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태양 도련님.”
금왕전장 무한본점의 총관이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좀 전에 내가 싣고 온 황금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사람이다.
사실 금왕전장의 총관급이 이런 성문 검문에 불려나올 급은 아니지만…….
“피곤하실 텐데 어서 짐을 풀고 쉬시지요. 장주께서 도련님을 위해 장원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누님 성격에 나를 마중하기 위해서라면 총관쯤은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총관이 자기가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거나.
“잠깐, 태양 도련님은 우리 금왕표국에서 모시고 있네만.”
“뉜가 했더니 금왕표국의 좌표두 아닌가. 도련님 오시는 길을 보살핀 모양이지. 이제 무한에 입성했으니 도련님은 우리 전장에서 귀히 모시겠네. 좌표두께서는 표국으로 어서 돌아가시게.”
“표행은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끝이 아닌 법! 총관께서도 보셨다시피 도련님이 귀한 물건을 싣고 오셨으니 서둘러 표국의 보안창고에 보관하고 국주님의 장원에서 쉬시게 해야 하네!”
“말 잘하셨구려. 자고로 금을 보관하는 곳으로 무한에서 금왕전장 본점만 한 곳이 있겠소이까? 좌표두께선 금을 본점의 금고로 운송해주시지요. 저는 도련님을 장원으로 모실 테니.”
“어차피 그 금고도 우리 금왕표국의 표사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그 표사들 월급은 결국 우리 전장의 채권으로 빌린 돈에서 나간다는 걸 귀사의 표사들은 알고 계시오?”
[치열하다, 치열해. 어디 씹을 육포 없어요? 이런 싸움은 뭐라도 질겅거리면서 봐야 제맛인데. 귀신은 왜 이럴 때 씹을 게 없담.]
홍령이 팝콘으로 먹을 간식이 없어 아쉬워하는 동안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무한 성문 앞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냐고, 쪽팔리게.
[왜요, 보기 좋은데. 원래 형제자매 간에는 좀 투닥거리고 그러면서 사는 거예요. 남매끼리 투닥거리면 그 밑에 사람들도 투닥투닥하는 거죠.]
“우리 장주께서 마련하신 장원은 무한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데다 정문부터 뒷간까지 도련님 취향으로 전부 통일했다네!”
“헹, 시내 중심가여야 도련님이 볼일을 보기가 편하지. 금왕표국과 국주님의 장원은 무한 시내 중심지인 데다 입구가 따로 딸린 별채가 있어서 거길 내드릴 건데, 여차하면 태양의원 무한 출장소로도 쓸 수 있지! 게다가 국주께서 말씀하시길, 도련님은 우리 국주님의 서재에 아주 많은 볼 일이 있다고!”
“우, 우리 장주님께도 볼 일이 있으시다네!”
“쯧쯧쯧, 총관. 사적인 만남과 공적인 만남이 같은가? 우리 금왕표국은 도련님의 태양의원과 아주, 매우, 엄청나게 끈끈한 동업관계라고?”
[금왕전장이 밀린다! 총관 아저씨, 더 세게 던져 봐요!]
……그러니까, 기 싸움을 하는 건 좋은데 그 기 싸움의 중심에 왜 내가 있냐고. 안 그래도 나는 먼 길을 와서 피곤하단 말이다.
“둘 다 그만.”
내 말에 말싸움을 벌이던 두 사람이 언쟁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검문이 길어지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두 사람 때문에 졸지에 구경꾼까지 생겼다. 내가 못 살아.
“도련님, 금왕전장이 마련한 장원으로.”
“국주님 서재 가서 둘러보셔야죠?”
[그래서, 어디로 갈 거예요?]
두 사람이 재차 물었다. 아, 거기에 귀신도 하나.
“두 곳 다 장점이 있지만 어느 한 곳을 내가 택하자니 준비해주신 분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으니까―”
나는 품 안에서 한 닢의 은전을 꺼냈다.
“이걸로 결정하죠. 앞면이 나오면 금왕전장이 마련한 곳으로, 뒷면이 나오면 금왕표국이 준비한 곳으로 갈게요.”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이의 없습니다.”
총관과 좌표두 둘 다 동의하자, 나는 휴, 짧게 심호흡하고 은전을 위로 높게 튕겼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전이 다시 내 손 위로 떨어졌다.
* * *
“손기술이 제법임? 많이 늘음?”
“무슨 소리야?”
마차와 수레가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이 줄어들자 당당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내가 가르쳐줬는데 못 알아볼 리 없음. 순간 동전을 쳐서 앞뒤를 바꿈. 맞지?”
“크흠. 누가 듣는다.”
“들으면 뭐 어때. 결정 난 사안임.”
“나도 봤다.”
“저도요! 스승님 손재주 최고!”
으음, 이 정도면 웬만큼 안력이 좋은 사람은 다 봤겠는걸. 몰래 수작을 부린 보람이 없구만.
[보통 사람은 못 봤을 거예요. 그 정도면 됐죠.]
그래. 나는 동전이 내 손바닥에 안착하기 전,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가볍게 동전을 쳐 면을 뒤집었다.
동전으로 결정하자곤 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어디로 갈지는 정해두었으니까.
“무한 외곽이긴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습니다. 터를 닦을 때부터 장주께서 직접 하나하나 따져 지은 곳이니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말을 탄 총관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하곤 행렬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래, 내가 고른 곳은 금왕전장이 준비했다는 소장원이다. 원래 동전을 던져서 나온 곳은 뒷면이었단 말이지.
“표국에는 큰 연무장과 대련을 하기 좋은 무인들이 있었을 거다.”
창천이 작게 투덜거렸다. 입을 삐죽인 거 같기도 하고?
“나 잘 곳 정하는 건데 연무장이랑 대련이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좀 떨어져, 뒷간 냄새 나니까.”
네 명이 탄 마차에서 어디로 멀어지겠냐만은 창천 녀석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구석으로 구겨졌다. 역시, 사람이 궂은일을 하니까 좀 얌전해지는구만.
“진짜 왜 표국으로 안 감? 거기 무공서도 많고 더 넓다고 했음. 출장소 열기도 편함!”
“어, 그래서야. 이번엔 출장소를 안 열거거든.”
“정말요? 이번에는 환자 안 보나요?”
당당은 물론 신생까지 놀라서 물었다. 뒤에서도 약간 소란이 일었다. 함께 온 의원들이 내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의원들을 몇몇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들은 다른 목적으로 데리고 온 거고, 이번에는 지난번들처럼 출장소를 열 계획이 없다.
지난번 출장소들은 다 어떤 목적을 위해 차린 임시 출장소들이었고, 그만한 수요나 혹은 계산이 있었다. 현청에서는 지현 앞에서 내 실력을 입증하기 위함이었고 양양에서는 수술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지역 순회 진료는 방통의원과 그 뒤에 있는 청화검문을 무너트리기 위해서였다.
그 모든 것은 내가 그 일대에서 제법 이름이 난, 손에 꼽는 의원이기에 가능했다.
뭐, 양양 출장소는 좀 다른 성격의 일이었지만 그때도 좌수검을 수술한 일이 도움이 됐던 건 사실이지.
그리고 이곳, 무한은 호북에서는 물론 장강 이북에서 손에 꼽는다는 명의가 즐비한 도시다.
명의뿐인가? 침 한 방에 사람을 살린다는 명의도 몸은 한 개뿐인지라 한 번에 환자를 수천 명을 볼 수 없는 관계로 그런 이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고 그 희소성만큼 가격도 비쌌다.
때문에 명의는 아니어도 나름 실력이 준수한 의원들이 또 의원을 차렸고 많은 환자들이 이런 의원을 찾았으며, 경쟁력을 위해 준수한 실력에도 저렴한 가격을 책정한 의원이 또 한가득이요, 이런 의원을 찾기도 버거운 주머니 사정을 가진 환자들을 위해 더더욱 저렴한 실력에 걸맞은 가격을 가진 돌팔이들까지 넘쳐나는 것이 바로, 이곳 무한이다 이 말이다.
[우리가 출장소까지 차려도 공략할 틈새시장이 없다는 거군요.]
그렇지. 당장은 무한까지 영역을 확장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덜렁 분점 하나 내봤자 관리만 안 되지.
딱히 필요도 없고 명분도 없는데 굳이 힘 뺄 필요 있나?
[그래서 표국 대신 전장이 준비한 장원을 고른 건가요?]
그것도 있긴 한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물론 금왕표국이 제시한 옵션이 아주 처지는 건 아니었다.
금감양이 사는 장원은 무한 중심에서도 아주 비싼 대로에 위치해서 내가 볼일을 봐야 하는 곳들과 가까운 것은 물론, 크기 또한 작지 않다. 좌표두가 말한 별채가 태양의원 본점의 절반만 할 테니까 더부살이하느라 눈치를 보거나 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금감양이 말했던 서재의 무공비급들. 홍령이 매우 관심을 가지고 얼결에 이를 들은 창천도 은근히 탐을 내고 있는 그것들을 둘러보기도 적합하다.
뭐, 창천의 말마따나 연무장도 엄청 잘 되어있고 말이지.
……하지만 거기 가면 형이랑 24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고.
[아, 아아. 아…… 알겠어요. 그러면 금왕전장 쪽으로 가야죠. 아무렴요.]
태양의원에 금감양이 잠깐 들렀을 때를 떠올린 건지 홍령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때 창천과 비무하고 그냥 돌아간 거 아니었냐고?
그 인간이 그럴 리가.
금감양은 오랜만에 본 동생과 한잔해야겠다며 표마차에 싣고 온 술과 식재료들을 다 내려놓더니 동네잔치를 벌였더랬다.
그런데 이제 무공도 제법 쓸 줄 아는 동생이 아직 대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나 충격을 먹어서(술에 깬 다음 본인이 한 주장으로는 그랬다) 창천과 당당을 비롯해 그 동네에 술 마실 수 있는 사람들하고 전부 술 대결을 벌여댄 거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지옥이었어요. 내가 살아생전, 아니 귀신이 되어서 말술 중에 말술이라는 당가 직계의 술버릇을 보게 될 줄은.]
첫 타자였던 창천은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그 인간의 주량을 버티지 못하고 침몰했다.
술버릇이 그냥 얌전히 고꾸라져서 잠들기라는 점에서는 최고였다. 그 부분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나는 창천의 뒷간 청소 한 달에서 삼 일을 빼줄 정도였다.
홍령이 말한 당당의 술버릇은 그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는데, 당당이 누구인가, 당당한 사천당가의 직계 후손이 아니던가? 그리고 사천당가는 독과 해독의 명문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약관도 안 지난 이 애송이가 폭탄주를 기가 막히게 말더라는 얘기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님! 사천당가 특제 천국주! 마시면 쑝 가고 내일 아침은 말짱함!’
술에 잔뜩 취해선 온갖 주종과 약재에 아이들 마실 거리까지 갖다가 큰 동이에 붓고 내공으로 속을 진동시켜서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섞어버리는데, 그건 솔직히 나도 좀 입맛을 다셨다. 나까지 마셨다면 아무도 수습할 사람이 없어서 큰일이 났겠지만.
내가 술을 안 마셔서 이 동네 술 문화를 잘 몰랐는데, 이곳 중원에서는 폭탄주를 말아먹는 게 흔한 일이 아니더라고?
[싸구려 술맛을 가리려고 꿀이나 과일즙을 섞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나가니까요. 약재나 술과 술을 섞는 것도 그렇고요.]
뭐, 하여튼. 그 흔치 않고 심지어 비싸기까지 한 당당의 당가 특제 폭탄주에(참고로 당가는 이게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술 문화란다) 철저하게 시골 사람인 우리 동네사람들은 물론이요, 나름 고급술부터 싸구려 술까지 다 먹어본 금왕표국의 표사들, 술 하면 또 눈이 돌아가는 금감양까지 가세를 해서 미친 듯이 먹어댔다 이거지.
……그 날 태양의원은 의원이 아니었어. 서커스단이었지. 정말, 평생 볼 남의 술버릇은 다 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