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 그러니까 말이죠. 제가 거기에 밀 대신 다른 걸 키워볼 거거든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소작보다는 제가 직접 사람을 써서 농사를 짓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소작을 짓던 분들을 고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려고 여러분을 모은 거거든요.”
소작을 짓는 사람들을 고용한다?
그 말에 몇 명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다들 태양의원이 고용인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대접에 못지않을 만큼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열심히 일해도 제대로 된 보상을 손에 넣지 못하는 게 일상이었던 북촌의 사람들에게는 일한 만큼 대가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농사라면 그래도 평생을 해온 일이다. 다른 재주가 없어 태양의원의 고용인 자리를 손가락 빨며 탐만 내던 소작인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다른 걸 키운다면 대체……?”
“약재를 재배해볼까 해요.”
약재를? 소작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금태양의 말은 민물에서 바닷물고기 양식을 하겠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농부들은 밀을 키우는 데는 그럭저럭 자신이 있었지만 약재를 키우는 것은 감히 도전해볼 용기가 없었다.
“아, 밭 전체에 약재를 키울 건 아니고요. 삼분지 일은 약재를, 나머지는 당분간은 밀을 키울 겁니다.”
그 말에 또다시 깊은 안도의 한숨들이 객잔 안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하루 춥다 하루 덥다 하는 가을 날씨처럼 기복이 심했다.
“밀도 전처럼 같은 방식으로 재배할 게 아니라서요. 지금처럼 개인이 경작하는 방식은 효율이 떨어지니까 대규모 농장 방식을 취하고―”
금태양의 말이 이어졌지만 그 부분은 사실 소작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귀 기울여 들은 핵심은 이거였다.
“약재 재배는 약초에 대한 지식이 좀 있으신 분을 뽑을 건데, 어차피 계속 공부를 하셔야 하니까 지금은 잘 몰라도 괜찮아요. 의욕과 열정이 있으신 분을 우대합니다. 임금도 그만큼 쳐드릴 거고요. 밀 농사는 기존 소출 순위를 보고 근 오 년간 가장 소출이 좋았던 분을 대장으로 해서 집단 농사를 지을 겁니다. 이 또한 보수는 아쉽지 않게 드릴 거예요.”
돈, 돈!
고정된 임금이 주어진다면 매년 날씨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되고 소작료 걱정에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된다. 글을 읽을 줄 알고 제법 머리가 돌아간다 자부하는 몇몇 젊은 소작인들은 벌써부터 자신이 약재 재배에 적임자라며 웅성거렸다.
“그래서, 저희 태양의원에 고용되어 농사를 지어보실 분? 손 좀 들어주실래요?”
말은 필요 없었다. 금태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조금이라도 늦어서 순번 안에 못 들까 걱정하며 보다 높게, 높게, 어깨가 빠져라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금태양의 가면 아래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좋아요, 그러면 내년 농사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요?”
* * *
“그러면 종자는 그렇게 구해오는 걸로 하고, 휴지기 동안 태양의원에서 약초학 공부를 하시는 걸로―.”
소작인들, 아니 이제는 태양의원이 고용한 농부들과의 대화는 제법 길어졌다.
밀 농사는 기존에 생각해둔 계획이 있어서 조장을 정하고 내 계획을 전달하는 정도로 끝났지만 약재 재배는 나도 잘 모르는 분야였기 때문에 지원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세부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제법 훌쩍 지난 모양이었다.
벌컥―
오늘 소작인들과의 모임을 위해 전세를 낸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고는 익숙한 이가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금태양 이놈아! 돌아왔으면 집에부터 제깍제깍 들러야지 예서 여태 뭘 하고 있누!”
“아, 장 의원님. 오셨어요?”
“오셨어요? 이눔이, 다짜고짜 표물만 보내놓으면 다더냐! 의원 놈들부터 환자들까지 다들 네 놈이 왔다는데 왜 없냐고 난리라 내가 찾으러 왔다!”
내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북촌 전역에 퍼졌는데 사람이 없으니 다들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서 시간을 좀 오래 지체하긴 했지.
“급한 얘기는 다 했으니까요. 이만 해산하죠.”
“수고하셨습니다, 지주 어른!”
“그냥 평소처럼 불러주세요. 금 의원님이면 충분해요.”
[푸, 푸흡. 어른이래. 어른! 갑자기 늙은 기분 안 들어요?]
안 그래도 갑자기 오십 살쯤 된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만 놀려.
“떼잉, 쯧. 저놈들. 내게는 장 의원님 소리도 잘 안 하려고 들더니. 땅 가진 놈이라고 지주 어른이라고 불러? 예의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됐고, 어서 가자.”
장 의원은 내 짐을 나눠 들더니 태양의원으로 향하는 길에 앞장섰다.
“의원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있기는 무슨. 며칠 전에도 왔다 가놓고 별 소릴 다 하는구나. 다들 잘 있다.”
“제약방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 의원이 나를 데리러 온 게 조금 의아하긴 했다. 방통의원에 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신생이 금왕표국의 표행과 함께 비고에 있던 것들을 실어갔으니 그 결과는 알 거고. 그 과정이 궁금했나?
“엣헴. 이 몸이 이끄는 제약방은 어제까지 5차 추가 물량을 전부 소화했으므로 오늘 내일은 휴가로다! 이 귀한 휴일에 이 노구가 직접 너를 데리러 온 것이니 영광으로 알거라.”
[이 돌팔이, 어째 갈수록 더 뻔뻔해지는 거 같아요?]
뭐 어때. 기죽어 있느니 뻔뻔한 게 낫지. 제약 같은 건 만드는 사람의 기분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좀 얄밉고 말면 됐지.
게다가 장 의원으로서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빚 대신에 뺏겨버린 방통의원이 내 손에 들어왔으니 적어도 엉뚱한 놈의 손에 들어가진 않은 거 아닌가. 그 비전도 되찾았고.
“상한잡병론은 문제 없이 잘 도착했죠?”
“그래, 금궤요략까지 성하게 잘 도착했더구나.”
“금궤요략?”
“내용 중에 글자가 이상한 것이 있지 않던?”
아아, 내가 고대문자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그거 말인가? 그건 전체 중에서도 몇 권 되지 않았는데, 아마 상한잡병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이 거기 담겨 있으리라 짐작할 법했다.
“그 부분을 우리 집안에서는 금궤요략이라고 불렀다. 뭐, 상한잡병론을 그냥 금궤요략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말이야.”
[아하, 그렇군요. 난 왜 이름이 두 갠가 했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한 비전을 따로 부르는 이름인가 보네요.]
“어쨌든, 정문 말고 쪽문으로 가자. 네놈이 지금 정문으로 가면 환자들이 몰려들어서 짐을 풀 새도 없을 게다. 진료 보던 다른 놈들에게도 민폐니깐.”
평소에도 내가 진료 시간이 아닐 때 마당을 어슬렁거리면 이미 진료받을 의원이 배정된 환자들도 내게 진료를 봐달라고 하는 통에, 요새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내 방과 연구실도 뒤에 새로 올린 건물로 옮기고 비번일 때는 뒷마당과 쪽문을 이용하고 있었다.
진료를 방해받는 것도 그렇지만,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환자가 몰려가는 경험, 처음 한두 번이야 웃고 넘어가지 계속되면 자존심도 상하고 일이 귀찮아지니까.
기껏 고르고 골라 데려온 인재들인데 그런 골치 아픈 인간관계로 사람을 잃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제약방 일은 어제 다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 연기는 뭐예요?”
“엣헴, 봤느냐? 크흠. 내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좀 하던 게 있었다. 조금 성과가 있는데, 보고 가지 그러느냐?”
[아하, 이 돌팔이가 그거 보여주고 싶어서 버선발로 달려왔군요?]
홍령이 까르르 웃었다. 그 부분은 나도 좀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장 의원 성격에 내게 자랑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이 태도나 행동도 납득할 만하지.
제약방에 들어가자 탕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며칠에 걸쳐 추가 물량을 소화했다더니 여기저기 지친 직장인들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장 의원이 그런 대로 정리를 한 모양이지만 야근의 흔적들은 지울 수 없는 법이니까.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걸.
“이거 한번 마셔봐라.”
“냄새는 그냥 활명탕인데요.”
안 그래도 객잔에서 열심히 식사를 한 덕분에 속이 좀 더부룩하긴 했는데. 내가 냄새를 킁킁 맡으며 마시지 않자 장 의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떼잉, 독 같은 거 안 넣었으니 그냥 먹거라. 어차피 가진 태청독도 더는 없다.”
“딱히 의심한 건 아니고요. 뭐가 다른지 그냥 본 거예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뭐 때문에 저렇게 쪼개죠? 기분 나쁘게.]
핀잔을 주면서도 실실 쪼개는 걸 보니 나를 깜짝 놀래킬 자신이 있나 본데?
속는 셈 치고 활명탕 한 그릇을 원샷 했다.
“……!”
“알겠냐? 알겠지?”
실실 쪼갤 만하네.
시원한 박하향과 함께 공기방울이 톡톡 터지는 진한 탕약이 입 안부터 식도, 위장까지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났다.
“탄산활명탕, 성공하셨네요?!”
“그러엄. 이 몸이 누구냐! 제약의 대가 장중경 어르신의 직계 후손이 아니더냐! 엣헴!”
이건 정말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이었다. 현대의 기술로나 가능한 일을 해낸 거니까.
“비결은 나중에 알려주마. 대량으로 만들려면 아직은 개선이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아까 얼핏 들으니 이 동네에서 약재를 재배하기로 했다지?”
“예, 뭐 필요한 약재라도 있으세요?”
“이 작업에 들어가는 약재가 좀 있는데. 그게 구하기 여간 귀찮은 게 아니라서 말이다. 분명 그리 귀한 약재가 아니라 알고 있는데 약재상들한테 물어보니 시장에 물량이 없다지 않더냐.”
장 의원이 툴툴거렸다. 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내가 약재를 재배하기로 결심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이 일대 약재시장의 사정은 전적으로 무당의 처방에 달려 있으니까요.”
같은 병이라도 처방할 수 있는 약의 종류는 다양하다. 같은 약도 의원에 따라서 조금씩 약재를 가감해 특색 있는 약을 만들 수 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전생의 양약과 한약의 차이였다.
그런데 이곳은 각 지역을 관장하고 있는 의맹 정회원들의 처방을 휘하 의원들이 그대로 따라간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의원들이 많이 쓰는 약재를 들여놓을 것이고, 사용이 덜한 약재는 취급을 안 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 이 약재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북촌의 땅에 키울 약재들은 바로 그런 블루오션을 노린 약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