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뭐임? 이게 무슨 난리?”
“무슨 일이냐.”
신생이 도개걸에게 붙잡혀가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해서 실의에 빠진 의원들을 달래고, 당장 그놈의 거지 굴을 다 뒤집어엎어야겠다는 좌표두를 달래 돌려보내고 나자 당당과 창천이 돌아왔다.
[무슨 일? 무슨이일? 지금 그 말이 나오냐 이 녀석들아!]
내 말이 그 말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야 하는 상황에 소 잃은지도 모르는 두 놈이 터덜터덜 들어오자 혈압이 올랐다.
“니들, 뭐 하다 이제 들어와? 애초에 왜 함께 움직이지 않았어? 무한은 넓고 사람이 많아서 길 잃기 쉬우니까 다 같이 다니라고 했잖아. 니들이 없어서 지금 난리 났던 거 알아? 신생이 무한 한복판에서 개방 거지한테 납치될 뻔한 거 아냐고.”
당당과 창천, 둘 중 하나만 있었어도 신생이 도개걸에게 그렇게 맥없이 끌려가진 않았을 거다. 저 둘이 함께 있었다면 더더욱 그랬을 거고. 적어도 신생이 도망칠 시간은 벌었겠지.
“납치?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범죄가 사람 많은 곳 적은 곳 가리는 줄 알아? 애초에 그 노인네는 지가 얘 스승인데 도망을 가서 잡으러 왔다고 떠벌렸다고.”
전생에서도 내가 얘 애비요 하며 뜬금없이 번화가에서 애를 납치해가는 일이 종종 뉴스에 나오곤 했다.
물론 지금 경우엔 도개걸의 말이 맞는 말이긴 했지만.
“어…… 아니, 나는! 오기 전에도 얘기했음! 본가에 연통을 보낸다고!”
당당이 다급히 해명했다. 녀석은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신생과 꽤 친해져서인지 꽤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래. 본가에 재배할 수 있는 약초 종자가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었지.”
“맞음! 사천에서 자라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사천까지 닿는 연통을 찾느라 좀 헤맴!”
“……후, 좋아. 넌 그렇다 치자. 네가 가기 전까지 창천은 같이 있었던 거고?”
“응! 녀석이 있어서 나도 안심하고 감!”
당당은 사유도 있었고 창천이 있었다니까 그래, 그렇다 치자. 나는 창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은근 사고뭉치라니까요? 사건 하나 마무리되고 나면 또 사고 치고, 또! 또!]
그래. 얼마 전 태양의원 연무장에서 우리 형 금감양과 비무를 하다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릴 뻔해서 뒷간 청소를 맡긴 게 얼마 전이다.
그 전에는? 화산지회 예선에서 당당하게 얼굴을 까서 무당의 이목이 태양의원으로 집중되게 만들었지.
그 전엔? 무적단이 쳐들어 왔을 때 지 흥에 겨워서 칼부림을 하다가 장원이 홀랑 탈 뻔하게 만들었지!
“할 말 있냐?”
“…….”
“할 말 있냐고.”
“……이건 부당하다. 거긴 도시 한복판이었다.”
“도시 한복판이어도 납치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이미 설명했고. 너 빼면 다들 무공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인데. 여기 무한이다? 장강 이북의 사람들이 다 몰려오는 곳이라고. 돌아다니는 사람 중 삼분지 일은 무림인일 텐데? 여기서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싸움과 칼부림이 벌어지는 줄 알아?”
“…….”
“그래서 어딜 갔다 왔는데? 일행을 두고 어딜 다녀 왔는지나 알자.”
“잠깐 다녀오려고 했다.”
“그래서?”
“……그러다 길을 잃었다. 이 도시는 넓더군.”
어쩐지 자꾸 말을 안 하려고 들더니 길 잃은 게 쪽팔려서였냐…….
[맥 빠지네요…….]
“됐고, 그래서 어딜 갔다 왔냐고. 나 자꾸 두 번 말하게 할 거냐? 나 지금 힘들어 죽겠거든?”
창천이 어딜 다녀오든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녀석도 태양의원에 소속되어 있고 나는 이 무리의 리더다. 이들이 무한 내에서 벌이는 모든 일은 내 책임 하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적어도 녀석이 우리 일행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장소를 옮기지. 남들에게 말하긴 곤란하다.]
창천의 전음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생과 의원들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조용한 곳을 찾았다.
“여기 오기 전, 한 통의 서찰을 받았다. 무한의 특정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 나오라더군.”
어쩐지. 수련에 방해된다고 방통의원의 일에 끼는 것도 귀찮아하던 놈이 웬일로 무한 같은 대도시 행에 따라 나오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뭘까요? 연서? 하는 짓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딱 연서인데?]
연서라니. 이 녀석의 어딜 봐서?
물론 얼굴은 준수하지만 그거 빼곤 아무것도 없는 놈인데 이놈에게 연서를 줄 소저가 어디 있어?
게다가 무한에서 그 시골에 처박혀 있는 놈에게 연서를 보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볼 일은 봤고?”
“아니. 사전에 장소를 살피러 가려 했다. 연화지의 정자에서 보자더군. 그쪽이 정한 시각은 오늘 자정이다.”
뭐지? 진짜 러브레터인가?
연화지(蓮花池)는 문자 그대로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연못이다. 일대의 풍경이 수려하고 약간 으슥하기도 해서 커플이나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꽃 철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없을 텐데?
“너만 봐라.”
수상쩍은(?) 멘트와 함께 창천이 제 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넸다. 네가 받은 러브레터를 왜 날 보여주는데?
그리고 서찰을 펼쳤을 때, 나는 녀석이 왜 낯선 도시에서 일행을 이탈해 거기까지 갔어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태화산이 태청장원을 불사른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면. 모월 모일 무한의 연화정에서.」
[……연서가 아니군요.]
아니지.
이건 창천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사건에 대한 단서다.
태화산은 무당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니 이 서찰을 보낸 사람은 그 이면의 일을 알고 있다는 뜻.
[근데 우리가 대부분 알아냈잖아요. 무당파가 인체실험을 위해 남궁세가의 핏줄을 찾았고, 자신들이 만든 남궁세가 무공의 잘못된 복제버전을 창천한테 가르쳤고, 창천이 그 내가기공으로 인해 주화입마에 들자 폐기하려 했고요. 그러다 살아남은 걸 보고 더 내버려두기로 했고.]
하지만 추측일 뿐이지.
전모가 다 밝혀진 거나 마찬가지인 일을 확인사살 하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냐만은, 당사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사전답사를 가려다 길을 잃고 돌아온 거라고? 아무한테 말도 안 하고? 이걸 보낸 사람이 무슨 의도로 서찰을 보냈는 줄 알고?”
“그야 우리 집안의 비사를 알려주려고―”
“그 비사를 일으킨 주체가 보냈을 수도 있잖아. 널 제거하려고.”
“……!”
“적의 적인 척 사람을 꼬여내서 함정에 빠트리는 건 꽤나 고전적인 수법 아닌가? 누굴 상대하는 건지 잊은 모양인데, 그들을 상대하려면 무공만 강해서 되는 게 아냐. 고민을 하고 싶지 않으면 적어도 나한테 의논이라도 하라고.”
“……알았다. 내가 조심성이 부족했군.”
“뭐,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거고. 진짜 널 제거하려는 쪽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굳이 무한까지 불러낼 필요는 없잖아.”
“어째서지?”
“내가 그들이라면 무한을 작업 장소로 고르진 않았을 테니까.”
단기간이었지만 양양에 체류하는 동안 무당의 사람들을 겪어봤다.
그들은 위선자다.
뭐, 홍령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보이는 모습이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행동 원리가 그렇다고 봐도 되고.
속내만 딴생각을 하고 겉으로는 착한 척을 하는 위선자가 아니라, 실제 행동은 더러워도 자신이 고결하고 깨끗해 보이길 원하는 위선자.
그런 타입들은 자신들의 지저분한 짓을 깔끔하고 조용히 처리하길 바라지.
그걸 위해서 무한은 별로 적합한 곳이 아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라는 말도 있잖아요?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사건이 일어난다면서요.]
그럼에도 미제로 끝나는 사건이 거의 없는 게 무한이기도 하지.
여긴 일단 보는 눈이 많다니까?
전생에도 우리나라의 검거율이 높았던 이유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와 블랙박스들 덕분이었는걸.
연꽃 철이 지난 연화지라도 조용히 살인멸구를 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라고.
사람은커녕 짐승도 다니지 않는 험지가 널리고 깔린 게 무당산의 지맥인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손 쓸 필요 없잖아?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굳이 무한까지 오라고 장소를 지정한 걸 보면, 널 포섭하려는 의도일지도 몰라.”
“포섭?”
[창천을요? 누가? 왜요?]
오랜만이군, 이런 상황.
나는 한 사람과 한 귀신에게 내 추측을 설명하기 위해 서찰의 한 부분을 짚었다.
“서찰의 발신인, 이 사람은 왜 굳이 무당이 그 비사를 일으킨 걸 알고 있다고 썼을까?”
“내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겠지.”
“좋아, 그것도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 이전에 너를 시험하는 거지.”
[아! 창천이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으니까, 얼마나 아는지 시험해 본 거군요?]
“화산지회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뭐, 모르고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어쨌든 진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본 거지. 정보력이든 뭐든 가늠을 해 본거야. 의지를 본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 다음은 장소다.
“발신인은 하필 그 많은 곳 중에서 접선지로 무한을 골랐어. 아까도 말했듯이 멀고 사람도 많은 곳에 말이야. 여긴 살인멸구를 하기엔 썩 적합하지 않지만 접선을 하기엔 괜찮은 곳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접선을 하니까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거든. 게다가 사람이 많으니까-”
“누가 오고 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상대는 꽤 눈에 띄는 인물인가 보군요.]
그치. 무한의 인파에 묻힐 수는 있어도 북촌에서는 확실히 눈이 가는 인물.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
아니면 그쪽이 무한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보상. 화산지회에서 네가 떠들었잖아. 그날의 진상을 고하는 사람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그래서 말인데, 너 그만한 돈 있어?”
“……없다.”
녀석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에 나를 약간 원망하듯 보는 걸 보니…… 이 자식, 진짜 내가 내줄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천은도 아니고 천금이면 나한테도 엄청 큰돈이거든? 보통 사람에겐 인생을 바꿀 돈이라고. 애초에 너, 그 발언하기 전에 나랑 상의도 안 했잖아. 제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상의 좀 해주면 안 되냐?”
“……노력해보지.”
아, 열 받아서 얘기가 샜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지만 말 안 듣는 대형견은 정말 진땀 빠진다고. 말 좀 듣자, 이 멍멍이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