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저기 봐, 태양이 있잖아.”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 그 도형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면 천랑성이 하늘을 향해 짖게 하라는 건 뭔데요?]
천랑성은 시리도록 푸른 색으로 유명한 별.
나는 책상으로 돌아가 푸른 가루와 노란 가루 한 줌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호롱불 앞으로 돌아와 호롱불 위에 두 가루를 집어던졌다.
화륵―
눈이 부시도록 치솟은 불길이 천장을 뚫어버릴 듯 타올랐다. 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만드는 열기.
그 열기가 천장의 태양 무늬에 닿더니, 이내 천장을 부숴버렸다.
[피해요!]
작은 공간의 천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고 나는 간발의 차로 비고 안으로 몸을 날렸다. 무너진 천장은 다행히 통로를 막아버릴 정도로 쌓이진 않았다. 모래먼지가 가신 후 나는 무너진 천장 위로 고개를 들었다.
[……미친.]
귀신이라 모래먼지 따위에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 홍령이 욕을 주워 삼켰다. 나도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거 다 금이야?”
천장.
천장이 무너지고 드러난 두 번째 천장은 벽면부터 천장까지 전부 금으로 되어 있었다. 도금도 아니었다. 벽을 타고 올라가 확인해보니, 벽면을 이루는 게 전부 금괴였다.
금괴로 만든 벽과 천장이라니. 진시황제도 이런 건 못 했을 텐데. 금왕이라 불리던 아버지도 꿈도 못 꿨을 일이다.
………이게 다 얼마냐.
[밑에요, 바닥에도 뭐가 있어요.]
다시 내려와 무너진 바닥을 살피자 단단한 철 상자 몇 개가 천장 파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상자는 잠겨 있었지만 아까처럼 수수께끼를 풀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오래된 철이라 태양보도에 살짝 검기를 불어넣어 내려치자 잠금쇠가 잘려나갔다.
뚜껑을 열자 고고하고 청아한 향기가 모래먼지 냄새가 가득한 공간에 확 들어찼다.
[세상에, 이건 무슨 단약이래요?]
나도 처음 보는 빛깔의 단약이었다. 동전만 한 크기에 겉면은 무지개 색으로 오묘하게 빛났고 그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개운해졌다.
이것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통 물건은 아니다.
그래, 장중경의 후손들이 보존한 비고면 금도 금이지만 이런 게 있어야지.
다른 철 상자에도 홍령이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할 만한 고급 약재들과 이름을 알 만한, 그러나 그 귀함의 정도가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는 단약 두 알이 나왔다.
잠깐의 모험을 통해 얻은 소득치곤 엄청나군.
[당신이 장 의원한테 관대했던 덕분이죠. 안 그랬으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얘기하니 좀 민망한걸.
그보다 장 의원도 안됐지. 이런 재물이 있는 걸 모르고 계속 빚을 돌려막기 하면서 그 고생을 했다니.
“스승님, 위에 정리 다 끝냈어요! 큰 소리가 들렸는데 거긴 괜찮으세요?!”
우물 쪽 수로에서 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래, 다 됐어. 이제 돌아가자!”
* * *
황 노인의 아들인 황 씨는 북촌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물론 이 척박한 북촌이라는 동네가 농사만 지어서는 소출이 썩 시원찮아서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고 산을 타 나물이나 나무를 하는 등의 일을 곁들여야 먹고 살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입에 들어가는 식량을 마련하는 주요 수단은 농사였다.
“이래서야 내년 소작료를 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는걸…….”
황 씨는 듬성듬성 구멍이 난 밀밭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북촌은 땅이 거칠어 무얼 심어도 썩 바르게 자라질 못했다.
익어가는 밀을 보면서 곧 국수라도 푸짐하게 먹을 수 있겠구나 만면에 웃음을 띠어야 할 수확 철인데 그의 얼굴에는 근심만 가득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내야지. 이거 소작이라도 안 하면 뭘 먹고 사나. 자네나 나나 밭일 말고 달리 재주가 있어서 저기 태양의원에 가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범 노인의 아들, 범 씨가 황 씨의 말을 받았다. 황 노인과 범 노인이 친구인 것처럼 두 사람의 아들도 한 동네에서 자라며 친분을 이어온 사이였다.
“자네 옆집 전주댁이 거기 제약방에서 일한다지? 많이 쳐준다던데.”
“많이 쳐주다마다. 그 집이 아주 살판이 났지. 그 집 노인들은 이제 나무 하러 산에 가지도 않으신다나. 지난 장날에는 무슨 고기를 그렇게 한 보따리 해오는지, 샘이 날 지경이었네.”
“그만큼 재주가 있는 모양이지.”
황 씨도 제천댁이 부러웠지만 범 씨처럼 샘이 나지는 않았다. 제약방은 꼼꼼하게 셈이 빠르고 손끝이 야무진 사람들을 골라 부린다고 했다. 제약방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말 한 마디 하기도 귀찮아 보일 정도로 지친 것도 봤고.
“올해 농사가 이렇게까지 망할 줄 알았으면 그 집 막일꾼으로라도 들어갈 것을. 그랬으면 내년 소작료라도 융통해볼 수 있었을 거 아닌가.”
“막일꾼도 보수가 두둑하다지? 그 집하고 인연이 있는 자들은 좋겠어.”
물론 그들이라고 태양의원과 인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황 씨는 어린 아들이 영문 모를 열병에 시달릴 때 뛰어온 금태양에게 치료를 받았고 범 씨는 그 자신이 지네에 물렸을 때 구제를 받았다.
그뿐인가? 북촌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태양의원이 가져온 편의를 누리고 있었다.
관도가 놓여 오고 가기 편하게 된 것은 물론이요, 관도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쓰는 돈이 마을에 풀리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객잔에 들러 음식을 사먹고 숙박을 했는데 객잔에서 쓰는 식자재는 거의 마을에서 공수하는 데다, 태양의원이 마을 사람들을 여럿 고용했던 것처럼 손님이 늘자 점소이며 숙수 등 사람을 데려다 쓰고 섭섭잖은 보수를 내주었다.
오고 가는 이들의 대부분은 상인이다 보니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사거나 팔 수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지나가던 상인이 그 사람 집의 아주 귀한 골동품이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높은 가격을 쳐 사간 일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태양의원의 존재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건 맞았다.
“정 안 되면 금 의원님께 가서 한번 사정을 해보아야지. 원래 마을에서 인심이 있는 부자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돈도 융통해주고 그러지 않던가.”
“흠, 그 사람 좋은 의원님이라면 그래 줄지도 모르겠구만.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당장 급한 불이라도 끌 수 있으면 다행이지.”
황 씨가 이런 고민을 했던 것이 바로 지난 보름의 일.
그리고 황 씨가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닥쳤다. 지주가 소작인들을 전부 객잔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별일이구만. 평소엔 그냥 대리인이 와서 소작료만 받아가더니, 이번엔 지주가 직접 왔다지?”
“땅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몇 년 전에도 바뀌지 않았나. 그래서 소작료가 엄청 올랐었지. 겨우 그 소작료에 익숙해졌는데 주인이 바뀌다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이 올리지나 않으면 좋겠는데…….”
모여든 마을 사람들의 말에 황 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땅의 주인이 바뀌면 소작료는 보통 오르기 마련이다.
땅을 헐값에 산 게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그만큼 수익을 내려고 할 게 아닌가? 이전 땅 주인은 엄청나게 욕심이 많은 작자라서 몇 년 만에 소작료를 네 배까지 올렸다.
그런 욕심 많은 자가 땅을 헐값에 팔았을 거라곤, 아니, 땅을 얻어낸 일 자체가 사기여서 원 주인에게 땅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는 사실을 황 씨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들 오셨나요?”
모두들 모여서 바뀐 땅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 얘기하던 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북촌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오며 가며 인사를 한 일도 많았고 걱정을 들으며 치료를 받거나 병을 만드는 생활습관 때문에 잔뜩 혼이 난 경험도 있었다.
“금 의원님?! 의원님이 여긴 왜―”
누군가 설마 태양의원도 소작을 짓나? 라는 쉰 소리를 했지만 대부분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안 그래도 처음 객잔에 들어설 때부터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어여들 들게, 음식 식어! 의원님이 자네들 대접하신대서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넣었어! 자, 술도 들고!”
객잔 주인이 새로 고용한 점소이들과 함께 갓 만든 따끈한 음식과 시원한 술을 계속해서 탁자로 날랐다.
그래, 이런 부분이 이상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땅주인이 소작인들을 보면서 객잔에 자리를 만들고 술과 음식을 제공하겠는가?
“어서들 드세요. 드시면서 얘기하죠.”
금태양도 객잔의 한 가운데 있는 탁자에 앉았다. 하필이면(?) 황 씨가 앉아있는 바로 그 탁자였다.
“들어오면서 들었는데, 다들 땅 주인이 바뀐 건 알고 계시더라고요.”
관도가 생긴 탓인지 요새 북촌은 묘하게 소문이 빨랐다. 원래 작은 동네라는 게 감나무 아랫집 숟가락 부러진 얘기를 해 지기 전에 온 동네가 다 알게 되는 경향이 있지만, 요즘은 그 소문의 범위가 넓어졌다.
옆 동네, 건넛 동네, 가려면 몇 날 며칠은 노숙을 해야 하는 동네의 이야기도 빠릿빠릿하게 들려왔다.
개중에 제일 소문에 밝은 사람은 역시 객잔 주인이었다.
“아이구야, 저도 어제야 들었습니다. 청화검문이 갖고 있던 북촌 일대의 땅을 금 의원님이 전부 사들이셨다지요?”
“청화검문으로부터 사들인 건 아니고요. 좀 일이 많기는 했는데, 아무튼 제가 주인이 된 건 맞아요.”
금태양이 산다는 말에 음식과 술을 조금씩 먹기 시작하던 소작인들의 젓가락이 멈췄다. 그러니까 지금, 땅 주인이 바뀌었는데 그 새 주인이 우리 동네에서 인심 좋기로 유명한 의원님이란 말인가?
‘적어도 소작료가 오를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만.’
황 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는 금태양이 소작료를 반으로 낮춘다든가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태양의원이 어디 자선사업 단체던가?
거기도 엄연히 치료비를 받고 운영하는 의원이다. 이전 땅 주인보다야 양심이 있을 것이고, 소작료를 내기 버거우면 그 해 소출로 갚을 때까지 조금 유예를 준다든지 하는 온정을 베풀기는 하리라. 그것만으로도 황 씨는 감지덕지였다.
“내년 소작을 재계약해야 할 때라고 해서 좀 서둘러서 여러분을 모았어요. 우선, 저는 그 땅에 소작을 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예? 아니, 그럼 저흰 어떻게―”
황 씨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소작을 주지 않다니. 그러면 우린 뭘 먹고 산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 약간이나마 희망적인 생각을 했던 황 씨는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황 씨와 같은 생각을 한 몇 명이 젓가락을 놓쳤고 황 씨와 같은 탁자에서는 누군가가 얼빠진 얼굴로 술잔을 떨어트렸다.
금태양은 어이쿠, 하며 그가 떨어트리던 술잔을 잡아채 탁자에 올려놓고 당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