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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01화 (101/350)

101화

내가 정체를 밝혔을 때 도개걸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주의를 돌릴 수는 있을 것이다.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분노를 토할까?

아니, 여기는 무한이니까 아무리 개방 방주라도 조심할지 모른다. 아버지 금왕과 사이가 나쁘다고 해도 여기도 거지들이 사는 곳이니까.

솔직히 무한이 금가장의 텃밭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금가장의 영향력이 무시 못 할 정도긴 하지만 금가장의 밥을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동네란 말이다.

하지만 거지들은 그럴 수 없다. 금가장은 거지들에게 가장 큰 밥줄이다. 방주라고 해서 그들의 입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무모해요. 저 개방 방주라는 저는 정말 초일류 고수라고요.]

어쩔 수 없잖아. 신생을 구하려면 위험을 감수할 수밖엔.

열심히 눈짓으로 도개걸이 나를 노려보는 동안 도망칠 틈을 찾으라고 신호했지만 신생은 덜덜 떨며 나와 도개걸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얼어붙었어요. 틈을 타서 도망치게 하는 건 안 될 거 같아요.]

그리고 도개걸이 움직였다.

“가져가라.”

도개걸은 내가 예상한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졌을 뿐, 그는 저 멀리 굴러간 병마개를 주워 고량주 병을 단단히 밀봉하고는 다시 내게 건넸다.

“금가장의 손을 탄 것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먹지 않기로 맹세했다. 가져가.”

그의 얼굴은 비장했다.

그냥 사이가 대차게 안 좋은 집안의 자식을 대한다기엔, 뭐랄까. 그 이상의 태도가 느껴졌다. 어떠한 사명감이나 고결함 같은 거 말이다.

대체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냥 받아주시죠. 꽤 비싼 겁니다. 받으시고 억류하고 계신 제 제자를 돌려주세요.”

“제자?”

도개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신생,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돌아가자.”

“스, 스승님……!”

신생이 도리질을 쳤다. 나에게 오기 싫다는 게 아니다. 그러지 말라는 거다. 도개걸을 도발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면 내가 위험해질 테니까.

“호오, 이거 봐라. 이 새끼, 항주에서 튀어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거지새끼가 되어서 금가 놈 밑에 들어갔다?”

“방주 어른. 말은 제대로 하시죠. 신생을 보세요. 저 아이의 어디가 거지입니까?”

도개걸의 눈이 돌아갔다.

내 말마따나 신생은 더 이상 거지의 차림새를 하고 있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자서 키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컸고, 얼굴은 뽀얗다.

평소에도 내가 사준 말끔한 옷을 깨끗하게 세탁해 입고 다녔지만 무한에 오는 데다가 명절이 코앞이고 하니 비단옷을 새로 해 입히기까지 했다.

엉거주춤 다니는 거지들과 달리 자세도 곧아져서 옷걸이가 살았다. 영락없는 귀공자였다.

“흥, 돼지 목에 진주 건다고 돼지가 아니게 되더냐? 신생 이 새끼는 내가 동냥젖을 받아 먹여 키웠어! 옹알이 대신 구걸을 배웠고 걷기도 전에 타구봉을 들었다! 이놈은 타고나길 거지야!”

“그게 신생이 원해서 선택한 겁니까? 아니잖아요?”

나는 한발 더 나아가 도개걸의 앞에 당당히 맞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도개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겠지.

여기는 그런 곳이니까.

타고난 자질이나 이름, 물려받은 가업 따위가 인생을 결정해버리고 시작하는 문화가 지배적이니까.

신분제가 존재하고 기회는 제한적이며 평생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은 땅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저 애는 거지였어요. 배가 고파서 행인을 덮쳐 그 식사를 빼앗으려고도 했고. 그건 실패했지만 정보를 팔아 배를 채웠죠. 그때만 해도 거지였죠. 그거 외의 삶은 아는 게 없었을 테니까요.”

나는 신생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물론,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다.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맥을 짚었을 때 내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걸 싫어했으며, 싸움이 있을 때는 공포에 질려 패닉에 빠졌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사람이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면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공황발작 등의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증후군이다.

보통 전쟁이나 교통사고 같은 특수 상황을 겪어야 발병한다는 인식이 크다.

하지만 따돌림이나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는 물론, 보통 사람에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 어떤 이에게는 굉장히 큰 압박으로 다가와 PTSD가 발병하는 경우도 있다.

PTSD의 증세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건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것과 비슷한데, 어떤 경우엔 영문 모를 고열이 나기도 하고 신체 부위가 잘 움직이지 않는가 하면 어떤 경우엔 사고와 관련된 기억을 잃기도 한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해 본인이 체내에 쌓아온 내공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까?

[본인이 정말 무공을 버리고 싶었다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죠. 사람의 몸은 우주와 같이 신비로우니까요]

나를 만났을 때, 신생은 고작 열 몇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애였다. 그리고 지금 또한 어린애다.

“저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한 적 없고, 의술을 익히라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다양한 것을 경험해 본 후 신생이 직접 선택한 겁니다.”

나와 붙어 있었으니 가장 많은 영향을 받긴 했겠지만, 나는 신생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객잔의 숙수에게 요리를 배워보라든가, 농사에 관심을 가져보라든가, 글을 읽을 줄 아니 공부를 해보라든가.

전생에 비해서는 선택할 수 있는 밥벌이 수단이 적지만, 난 신생이 뭘 선택하든 도와주고 지지해줄 수 있었다.

“타고나길 거지라고요? 아뇨, 방주께서 신생을 거지로 만드신 겁니다. 그렇게 세뇌를 해서요.”

“뭬야?”

“거지가 나쁘단 게 아닙니다. 뭐, 통념적으로는 부모가 자식에게 추천할 만한 직업은 아니긴 하죠. 하지만 개방의 거지는 다르다는 걸, 그것도 개방 방주의 적전제자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지나가는 개한테 물어도 알 겁니다.”

소유한 것이 없어 집착이 없고 자유로움을 만끽한다는 개방의 풍류는 글쎄, 난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보다 확실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구파일방의 개방이다.

태청의문에서도 구파의 일원인 무당파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구경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들이 구파에 더해 일방이라는 사족을 하나 더 붙여 자신들과 같은 취급을 해도 납득하는 곳이 바로 개방.

정보를 다루는 다른 문파인 하오문은 올라갈 수 없는 자리에 떡하니 앉아서 그 어느 곳에도 거지가 없는 곳은 없다며 큰 소리를 떵떵 치는 문파.

모르긴 몰라도 그 개방 방주의 적전제자는 그냥 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거다.

“그런데 말입니다, 거지로 태어나 거지로 살았고 개방 방주의 적전제자이기까지 했는데.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오죽했으면.

저 어린애가 오죽 힘들었으면 도망쳤을까. 항주에서 도망쳐 이 먼 곳까지 왔을까.

사람을 해하는 일이 성정에 안 맞았건,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수반된 체벌과 폭력이 고통스러웠건, 혹은 그 이상의, 무인이 내공을 잊게 만들 정도의 일이 있었건.

저 나이에 자신을 젖동냥해서 키운 부모 같은 이를 떠날 정도의 일이라는 건 어떤 의미겠냐고.

“그건 저 새끼가 어려서! 아직 뭘 몰라서 그래! 십만 방도의 으뜸이 되어야 할 놈이, 그래, 그때도 그랬지! 애새끼가 개새끼 한 마리 죽인 게 뭐 대수라고! 거지새끼가!”

방주의 말에 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개라.”

[그냥 개가 아니었겠죠. 그냥 개였으면 신생이 저런 얼굴을 할 리가 없죠.]

“설마 해서 묻는데, 신생과 형제처럼 자란 개였습니까?”

“형제는 무슨. 국 끓이려고 주워왔는데 너무 쬐깐해서 좀 더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했던 것뿐인 것을. 거지가 개 잡아 먹는 데 뭐 문제 있냐?”

전생에선 개 식용 문화가 거의 저물어갔지만 여긴 아직 농경사회고, 밭을 가는 소나 말보다는 개가 더 만만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돼지는 제대로 키우려면 제법 많이 먹여야 해서 가성비가 안 나오고.

그래. 거지가 개 잡아먹는 건 그럴 수 있지.

[……애초에 타구봉법부터가 개 때려잡다가 발전한 무공이니까요. 그럴 수 있죠.]

“안 되겠다. 더 이상 말 해봤자 소용이 없어. 신생, 가자.”

“스, 스승님…….”

신생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끌었다. 그 작은 손에 식은땀이 축축할 정도로 배어 나와 있었다.

내가 잡아끌자 신생은 얼어붙은 다리를 겨우 한 발짝 뗐다.

“이것 봐라. 이 노구가 이 무한 땅에서 이목 끌기 싫어서 가만히 말 상대를 해주었더니. 이 거지가 그렇게 우습더냐?”

“우습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홍령이 인정하는 초일류 강자가 내뿜는 살기는 마치 무형의 것처럼 나를 쑤셔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절로 몸이 반응해 뒤로 몇 발짝이나 물러났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너저분한 꼴을 보였겠지.

“내 손, 놓지 마.”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체념한 듯 내 손에서 제 손을 빼려는 애를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신생은 저를 선택했고, 저는 이 아이의 스승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기어이 벌주를 받겠다?”

도개걸이 나를 향해 고량주 병을 집어던졌다. 주먹만 한 크기의 술병이지만 무림 고수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자체로 무기가 된다.

“합!”

거기에 작은 기합과 함께 쏘아낸 장풍이 술병을 산산조각 냈다.

[조심해요!]

근거리에서 산탄총을 맞게 된 상황.

내가 대응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배짱을 부린 거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짓이었다.

[신생!? 안 돼, 내공 없이는 무리―]

바람처럼 빠르게 내 앞을 막아선 신생이 내가 준 단검을 뽑아들더니 휘황찬란한 속도로 단검을 휘둘렀다.

눈앞에 비눗방울처럼 프리즘 빛이 일렁이는 신비한 막이 펼쳐졌다.

[세상에, 검막이라니!]

진짜 검기가 막처럼 펼쳐진 것인지 아니면 신생이 단검으로 모든 파편을 쳐낸 것인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신생의 발밑에 파편 조각들이 푹푹 박혔다.

“이 새끼가, 내공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구만? 클클, 좋아. 잘됐다! 애새끼가 멍청하게 스스로 제 단전을 빠개버린 줄 알았더니!”

“아, 안 가요. 안 갈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신생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제대로 도개걸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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