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며칠 뒤.
태양의원 앞에 화려하고 거대한 금색 깃발을 앞세운 표행이 도착했다.
“왔어요?”
“그래. 왔다, 이 녀석아. 잘 지냈고? 그놈의 가면 때문에 낯짝이 어떤지 보지도 못하겠네.”
금왕표국에서 표범무늬의 금색 깃발을 쓸 수 있는 건 국주인 금감양뿐. 평소라면 이 작은 마을에 금왕표국주가 올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한번 움직이면 성과 성 간의 물류 흐름이 바뀐다는 거물. 그런 사람을 내가 일 얘기를 하자며 이 작은 마을로 불러들인 것이다.
“여기가 태양의원이다 이거지? 일 얘기는 어차피 차차 하면 될 거고. 구경부터 하자.”
“그래. 형님이 다 태워 먹을 뻔한 그 의원 구경이나 해.”
“야! 그게 왜 내가 태워 먹을 뻔한 거야? 난 태우라는 지시 한 적 없다?”
“어쨌든 결과가 그랬잖아.”
나와 금감양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뒤따라오던 곽 표두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형은 형제이긴 하지만 원래 이렇게까지 막 대하며 친한 사이는 아니긴 했으니까.
그랬던 게 양양에서의 사건을 거치고 공동 사업을 시작하면서 제법 형제라 부를 만한 관계가 됐다.
“이야, 낡기는 했지만 부지는 꽤 넓은데? 저 두 개는 새로 올린 건물이냐?”
“하나는 형이 싹 태운 그 건물 빈터에 새로 올린 거고, 옆에 거는 전에 있던 건물에서 뼈대만 남기고 고친 거야.”
“아오, 내가 태운 거 아니라고! 내가 태웠으면 저렇게 쪼잔하게 하나 태우고 말겠냐!”
“그래서, 온 김에 다 태우고 가시겠다?”
“하, 이 자식. 말을 못 하게 하네.”
금감양은 짜증스럽게 투덜거렸지만 진짜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빈손으로 집을 나간 막냇동생이 일궈낸 성과를 구경하던 금감양이 순간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야, 태양아.”
“응?”
“저거, 뭐냐?”
“누구?”
고개를 돌리자 금감양의 손끝에는 최 의원이 있었다. 최 의원에게 금감양이 눈여겨볼 요소가 있던가?
“아니, 저기 왜 네가 또 있냐고. 가면 쓴 사람이 둘이잖아. 잠깐만, 저게 진짜고 이건 가짜인 거 아니겠지? 야, 가면 벗어봐라.”
“아! 갑자기 사람들 많은 데서 왜 이래? 손 치워!”
[꺄악, 치한이야! 치한!]
금감양이 억지로 내 가면을 벗기려 했지만 나는 그간 수련한 보법을 밟아 금감양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어쭈? 무공도 익혀? 아무리 봐도 이거 내 동생 아냐. 금태양 이 녀석, 형님을 마중하는 데 가짜를 보내?”
“진짜라고! 잘 봐, 저 사람들은 그냥 비슷한 가면을 쓴 거뿐이야.”
“사람들?”
금감양이 내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의 소란 탓인지 진료를 보던 의원들이 전부 진료실의 문을 열고 나와 보거나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나와 같은, 정확히는 나와 비슷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뭐냐? 암살 대비용? 대역이냐?”
“여긴 의원이라고. 좀 정상적으로 생각해.”
“그럼 저 가면들은 뭔데?”
그래. 금감양의 생각이 아주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차라리 암살을 대비해서 대역들에게 나와 똑같은 가면을 씌운다는 생각이 합리적이지.
그게 아니라면 뭐 하러 의원들이 불편하게 가면을 쓸까.
나도 처음엔 당황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어. 우선 환자를 진료할 때, 입 부분까지 착용하면 말하면서 환부에 침이 안 튀어서 위생적이고 좋아.”
내 가면은 식사나 원활한 대화를 위해 입 부분을 분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저들의 가면 또한 그렇다.
“수염이 긴 사람은 수염 수납도 되더라고. 너무 긴 수염도 전염이나 오염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까. 내가 보기엔 자르는 쪽이 나은 거 같은데 자르기는 죽어도 싫다니까 저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지.”
“흐음, 그런 거라면 그냥 천으로 대충 둘러싸도 될 것을.”
천이나 면으로 된 마스크보다는 당연히 무거우니 나도 그 점은 공감한다.
“수술이나 시술할 때 환부에서 피가 튀어도 눈이나 얼굴이 보호되니까, 그런 장점도 있어.”
“그러면 그때만 착용하면 되는 거 아니냐? 갑갑하게 쓰리.”
……젠장.
[그냥 말해요. 뭐 어때요? 부끄러울 일도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만 부추겨. 쪽팔려 죽을 거 같으니까.
“……몰라. 나도 어디 좀 갔다 오니까 다들 저걸 맞춰 쓰고 있었어.”
청화검문의 일 때문에 태양의원을 잠시 떠나 있을 때 얘기다.
방통의원의 비고까지 정리하고 돌아오니 의원들이 죄다 나랑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그 말에 금감양이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하?” 하며 손뼉을 쳐댔다.
“알겠다. 환자들이 너한테만 진료를 받겠다고 저 의원들한테 설친 거냐? 저 치들이 못 견디고 네 녀석인 척하려고 가면들을 맞췄구만.”
정답이다.
이 동네 있는 사람들이야 속을 리 없지만, 내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효과가 좋았단다.
지금도 보라. 내가 앞마당을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배정된 의원 대신 내게 와서 진료를 봐달라고 사정사정하는 환자들이 없잖아.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요.]
효과도 좋고, 앞서 설명했던 여러 가지 부가효과들도 쓸 만하니 그냥 내버려두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가면 문화가 생긴 배경이 민망한 건 어쩔 수 없다.
“하하하핫! 좋구만, 좋아! 좋은 일인데 왜 그렇게 민망해하냐! 당당하게 등을 펴! 금가장의 사내라면 그 정도는 해내야지!”
금감양은 남의 속도 모르고 내 등을 그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퍽퍽 쳐댔다. 아프다고, 인간아!
“이 정도 가지고 뻐기는 게 부끄럽다는 거야.”
“하하핫! 알았다, 알았어. 그래서 저 연기가 풀풀 나는 건물은 뭐냐? 저게 그 제약방이냐? 저게 요새 우리 표국에 소소한 일감을 주는 곳이다 이거지?”
활명탕이 화산지회 예선에서 제대로 입소문을 탄 덕분에, 왕 씨는 요새 호북 일대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추가 물량을 주문해오고 있었다.
덕분에 제약방은 요새 이 일대를 지나가는 금왕표국의 정기 표행에 보내는 물량 이외에도, 곽 표두가 따로 나르는 추가 물량까지 소화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탄산활명탕인가? 그건 나도 마셔봤는데 확실히 좋더만. 표두들마다 두어 개 정도는 비상약으로 챙기라고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병이라 들고 다니기가 좀 귀찮은 모양이야.”
“그건 다른 개선방안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근데 표두들에게 그걸 사비로 사라고 한 건 아니지?”
“이 자식이, 남의 사업운영까지 간섭하고 있어. 그 정도는 사줬다!”
“그래, 그래야 천하제일 표국답지.”
일전에 표국의 복지에 대해서 잔소리를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그걸 제법 귀 기울여 들은 모양이다.
사실 내가 금왕표국의 복지가 어떻든 신경 쓸 입장은 아니긴 하지만, 표국 차원에서 복지를 챙기면 내게도 이득이 적지 않다.
표두 개개인이 비상약을 사들이는 것과 표국 차원에서 전 표행단에 비상약을 보급하는 건 물량에서부터 꾸준한 판매처의 확보까지 차이가 뚜렷하니까.
“네가 얘기한 치료 지원이나 건강검진도 검토해보고 있다. 근데 그걸 하려면 네가 좀 더 커야하지 않겠냐? 지금 규모로는 우리가 너무 손핸데.”
이거 봐. 금왕표국의 복지는 태양의원에겐 돈이라니까.
“당장은 그렇게 하려면 우리 애들이 여길 들를 수 있게 표행을 짜야 하는데, 그러기엔 이곳을 지나는 표행이 아직은 너무 적어. 표행의 규모가 더 늘거나 아예 의원이 몇 개 더 있어야 가능할 거다.”
“그 얘기는 좀 나중에 해.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갖고 있으니까. 일단 여기부터 구경하라고.”
나는 제약방의 문을 열었다.
“장 의원님, 작업은 잘 되어가요?”
“왔느냐? 잘 되어 간다. 더워 죽을 거 같으니 더 말 걸지 말아라.”
장 의원은 주름 진 얼굴에 구슬땀을 흘리며 뭔가를 열심히 젓고 있었다.
이런, 제약방 안내도 내가 해야겠군.
“이게 그 탄산활명탕이냐?”
“그건 지금 탄산 넣는 중이니까 내버려 둬. 잘못 건드리면 한 솥 그대로 날아가.”
탄산활명탕은 기존 활명탕보다 가격이 셌다. 그게 한 솥이나 되면 아무리 금왕표국주라도 좀 움찔할 가격인지, 금감양은 손을 대려다 말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저건 뭐고? 탕약 같진 않은데.”
“지금 두 개 공정을 따로 돌리고 있어. 왼쪽이 아까 본 탄산활명탕이고, 이건 약조(藥皂).”
조(皂)는 비누를 말한다.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할 때 쓰는 비누는 역한 향을 지우려고 향유를 섞어 향조(香皂)라 부르고 세탁비누는 비조(肥皂)라고 부르는데 이건 약조다.
“약재를 넣은 비누냐?”
돈이 되는 물건의 냄새를 맡은 듯 금감양이 탕약 색깔로 끓어오르는 비누액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의원에서는 위생이나 청결 면에서 필수품인데, 시중에서 파는 건 너무 비싸서 만들고 있어. 대량으로 만드니까 원가가 좀 줄어서 판매도 해볼까 생각 중이고.”
“약재가 들어간 비누라. 몸에도 더 좋나?”
“어성초를 주요 약재로 쓴 거라 피부가 부드러워지고 피부병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어. 탈모에도 도움이 될 거야.”
한방 재료를 쓴 비누는 현대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냥 맨 비누를 만드는 것에 비하면 원가가 조금 오르지만, 향유를 넣는 것보다는 단가가 저렴하다.
“흠, 꽃향기가 나는 비누 같은 건 질색이었는데.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탈모에 도움이 된다고?”
“왜? 형 탈모 있어?”
“내가 그런 게 있을 거 같냐? 그런 건 책상다리 하고 앉아서 머리 쥐어 싸매는 놈들이나 생기는 거야.”
음, 하긴. 저 산도적처럼 억세고 숱 많은 머리에 탈모가 생길 리는 없지.
……잠깐만, 설마?
“눈치 챘냐? 금건양 그 인간, 고고한 척하느라 머리에 땜빵이 몇 개나 있댄다. 금왕상단 하녀 옆구리를 찔러서 들은 귀한 정보인데, 인심 썼다. 야, 나 이거 몇 개만 주라.”
“시제품이니까 좀 저렴하게 줄게.”
“어쭈, 시제품에 돈을 받으려고?”
“큰 형님에게 선물하는 거니까 싸게 쳐줄게. 나중에 후기도 부탁해.”
[……큭큭큭큭. 큭큭큭큭!]
뭐가 그렇게 웃겨?
[큭큭큭큭! 그치만 웃기잖아요! 그 근엄한 얼굴로 당신한테 뭐라고 해댔으면서 속으로는 땜빵을 숨기고 있다는 게!]
너무 그러지 마. 탈모가 얼마나 속상한 일인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 일이라고.
……뭐 나도 약간 고소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