 못할 거야. 그래도 연화지보단 낫겠지. 뭔가 수작을 부릴 준비를 해놨어도 장소를 옮기면 무용지물일 거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하지만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호랑이를 밖으로 꺼낸다면 적어도 구석에 몰리는 상황을 막을 수는 있다. 그 외의 리스크는 감수하는 수밖에.
“시간 되면 갖다 두고 와. 그쪽도 네가 사전답사를 나올 거라고 예상할 테니 지켜보고 있을 거고, 뭘 두고 가면 확인해 볼 거야.”
“알았다.”
그런데 녀석은 내가 건넨 서찰을 품에 넣고도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다. 표정은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채였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길을 모른다.”
맞다. 이 녀석, 혼자 연화지를 찾아가려다 길을 잃어서 결국 돌아왔댔지.
“밖에 누구 있어?”
작은 종을 울리며 사람을 부르자 장원지기가 달려왔다. 내게 아버지의 죽음을 일러주었던 그에게 창천의 길 안내를 맡겼다.
나름 작전이라면 작전인데 그 작전에 길잡이를 필요로 하는 무인이라니. 갑자기 내 인생의 장르가 코미디가 된 거 같군.
어이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장원지기는 성실히 자기 임무를 수행했고, 창천은 이번엔 길을 헤매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네 예상대로다. 내가 서찰을 두고 자리를 뜨자마자 나타나 챙겨가더군.”
“인상착의는? 아직 밤이 아니라 복면을 쓰긴 애매한데. 뭐 특정할 만한 특징은 없었고?”
“그게……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면? 귀신이라도 돼?”
연화지에 고백을 거절당한 상심에 몸을 던진 후 귀신이 된 이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귀신은 아니었고, 매였다. 서찰을 낚아채곤 창공으로 날아오르더군.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후 이동한 듯했다. 해서 쫓을 수는 없었다.”
[고도로 훈련된 전서응이네요. 보통은 특정 지역과 지역을 오고 가는 정도로만 훈련이 가능한데, 상당히 지능이 뛰어난 영물이군요.]
이로서 상대가 만만치 않은 수준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아마도 내 추측대로 무언가의 모임이나 집단일 가능성도 높고. 그런 건 개인이 다루기엔 유지비가 꽤 든단 말이지.
“좋아. 자정까지 기다려볼까.”
저녁에는 다른 일정이 있었지만 전부 취소했다. 낮에 그런 일도 있어서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으니까. 자정에 나가려면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 * *
전면이 유리로 된 세련된 카페의 구석진 자리. 스마트 워치에선 끊임없이 알람이 울리고 나는 핸드폰으로, 패드로 쉴 새 없이 연락을 받고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다―
정각의 알림과 함께 계속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만날 사람이 있었다. 오후까지 수업을 들을 수 없어 조퇴를 한다고 했다. 병원에서 오는 길일 테니 약속 시간보다 늦을지도 모른다. 그쪽 의사가 제대로 전달했을지 모르겠군.
지이잉―
다시 울리는 알람에 핸드폰을 들여 보려던 찰나, 내가 기다리던 이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