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02화 (102/350)

102화

“신생. 무리하지 않아도 돼.”

“이, 이건 제가 해야 해요.”

신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손을 쥔 손에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나도 질세라 그 손을 꽉 잡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신생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아이는 도개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 안 가요. 스승님이 제게 새로운 삶을 가르쳐 주셨어요. 사람을 해하는 길이 아니라 살리는 길을요. 제게 이 검을 주셨어요. 저는, 저는!”

[그래, 잘한다! 힘내!]

“지금이 좋아요. 태양의원의 신생으로, 의원이 되어 살 거예요!”

그 말과 함께 신생에게서 지금껏 본 적 없던 기세가 터져 나왔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의 기운이었지만 아까 도개걸이 뿜어댄 살기처럼 내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미지근해서 기분 좋은 온도의 물이라도 갑자기 폭포처럼 쏟아지면 움찔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

[엄청나요. 기세만으로는 개방 방주에게도 밀리지 않아요. 세상에, 이럴 수가……!]

이 어린 아이가 개방 방주에게 밀리지 않는다니. 허나 홍령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도개걸이 난감한 기색으로 타구봉을 꺼내들었으니까.

“진짜 해볼 생각이냐? 네놈이 개방의 거지임을 잊은 동안 그 실력이 녹슬고도 남았을 텐데?”

“사부님도 나이가 드셨고요. 그래도 힘들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를 못 가게 막으신다면, 싸울 거예요!”

안 싸우면 안 될까?

나는 신생의 손을 꽉 쥐었다.

당당하게 말하긴 했지만 신생의 어깨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 그 떨림이 더했다.

부모를 거스르는 일은 성인이 되어서도 힘든 일이 아닌가.

하물며 상대는 개방의 방주. 신생의 기세가 못지않다고 하지만 신생이 이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좋아, 쓰자.

“보은패를 쓰겠습니다. 개방 방주를 막아주십시오!”

“보은패? 뭔 소리다냐?”

도개걸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나는 품 안에서 보은패를 꺼내 높게 치켜들었다.

전날 좌수검의 팔을 수술해주고 받았던 보은패.

그것을 들어 올리자 마치 매가 사냥감을 채어가듯 하늘에서 날아든 누군가가 그것을 잡아채고 바닥에 착지했다.

외팔의 무인이 딱딱한 얼굴을 한 채, 나와 도개걸의 사이에 섰다.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채다니. 내가 그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 같군.”

좌수검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은 홍령 덕분에 알았다.

외팔의 무인이 흔한 건 아니잖아? 그가 이곳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 내가 과감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차하면 사용할 패, 문자 그대로 보은패가 내 품에 있었으니까.

협의에 어긋나거나 무인의 신념을 어길 정도가 아닌 수준의 일, 아니, 본인이 납득하지 못할 일이라도 보은패의 소유자가 요구하면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게 이 명패가 가진 힘.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걸.

“허나 이것은 돌려주도록 하지. 보은패를 돌려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뿐이니 넣어두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내 나름대론 꽤 큰 결심을 하고 꺼낸 건데.

그렇다고 돌려주는 걸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이만한 고수의 힘을 빌릴 기회는 드무니까.

“대충 사연은 들었네. 내 얼굴을 봐서 이들을 보내주는 게 어떠한가?”

“……지금 내 귀가 잘못됐나? 다 들었다고? 다 듣고도 지금 저 새끼 편을 들겠다?”

“그렇네.”

“외팔둥이 새끼가 돌았구만, 돌았어! 어디서 수술을 받았다더니 뇌를 꿰맸나? 저 새끼가 금왕의 막내아들이라니까! 나만큼이나 그 작자에게 원한이 있는 게 네놈 아니더냐? 그런 네놈이 금가의 핏줄에게 보은패를 줬다고?”

좌수검이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다고?

이건 나도 모르는 얘기였다.

수술 이전에는 좌수검이라는 사람을 몰랐기도 했고.

아버지가 금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위에 서기 위해서는 항상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야 한다. 그게 상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생에서도, 대기업들의 화려한 금자탑 아래 누군가의 피눈물이 만든 강이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던가.

신생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좌수검이 등을 돌린다면―

“그때는 그자가 원수의 아들인 것을 몰랐지. 허나 내가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 미친 새끼!”

“그러는 방주야말로 저 아이를 찾느라 다른 개방의 일에 소홀하다는 말을 들었소만, 지금 보니 정말인 거 같군. 내가 불의의 사건으로 하나 남은 팔을 잘렸고, 그 팔을 붙인 의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니. 대의를 위함에 있어 사명을 잊은 것은 오히려 방주가 아닌가?”

“시꺼! 네놈이 뭘 알아? 저 새끼만 있으면 우리 복수는 일도 아니라고! 알았으면 당장 그 앞에서 비켜!”

도개걸과 좌수검의 대치는 살벌했다.

누구 하나 쉽게 무력을 쓸 거 같진 않았지만, 차라리 힘으로 싸우고 결론을 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나와 싸우겠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네.”

“허, 돌겠군. 팔을 붙였다더니 금가 놈에게 아주 푹 빠졌구만! 왜, 저 금가 놈이 죽은 자네 정인을 다시 살려주기라도 하겠다던가!”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 말지.”

“선을 넘은 건 네놈이야!”

“……나는 그저, 우리의 일이 후대에게까지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네. 우리의 일은 우리끼리 하세.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빚을 떠넘기지 말고.”

[좋아, 지금이에요!]

홍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신생의 손을 잡고 달렸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신법을 다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챙―! 챙챙―!

날을 세운 검이 단단한 무언가와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 아마도 좌수검이 도개걸의 타구봉을 상대하는 소리일 것이 분명한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어딜! 윤모야! 가서 저 새끼 잡아 와라!”

“예?! 아, 예!”

“어디 하나 부러져도 괜찮다! 금가 놈은 죽여도 돼! 내가 책임진다!”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누군가 나와 신생을 뛰어넘는 속도로 빠르게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좀 더, 좀 더 빨리요!]

지금이 최대 속도라고!

종아리에 심장이 달린 듯 근육이 터질 듯 뛰고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경혈의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내기를 뽑아내자 몸이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거다.

그래도 달렸다.

소용없을 게 분명하지만, 달렸다.

두근―

심장이 불길하게 뛰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한계였다. 무릎이 털썩 꺾였다. 내가 주저앉은 사이 개방의 무한 지부장인 윤모가 빠르게 우리를 따라잡았다.

“이거 미안하구만. 나도 본의는 아니네만, 우리 왕초가 말하면 따라야 하는 입장이라.”

“스승님께는 손대지 마세요!”

“나도 물주에게 관심은 없다! 너만 얌전히 오면 돼!”

[세상에, 썩어도 준치라더니. 무한 지부장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에요! 신생이 잡히면 안 되는데……!]

홍령이 발을 동동 굴렀다. 젠장, 그때처럼은 안 되나?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홍령이 내 몸에 대신 빙의했던 것처럼?

[안 돼요! 지금은 그랬다간 정말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몰라요! 꺄악, 신생!]

내 흐릿한 시야에도 윤모의 손이 신생의 멱살을 틀어잡는 게 보였다. 신생의 단검이 맥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반항하지 마라, 꼬마야. 팔다리 하나쯤 부러트려도 된다고 했지만 그랬다간 왕초가 날 가만히 안 내버려 둘 거라고. 너만 가만히 있음 우리 고객님도 너도 안 다치고 얌전하게, 악―!”

[뭐, 뭐예요, 저건?!]

개다.

어디서 비루먹은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선 윤모의 정강이를 콱 물었다.

“아악! 놔, 놔!”

윤모가 타구봉을 휘휘 휘두르며 개를 위협했지만 개는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그 덕에 신생은 윤모의 손에서 풀려났다.

좋아, 지금이다!

“아무나 금가장에 연락을! 일 보(報)에 백 은!”

없는 힘을 쥐어짜 외친 소리. 길을 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거지들의 싸움이라 관심을 두지 않던 이들도 어디선가 몇 번 들어봤던 ‘그 소리’에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금가장의 막내 도련님이잖아?”

“서둘러! 금가장에 제일 먼저 알리는 자가 은 백 냥을 받는다!”

내 가면을 알아본 사람들이 어디론가 분주하게 뛰어갔다.

일부는 제 다리로 뛰어가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는지 내 주변으로 모여 나를 부축했다.

쓰러진 나를 돕기만 해도 금가장이 보상을 해주었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쪽은 뭐요? 비켜봐요, 비켜. 금가장의 도련님이 쓰러져 있잖아.”

“왜 거지가 여기까지 나왔대?”

“저거 굴다리 밑에 왕초거지 아냐?”

사람들이 나와 신생을 둘러싸며 인의 장벽을 쌓았다. 나를 부축해주는 사람 외에도 걱정의 말을 건네는 사람, 어슬렁거리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사람 등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왕아! 괜찮아, 그만해!”

“아오, 이걸 팰 수도 없고!”

아무래도 그 개는 신생이 잘 아는 개인지, 신생이 개를 부르자 개가 왕! 소리를 내며 윤모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윤모를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윤모는 몰려든 사람들이며 개에게 물려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보고는 침을 퉤 뱉었다.

“쳇, 어쩐지 시내로 뛰더라니만은. 방주한테 겁나 깨지겠구만. 그래도 밥그릇 깨먹는 것보다야 낫겠지. 걸왕이 끼어들었다는데 방주도 할 말 없을 거고. 에라, 운 좋으셨수 손님. 담에 봅시다!”

윤모는 혼자 꿍시렁꿍시렁 대더니 이내 오던 길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도개걸이 쫓아오지 않는 걸 보면 좌수검이 그를 잘 잡아뒀거나 단념하게 만들었겠지.

휴, 살았다.

“왕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고?”

신생은 갑자기 나타나 윤모를 물어버린 개에게 다가갔다. 그 비루먹은 개는 숨을 헉헉대다가 신생이 다가가자 털이 듬성듬성 빠진 꼬리를 바쁘게 흔들어대다가 이내 왕! 짖고는 윤모가 간 길로 뒤뚱뒤뚱 뛰어갔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왕표국의 표사들이 달려왔다.

무한으로 오는 길을 함께했던 좌 표두가 씨근덕거리며 달려와선 당장 굴다리를 뒤집어 놓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걸 말리고 전장의 장원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원도 야단이 나 있었다.

“금 의원님! 신생!”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장원의 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신생과 함께 나들이를 나갔던 의원들이 난리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신생을 그만…….”

“어서 장원으로 달려왔는데 금 의원님도 안 계시고 해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다들 자책할 필요 없어요. 상대는 개방의 방주였으니까. 웬만큼 무공을 익힌 사람도 상대가 안 됐을 거예요. 그리고 장원에 서둘러 돌아와 알린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내가 시중의 사람들에게 금가장에 전달하라고 외치긴 했지만 그 전에 금왕표국이 신생을 찾고 있었단다. 좌표두가 중간에 금가장에 달려가던 사람을 만나서 빠르게 우릴 찾아온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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