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100화 (100/350)

100화

“내리자. 여기부터는 말이 들어갈 수 없으니.”

슬슬 이쯤 오자 나도 누님이 어딜 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오물이 흐르는 수로. 그 위에 놓인 다리. 말이 다니지 못하는 길.

굴다리 밑에는 이 시궁창 같은 동네에서도 집을 구하지 못해 지붕을 찾아 기어든 이들의 삶이 있기 마련이지.

“거지아이야, 왕초에게 금가에서 왔다 전하거라.”

누님은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려고 애쓰는 어린 거지에게 금편 하나를 튕겨주었다.

번쩍이는 금덩이가 음식물이 뒤섞인 동냥그릇에 푹 빠졌다. 거지는 더러운 손을 동냥그릇에 넣어 금편을 꺼내보더니 썩은 푸성귀가 묻은 금편을 와작 씹었다가 퉤 하고 무언가를 뱉었다.

[세상에, 이빨이 깨졌나 봐요. 진짜 금이 아닌가?]

아니, 진짜 금 맞을걸.

금이 아무리 연성이 강한 금속이라지만 영양 상태가 극도로 나쁜 데다 관리도 안 된 치아가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무른 건 아니니까.

그 증거로 거지가 입에서 꺼낸 금편에는 어설픈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기다리셔.”

어린 거지는 금편을 들고 안으로 향했다. 굴다리 밑에는 짚이나 천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어설픈 움막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거지는 다른 곳들을 제치고 그중 제일 큰 움막으로 들어갔다.

“개방의 무한 지부장을 만나는 거죠?”

“그래. 거지들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하오문이 다루지 않는 것이라면 이들이 알 거야. 기루와 객잔이 도시에 몰려 있는 것에 비해, 거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 거지죠.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꼭 필요할 때는 없고. 이상한 자존심이 있어서 부른다고 오지도 않아요. 지금도 봐요. 당신 누님이 이런 오물 밭에 직접 행차할 만한 위치냐고요. 삼시 세끼 거르는 게 일인 인간들이 밥을 준다고 해도 거들떠도 안 보고. 꼭 안 왔으면 할 때에 온다니까.]

홍령이 거지들에 대한 악감정을 늘어놓았다. 거지를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이야? 신생을 대할 땐 괜찮았잖아?

[신생은 괜찮아요. 내가 말하는 건 그냥 거지가 아니라 개방 거지예요. 뭐, 엄밀히 말하면 모든 거지는 개방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요. 저 거지의 허리춤에 있는 매듭 보여요? 개방의 정식 방도는 다 저런 너저분한 매듭을 허리에 달고 다녀요. 저런 놈들이 싫다는 거라고요.]

큰 움막에 들어갔던 거지가 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누님에게 뭔가를 던졌다.

누님은 얼결에 그걸 받아들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설픈 이빨자국이 난 금편.

좀 전에 누님이 건넨 그거였다.

“왕초가 그러는데, 개방의 동냥그릇이 죄 깨져도 금가장의 일은 안 받는다고 전하래유.”

“뭐? 여태 잘 거래해놓고 갑자기 왜―”

“그리구 빨리 꺼지래유. 없는 동냥그릇 빠개기 싫으면.”

[이거 봐요! 개방 놈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라니까요? 그때도 그 거지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어휴!]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여태 잘 거래해오다가 갑자기 문전박대를 한다고?

[이상할 것도 없어요. 만한전석을 차려놔도 싫다고 하다가 갑자기 남이 다 먹은 뼈다귀 달라고 바닥에 드러눕는 개자식들이라구요. 그냥 돌아가요.]

개방의 동냥그릇이 죄 깨져도 금가장의 일은 안 받는다, 라.

“금가장이 개방하고 척 질 만 한 일이 있었던 거 아니에요? 누님 말고 다른 형제들이라도.”

“그럴 리가 없잖니. 개방과 하오문은 금가장이라고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오히려 얼마 전, 아버지 사당에 공물을 올렸을 때 그 공물을 대부분 여기 거지들이 가져갔는걸. 이들이 나를 이렇게 문전박대할 만한 일이 있을 리가 없어.”

누님은 진짜 당황한 눈치였다. 갑작스러운 태도 돌변이다 이거지?

“아, 빨리 가라니까유? 왕초가 빨리빨리 가랬어! 일 나도 책임 못 진다 했어유!”

우리가 가지 않고 서 있자 거지도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여차하면 우리를 이 굴다리에서 밀어 쫓아낼 기세였다. 하지만 선뜻 누님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혹시 무한에 개방 방주가 왔나?”

“!”

거지의 얼굴이 동냥그릇 빠개지듯 일그러졌다. 정답이군.

“그게 무슨 소리니? 개방 방주라니.”

“무한이 큰 도시긴 하지만, 고작 무한 지부장이 개방 전체를 걸고 개방의 동냥그릇을 논할 리는 없고. 거기에 누구를 찍은 게 아니라 금가장 전체를 찍은 거니까요. 그 정도 발언을 하려면 개방 방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예전에 아버지가 지나가듯 한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개방 방주가 아버지랑 안 좋은 일이 있었다나. 그래서 무한에는 절대 오질 않는단 얘길 하셨어요.”

왜 사이가 안 좋은지는 모른다. 아버지 금왕이 하던 얘기 중 뭐 하나 원인을 명확히 알려주던 게 있냐만은, 그래도 이번 건 좀 상상이 간다. 천하제일상단과 천하제일거지. 사이가 좋으면 이상하지 않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방주가 언제까지 무한에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봐서 다시 오자꾸나.”

“아뇨. 누님은 돌아가세요. 저는 볼 일을 끝내고 갈게요. 이봐, 이거.”

나는 품에서 금편 두 개를 새로 꺼내들었다.

“내 이름은 금태양이다. 금가장의 눈 밖에 난 막내라는 건 알고 있지? 이걸 왕초에게 전해줘. 하나는 네 몫.”

“나참, 그런 꼼수가 통할 거 같아유?”

“일단 가서 얘기나 해보라고. 누님은 돌아가요. 난 괜찮으니까.”

금진양은 머뭇머뭇하다가 이내 자신이 있으면 될 일도 안 될 거라는 사실을 납득하곤 자리를 떴다. 내가 금가장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왔다고 주장해도 누님과 함께 있으면 그 주장이 희석될 뿐이니까.

우리가 타고 온 마차가 누님을 태우고 다시 멀어지기 시작할 즈음, 움막에서 시커멓고 큰 덩어리 같은 게 불쑥 튀어나왔다.

“아, 진짜 돌아 버리겠구만! 돌아가라는데 왜 말을 안 쳐듣고 지랄이야, 지랄은! 이 새끼는 뭘 또 얼마나 처먹었길래 일단 한번 나와 보라고 지랄이고! 아주 돌아가질 않아서 돌아버리시겠다!”

[무한 지부장이 저 거지군요.]

거지는 작달막한 키에 거지 치고는 몸집이 있어서 정말 둥그런 공 같아 보였다. 거지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서는 내 가슴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머리를 척 치켜들었다.

“네가 그 금가장의 미운 오리 새끼냐? 들은 것보다는 멀쩡해 뵈는데?”

“태양의원의 금태양이 개방 무한 지부장께 인사드립니다.”

“헹, 어디서 낯간지럽게. 아무튼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꺼져라. 그 늙다리가 금가장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라고 봐줄 거 같아? 방주는 평생 무한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한 인간이야. 금가장 때문에 꼴도 뵈기 싫다고 이쪽 일은 평소에 신경도 안 써서 나 혼자 해먹기 좋았는데, 갑자기 튄 제자 새끼 얘길 들었다고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제자요?”

“그래, 제자! 그 늙다리가 말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새끼 거지를 하나 주워 와선 제자로 들였는데, 그 새끼가 튀었다고. 항주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안 나와서 다들 뒤졌나보다 했는데, 갑자기 이 호북 근방에서 그 새끼를 봤다는 거지들이 나와 가지고 그 늙다리가 여기까지 온 게야!”

…….

“뭐, 늙다리가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만한 놈이긴 해. 나라도 그런 놈이 제자였으면 살아 있다는 소문만 들어도, 아니 머리카락만 보여도 찾아갔겠지. 그 쬐끄만 게 무재는 참 출중해 가지고 말야.”

…….

“방에서 전국대전 할 때 각 지방 지부장들이 제자를 데리고 모여서 한 판 붙게 하는데, 그때는 솔직히 늙다리가 끝내주게 부러웠지. 타구봉 하나로 여기저기 고루고루 후두리찹찹 까대는데 모든 제자가 나가 떨어졌으니. 쩝, 늙다리가 침 바르기 전에 내가 딱 찝었어야 했는데.”

…….

[……당신, 지금 나랑 같은 생각 하죠?]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지금도 그 애새끼를 무한 거리 어딘가에서 본 거 같다는 놈이 있어서 뛰쳐나갔는데, 슬슬 돌아올 때가 됐어. 걸리면 좆 되니까 빨리 돌아가. 아오, 내가 빡쳐 가지고 별 소리를 다 지껄였네. 많이 떠들어 줬으니까 준 금편은 정보 값으로 받아간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그 제자, 이름이 혹시 어떻게 돼요?”

“이름?”

무한 지부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기억을 더듬는 얼굴이었다. 아니어라, 제발 아니어라…….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었지. 신년에 태어나서 신생이라고 했던가?”

젠장.

“놔요, 이거 놔요! 놔주세요!”

“시끄럽다! 야, 윤모야! 객잔에 가서 돼지 대가리 삶은 거랑 죽엽청주 좀 사오거라! 오늘은 기쁜 날이니 좀 마셔야겠다!”

무한 지부장이 기겁을 하면서 나를 밀어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 정도는 하고 가려고 했지만, 이제 더더욱 그냥 갈 수 없게 되었다.

“가라고, 가라니까?!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

“뭐 하냐, 윤모야? 고기 사오라니까? 이놈은 뭐고?”

개방 방주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하얗게 샌 숯 많은 머리가 까치집을 이루고 있다거나, 낡디낡은 옷에 그 유명한 타구봉을 한 손에 들고 있다거나, 허리춤에 홍령이 말한 매듭을 주렁주렁 아홉 개나 달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한 손에 신생의 멱살을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 스승―”

신생은 나를 알아보고는 텁 입을 닫았다.

여기서 나를 아는 척하는 게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스승? 아니, 이 새끼가 이상한 말을 하네. 네가 언제 나를 스승이라 불렀냐? 사부라 부르라 했지! 또 맞아볼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니, 저 노친네가!

[진정해요! 상대는 개방 방주라고요!]

전에는 홍령이 흥분하고 내가 가까스로 홍령을 막았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방주에게 달려들려던 걸 홍령이 빙의해 내 두 다리를 붙들었다.

아니, 그치만 저 인간이 애를 패잖아!

“하따, 오랜만에 만나니 애가 부실해졌어. 내공도 다 어딜 갔는지. 폐인이 된 건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윤모야, 아직도 안 갔냐?”

“예, 예! 다녀오겠습니다!”

무한 지부장 윤모가 개방 방주의 눈빛에 서둘러 자리를 떴고 그 자리에는 나와 개방 방주, 그리고 신생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거지들은 방주의 눈치를 보는 탓인지 움막으로 기어들어 갔거나 나오지 않았다.

“넌 뭐냐? 윤모 놈에게 볼 일이 있나? 그럼 기다렸다가 일 봐. 지금은 내가 심부름 보냈으니까.”

“아뇨, 저는 선배님께 볼 일이 있습니다.”

“응? 나? 너, 날 아냐?”

“예. 사통팔달(四通八達), 그 어느 곳에도 귀가 있고 그 어느 곳에도 발이 있는 십만 개방도의 정점이자 흑죽으로 만든 타구봉의 주인인 개방 방주 도 개걸(丐乞)이 아니십니까?”

도는 그의 성이고 개걸은 별호다. 원래 이름이 뭔지는 불명인지 일부러 감추는 것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들었다.

“쩝, 이 새끼 뭐냐? 어디 가문 놈이기에 이렇게 번지르르한 말을 지껄이누? 야, 윤모야. 이 새끼 뭐야. 아, 내가 심부름 보냈지? 미안허다, 내가 머리가 이렇게 흴 때까지 살다 보니까 머리가 약간 맛이 갔거든. 낄낄. 그래, 네놈은 누구냐? 자기소개를 하려면 그럴싸한 술 한 병이나 내놓고 말을 해야지 않누? 니들 애비가 그리 가르쳤느냐?”

“술이라면 여기 있습니다.”

나는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던졌다. 도개걸은 술병의 마개를 뜯어 냄새를 맡아보더니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녀석, 뭘 좀 아는 놈이구만. 품 안에 이런 고량주를 넣고 다녀? 겉보기엔 술 냄새 나는 놈이 아닌데 말이지.”

“저는 의원입니다. 그 술은 비상시에 환부를 소독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거죠.”

“뭐, 네놈이 어떤 이유로 술을 들고 다니든 간에 이제는 내 술이니 알 바 아니지. 그래, 의원이라고? 이름 석 자는 어찌 되느냐?”

“금 태양.”

이름을 뱉자 고량주를 한입에 들이켜려던 도개걸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 무한 한복판에 펼쳐진 너른 금가장이 저의 집이고 금가장이라는 성을 세운 거인 금왕이 제 아비입니다. 저는 그분의 여덟째 자식 금태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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