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창천이 그 묵직한 철퇴의 가시추를 검면 하나로 흘려버리거나 화려한 변검 끝에 철퇴를 쥔 손을 검 손잡이로 강하게 가격하는 데 성공하는 등 유효타가 이어졌다.
[부족한 토 기운이 불, 화 기운에서 넘치고 있었던 거죠.]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창천의 검은 화려했다. 화려한 동시에 묵직했다. 화려한 검 놀림에 철퇴는 갈 곳을 잃었다. 때문에 창천의 검은 자유로운 동시에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무당의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부분을 간과했기 때문에 창천을 주화입마로 이끌었어요. 화생토, 타고난 화 기운에 토 기운을 강화했으니 부족하던 토 기운이 흘러넘쳐 기맥을 틀어 막아버렸던 거죠.]
솔직히 내가 이 얘기를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다.
오행이랑 오행의 생과 극에 대해서는 이해했지. 목화토금수가 있고, 나무는 불을 키우고, 불은 땅을 기름지게 하고, 땅은 금속을 단단하게 만들고, 금속은 물을 시원하고 청량하게 만들고.
자연의 이치 같은 거니까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과학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것도 있지만 원래 동양의 신비라는 게 과학적으로 깔끔하게 해명되진 않잖아.
반대인 극성도 그렇다.
불에 물 끼얹으면 꺼지고, 넘치는 물은 흙을 덮어 막고, 산사태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고, 천년의 거목도 도끼질에 그 거대한 몸체가 바닥에 쓰러지고. 금속은 불에 녹고 말이지.
상성보단 극성이 과학적으로는 이해하기 편하긴 하군.
아무튼, 그런 건 나도 이해가 간다. 내가 모르겠다는 건, 그런 부분을 모르겠다는 거지.
내 몸에 화 기운이 강하면 검이 화려해지고, 토 기운이 강하면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검을 펼칠 수 있다는 그런 게?
[아무나 가능한 건 아니에요. 내가 말했잖아요. 무재란 그런 거라고요.]
검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을 검이 따라온다, 라.
[검이 아니라 침술이나 약 처방만 해도 그렇잖아요. 처음에는 정해진 공식대로 익히지만 사람의 성격 따라, 개성 따라 조금씩 활용이 달라지죠. 재능이 없어도 개성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제 그 응용을 잘 해내는 게 재능의 영역인 거고요.]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해서 창천 저 녀석도 무재가 있는, 천재라는 거지?
나와 홍령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자기 체질의 특징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걸 저렇게 실전에서 응용할 수 있다면―
[미친!]
홍령과의 대화에 심취한 사이 눈앞에선 싸움이 격화되고 있었다. 격화된 것 정도 가지고 홍령이 욕을 내뱉은 건 아니다. 문제는, 창천의 검이 금감양의 철퇴를 잘라냈다는 것. 그래, 이것도 그리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비무를 하다 보면 상대의 무기를 산산이 부숴버리기도 하더라고. 지금은 그냥 잘라낸 정도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냐면.
잘려나간 가시추가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날아오는 게 문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꽤 침착했다.
사람 머리통만 한 가시추가 내게 날아온다는 걸 인지한 직후, 주변의 사물이 느리게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이 길게, 길게 느껴진다.
나는 비슷한 상황을 몇 번 겪었다. 양양에서 당당이 갑자기 독검을 뽑아들었을 때라던가.
내 사고의 속도가 빨라지는 대신 주변의 상황이 느리게 느껴지고, 이에 대처할 시간을 번다. 홍령은 상단전이 위기를 감지하고 극도로 활성화되는 현상이라고 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쳐낼 수는 있다.
나 하나 다치지 않는 게 목적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창천이 뛰어오기 전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금감양의 눈이 더 튀어나오기 전에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구경꾼이 너무 많았다.
다친 사람은 치료해줄 수 있지만 그건 낭비다. 애초에 치료가 만능도 아니고. 제일 좋은 건 안 다치고 안 아픈 거란 말이지. 의원의 평판에도 문제가 생기고.
반으로 갈라버릴까?
내 손이 태양보도에 닿았다.
반으로 가르면 저 날아가는 힘은 줄어들겠지만 반으로 자른 추가 어디로 날아갈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저거, 내가 알기론 금왕공방 물건일 거란 말이지. 내 미약한 검기로 반을 자르는 건 힘들 수도 있다.
좋아, 그렇다면.
태양보도를 뽑아들어 단도를 역수로 쥐었다. 몸을 살짝 빗겨 서 가시추가 내가 있던 자리를 지나치고, 내 바로 뒤에 있던, 미처 피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두개골을 강타하기 직전.
가시추에 단도의 끝을 그대로 쑤셔 박아 바닥에 처박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푹 파였다.
“괜찮니?”
앞의 어른들에 가려 차마 피할 수도 없었던 아이는 그제야 자기가 엄청난 위험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래주고는 사색이 되어 쫓아온 보호자에게 아이를 인계했다.
손이 다 저릿저릿하네.
겨우 메다꽂기는 했는데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태양보도 정도의 보물이 아니었다면 이 물건에 흠집조차 못 냈겠지.
실패했다면……
으, 상상도 하기 싫다.
“이봐, 두 사람.”
일은 처리했으니까, 이제 문제를 일으킨 인간들을 처리해야겠지. 아오, 어깨 빠지겠네.
“태양아, 너, 너 괜찮냐?!”
“형님은 가만있어. 좀 이따가. 야, 창천.”
창천은 내가 부르는데도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내 잘못 아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여기서 도전자를 맞아도 된다고 허락했을 때 단 조건이 뭐였어? 기억하지?”
“……비무 상대 외에는 상처 입히거나 위험에 빠지게 하지 말 것.”
“그래. 비무대 위에서 상대를 반 죽여놓는 거야 별 말 하지 않겠다 했어. 하지만 그 외에는 절대 안 된다고 했어. 넌 그까짓 거 어렵지도 않다고 했고. 근데 지금 이게 뭐냐? 내가 안 나섰으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엄밀히 말하면 내 잘못은 아니다. 이 산도적 같은 게―”
“위험하지 않게 할 수 있었잖아. 아냐?”
“…….”
“그럴 만한 실력이 없었던 거야, 아니면 실력은 있는데 거기까지 신경을 안 썼던 거야. 전자면 봐주겠지만 후자는 안 돼. 둘 중 하나만 골라. 그 외의 변명은 안 받는다.”
창천의 미간이 지렁이 몇 마리가 기어가듯 꿈틀거렸다. 그러나 녀석이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도 이제 무림인이라는 이들의 생리를 대충 꿰게 됐다 이 말이지.
“……내가 조건을 어겼다.”
“좋아.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해서, 한 달간 태양의원의 뒷간 청소는 전부 네가 맡는 거다.”
벌써부터 뒷간 냄새가 코에 박히기라도 한 건지 창천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밥을 안 주거나 야외취침 같은 벌칙을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래도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지. 또 멀쩡한 침상 두고 밖에서 자면 얼마나 서러운데.
그러라고 있는 벌칙이긴 하지만, 어쨌든 전생부터 이어진 한국인의 기억은 차마 먹고 자는 건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남는 게 뭐 있나.
“좋아, 뒷간 청소 제대로 안 된다는 불만이 접수될 때마다 하루씩 추가할 거야. 창천 녀석은 됐고, 형?”
우리의 무시무시한(?) 딜을 듣고 있던 금감양은 얼굴이 아득해져선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술이 불콰하게 취해있는 것 좀 보라지.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술을 좀 많이 마시긴 했지만 그 정도로 몸을 못 가눌 수준은 아닐 텐데. 당신이 위기에 처한 걸 보고 발끝 하나 움직이질 않고!]
“형은…… 일단 비무부터 마무리하고 얘기하자. 주인장!”
“아, 네! 네!”
내가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자 금감양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원래 이런 건 뜸을 들이는 것부터가 벌인 법이지. 그 어떤 것도 스스로의 상상력이 만드는 죄책감의 무게에 비할 수는 없거든.
“도전자의 무기가 상했고 더 이상 비무 의사가 없으므로 비무는 창천 소협의 승리입니다!”
보통이라면 창천에 대한 환호나 도전자의 용기, 비무 내용에 대한 수다로 가득 찼겠지만 오금이 저릿한 상황이 있었던 탓인지 관객들은 작은 호응과 조심스러운 박수를 마치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래, 이 사람들아. 불구경과 싸움 구경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지만, 비무는 그게 내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 좀 하라고.
여기서 구경꾼들이 다쳐서 부상을 입으면 태양의원으로서는 환자가 느니까 좋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데서 환자가 늘지 않아도 충분히 바쁘단 말이다. 그보단 의원에서 사람이 다치는 일이 생긴다는 게 더 신경 쓰여.
“이보세요, 금감양 대협.”
“너, 말이 좀 이상하다? 갑자기 왜 그래?”
술이 좀 깼는지 연무장에서 내려온 금감양이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나는 그 인간의 발을 힘주어 콱 밟았다.
“악! 야! 아파!”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 피우지 말고. 제정신이야? 아니, 제정신이 아니겠지. 그렇게 술을 마시고 비무를 하는 인간이 제정신일 리가 없지.”
처음 금감양이 술 두 동이를 마시고 연무장에 올라갈 때까지는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지가 컨트롤이 되니까 저러는 거겠지. 핸디캡을 주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도 좀 어이없긴 하지만 납득은 갔고, 금왕표국에서도 원래 저런 식으로 표사들과 비무를 한다는 얘길 들었으니까.
그게 컨트롤이 안 되면 얘기가 다르지!
“남들 위험하지 않게 할 수 있잖아. 애초에 저게 잘려나갈 물건이야? 창천을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건 그렇다 치지만, 금왕표국의 국주가 그 정도밖에 안 돼?”
빙다리 핫바지라는 말을 아나? 모르겠다, 말만 통하면 되지. 금감양은 입이 세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곽 표두.”
“예, 예?!”
내가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곽 표두를 부르자 그가 당황해 대답했다.
“이 인간, 원래 금왕표국 대련비무에서도 이래요? 이렇게 무식하게 남들 위험하든 말든 술에 취해서 철퇴 막 휘두르고? 몇 명 다치든 신경 안 쓰고?”
“어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 인간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고 해꼬지 하기만 해봐.”
나는 금감양에게 눈을 부라렸다. 사실 사업적으로는 내가 을의 입장이지만, 금감양은 일전의 무적단 습격부터 내게 빚이 있었으니까.
“크흠, 저는 그 대련에 참가할 정도는 아니라 견식만 몇 번 했을 뿐입니다만. 비무에 참가한 대표두 몇 분의 팔다리가 부러지는 일은 꽤 흔한 일이었, 크흠.”
“야, 내 말 좀 들어봐라. 취하면 그게 그렇게 잘 안 된다니까?”
“안 되는데 왜 하냐고, 이 화상아!”
다시 한번 발을 콱 밟아버리려는데 두 번은 없다는 듯 금감양이 요리조리 발을 뺐다. 나는 집요하게 쫓아가서 발을 한 번 더 밟아버리고 내친김에 그 너른 등짝에도 한 대를 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