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맞다, 맞아. 솔직히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말이야. 다들 똑같은 약재를 써서 그런지 별 것 아닌 것도 가격이 너무 비싸단 말이야. 감초 같은 것도 말이다, 그런 게 한 근에 은을 달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더냐? 이 몸이 괜히 약을 줄이고 속여 판 것이 아니라―”
[어이구, 저 돌팔이. 얘기 들어주니까 끝도 없이 나가네.]
크흠, 내가 헛기침을 하자 장 의원이 머쓱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그리곤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 재배하는 게 그래서 가능하기는 한 게냐? 나는 산에서 딴 약재 외에는 써본 일이 없는데. 효능이 떨어지지는 않고?”
“재배가 불가능하진 않아요. 애초에 이 북촌의 땅들은 산의 흙에 가까워서 오히려 밀 농사가 잘 안 됐으니까요. 오히려 약재에 더 잘 맞을지 모르죠.”
현대에서도 한약재는 밭에서 재배된 것을 유통한 게 대부분이었다.
진짜 심마니들이 캐는 자연산 약재를 골라내는 것도 일이었지.
왜 아는지는 묻지 마라.
전생에, 원래 내 일을 하던 전대 비서 겸 팀장이 잘린 이유가 본부장이 주변에 선물로 돌릴 자연산 산삼을 구매했다가 그게 재배 인삼으로 드러나서 잘린 거였다고.
……전생 얘기는 더 생각하지 말자.
“효능은 자연산에 비하면 조금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약재들은 안정적인 수급이 더 중요한 경우도 있잖아요?”
“그렇지. 백봉령 같은 귀한 놈들이야 저질도 금을 주고 사는 판국에. 그러면 나머지 밭은? 전부 약재를 심는 건 아니라던데.”
“거긴 여태 했던 것처럼 밀을 심을 건데, 맞아, 안 그래도 장 의원님께 얘기하려고 했어요. 제약방에서 쓰고 남은 약재들 모아두셨죠?”
“그래. 네 녀석이 버리지 말라고 해서 모아두었다.”
“그걸 농사에 활용해보려고요.”
“약재 찌꺼기를?”
“네, 썩혀서 퇴비로 쓸 거예요.”
제약방에선 매일 엄청난 양의 약재 쓰레기가 나왔는데 나는 그게 꽤 아까웠다. 비싼 약재,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진 써야지.
아까 이 얘기를 했더니 농부들의 반응이 꽤 괜찮았다.
퇴비는 아무거나 밭에 갖다 뿌리는 게 아니라 밭에 영양분을 줄 수 있는 걸 발효시켜 뿌려야 하는데, 약재라면 기본적으로 영양분이 잔뜩 있지 않겠는가?
비록 약효를 다 우려내고 남은 부산물이지만 흙을 기름지게 하는 데는 분명 보탬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활용 방안을 생각해둔 게 있는데. 그건 하나씩 하고요. 앞으로 제약방은 더 바빠지실 거예요.”
“크흠, 네놈이 사람 보는 눈이 좋구나! 그런 중요한 자리에 이 몸을 앉힌 걸 후회하지 않을 게야!”
[보통이면 솔직히 한 마디 하겠는데, 상한잡병론 원본 없이도 탄산활명탕을 만들어냈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거기에 이제 상한잡병론을 확보했으니 더 골치 아픈 일을 던져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산제를 약재를 갈아서만 만드는 게 아니라, 현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약효만 추출한 다음 말려서 가루로 만드는 방법이라든지.
이 시대의 추출기술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장 의원의 솜씨라면 일단 기대를 내려놓고 맡겨놔 볼 법도 한걸?
[가능하다면 활명탕 못지않은 대박이죠. 산제의 유일한 단점을 제거하는 거니까요. 제일 대중적으로 팔리는 제형인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는 지름길이죠.]
돈방석이라.
그러고 보니 장 의원이랑 또 할 얘기가 남아 있었지.
“우물 아래 있던 비고 말인데요. 혹시 알고 계셨어요?”
“응? 뭘 말인가? 정답? 떼잉, 내가 또 자네 골탕 먹이려고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했다 말하고 싶은 겐가? 나도 알면 단박에 알려줬지! 몇 년 안 들어가다 보니 나이를 먹어서 죄 까먹은 걸 어쩌란 말이냐?”
[이 돌팔이, 모르나 본데요?]
홍령의 목소리가 들떴다. 태양의원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얘기를 또 하려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그냥 슬쩍 하자니까요? 돌팔이는 모르던 금이잖아요? 아마 거기 있는 금 다 뜯어먹어도 모를걸요? 발견한 사람이 임자지!]
물론 나라고 금이 탐나지 않는 건 아니다. 금도 금이지만 거기서 발견된 신비로운 단약은 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원 주인이 떡하니 있는데 그걸 홀랑 집어 삼키긴 좀 그렇잖아?
[그렇긴 뭐가 그래요! 이 험한 세상을 그렇게 말랑한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구욧! 무당 놈들을 징치하려면 못지않은 금력이 필요할 거 아니에욧!]
왜 어울리지 않는 돈 욕심을 부리나 했더니.
확실히 앞으로 무당에 못지않은 힘을 갖추려면 돈은 필수로 있어야 하긴 하지만…….
그 돈을 무당과 별 다를 거 없는 방식으로 얻는다고 하면 그게 의미가 있어?
[그, 그건……! 그거랑은 조금 다르잖아요!]
사람 속여서 등쳐먹는 거잖아. 뭐가 다른데?
[그, 그치만!]
“그 비고 말이에요.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이 있던데. 그건 알고 계셨어요?”
“비, 비밀 공간?”
[……내가 못 살아.]
홍령이 입을 삐죽이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할 말을 했다.
그래, 이건 해야 할 말이었다.
“네. 말씀해주신 거 말고도 수수께끼가 하나 더 있더라고요. 천장이 무너지고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들이 있었어요.”
“허어. 그런 게 있었더냐? ……그랬구만, 그거였어.”
“그거요?”
“쩝, 옛날 얘기다. 내 선친께서 내가 열 살일 때 돌아가셨다는 말은 안 했지?”
“안 하셨죠.”
우리가 그럭저럭 밥도 같이 먹는 한 식구가 됐다지만 그런 사사로운 얘기까지 나눌 정도로 정다운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선친께서 열 살 때 돌아가셨다라……
“갑자기 돌아가셨지. 비고에 들어가는 방법을 배우고 몇 달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때문에 배워야 할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의원이 되어야 했지. 그랬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씀이 그거였구만.”
그렇게 말하는 장 의원의 얼굴은 쓸쓸하고, 또 후련해 보였다.
노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을 이제야 알게 된 이의 회한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안의 보물을 몰래 슬쩍하자고 열변을 토하던 홍령마저도 다소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그리 밑밥을 까는 걸 보니 알겠다. 그 안에 제법 돈 되는 물건들이 있었나 보지?”
“네, 상당한 보물들이 있던데요.”
“금가장의 막내라는 네놈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나 같은 놈이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의 재물이렷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괴로 된 벽이야 아직 철거를 하지 않아서 얼마만큼 나올진 모르겠지만 그게 도금일지라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닐 거다.
하물며 아예 전체가 금으로 된 거라면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건 네놈이 가지거라.”
“예?”
[엥?!]
나보다 홍령이 더 놀랐다. 아니, 나도 놀라긴 했는데. 잠깐만, 뭐라고?
“저 가지라고요? 전부?”
“그래. 귓구녕은 두었다 무엇하느냐? 한 번 들었음 됐지 뭐 하러 두 번을 물어?”
“얼마나 되는지도 안 물어보세요?”
[저 돌팔이가 드디어 돌아버린 게 틀림없어…….]
나와 함께 비고의 금을 보았던 홍령은 정신이 혼미해 보일 지경이었다.
“궁금하긴 하다만, 알면 더 욕심이 날 거 같으니 되었다. 너 다 가져라. 세 번은 안 말한다! 젊은 것이 일일이 어른 말에 토나 달고 말이야. 떼잉, 쯧!”
장 의원은 그러고는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옆방으로 향했다.
탕약을 달이는 곳 바로 옆은 제약방 사람들이 연구실이었는데, 장 의원은 가장 상석에 있는 제 자리에 쌓여 있는 책들, 비고에서부터 실어온 상한잡병론을 귀물을 다루듯 살살 쓸었다.
“내 것은 이것이면 되었다. 그 재물은 내게 인연이 아니었던 게야. 네놈이 아니었다면 선조가 물려준 유산마저 지키지 못할 뻔했으니 그건 네놈이 가지는 것이 맞다.”
“장 의원님…….”
“그걸로 내 빚을 탕감할 생각은 하덜 말아라.”
장 의원이 몸을 돌렸다. 그는, 생각보다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빚은 내가 저지른 잘못이고 또 미숙함이니라. 한평생 갚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네놈 덕분에 이리 좋은 일을 얻게 되었으니 일해 갚아나가면 되겠지. 나는 이곳이 좋다. 되먹지 않는 놈들을 이끌고 일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내 나이에 일의 보람이라는 걸 제법 느끼게 되더구나.”
그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의원 일을 계속 해보겠다고 나선 건, 홍령이 있어서도 있지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해냈다는 충족감과 보람 때문이었으니까.
“이 제약방이 꾸준히 유지되려면 네놈이 잘되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 계산으로 주는 것이니 허튼 짓 하다 망하지 말고, 사업이나 키워서 내 일거리나 더 만들어 주거라. 네 녀석 건강도 좀 챙기고.”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해 제대로 선조의 유업을 물려받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아왔을 인생.
늦게나마 자신이 잘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장 의원은 놓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러면 더 이상 사양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진짜 얼마냐? 아, 아니다! 말하지 마라! 떼잉, 더 욕심나기 전에 어서 나가지 못해!”
쑥스러운 건지 진짜 아쉬워서 그러는 건지 장 의원이 연신 나를 밀어내며 쫓아냈다.
“아깝단 생각 안 들게, 잘 써드릴게요!”
눈앞에서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 앞에서 나는 크게 외쳤다.
[하여간 나보다 더하다니까. 그게 진짜 약 올리는 거라고요.]
그래도 받았으니 잘 쓰겠다는 약조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당신이 저 돌팔이한테 한 걸 생각하면 솔직히 받을 만하죠. 좋아요. 이제 죄책감도 덜었으니, 그걸로 뭘 할 거예요?]
사실 어느 정도는 내 것이 될 거라는 계산이 있긴 했다.
장 의원은 나와 금왕전장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니까. 그것만 이자를 쳐서 돌려받아도 꽤 되겠다 했지.
그런데 이걸 전부 받아버렸으니…….
“좋아, 계획에 불을 지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