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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88화 (88/350)

88화

두 번째 책상에는 크기가 다양한 물동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어디 보자, 뭐라고 쓰여 있는데?

[석 냥(兩), 여덟 냥. 물동이의 용량을 적어둔 거네요. 하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요.]

아하, 비커 컵 문제군.

인적성 검사 문제가 아니더라도 비커 컵 문제는 전생의 수학 교육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 문제다. A와 B의 용량은 알려주고 C의 용량을 구하라고 하든지, A와 B를 이용해서 특정 용량을 만들어내라는 식.

이번에는 아무래도 후자 같긴 한데.

“이건 백 밀리 정도 되려나? 이건 대충 삼백 밀리 정도?”

의원을 하면서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생의 단위가 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잠깐 물동이들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 한 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은 동일하지?”

[맞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가짓수를 줄이는 방법은…….

나는 다시 첫 번째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약재 보관함의 위에는 저울이 있었다.

저건 뭘 하라고 갖다 둔 걸까? 쓸 데가 있으니까 갖다 둔 게 아닐까?

모든 방 탈출이나 추리게임이 그런 것처럼, 의미 없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약재 무게는 왜 재요?]

나는 열일곱 개의 약재 무개를 전부 재보았다. 양이 일정하지가 않았다.

어떤 것들은 말라비틀어진 버섯 하나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서랍 한가득 수북이 들어 있었다.

장 의원은 여기서 비고를 연 후엔 동량의 약재를 다시 채워 넣었다고 했다. 가장 신선한 것을 찾으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주기적으로 전체 약재를 다 새로 채워 넣는다고 했으니까…….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는 한 첩을 만들기엔 양이 너무 적은 거 같은데?”

[으음, 굳이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기야 하겠지만…….]

퍼즐에서 그런 유도리를 부릴 수 있게 해놓으면 퍼즐이 성립이 안 되잖아.

“일단 이 세 개를 빼면, 후보 중에선 뭐가 남아?”

[……십이미지황탕 하나예요!]

좋아. 일단 그걸로 가보자고.

이제 탕약기에 담을 물의 양을 구해야 한다.

[탕약기에 일곱 냥이라고 적혀 있어요. 석 냥짜리랑 여덟 냥짜리로 일곱 냥을 만들어 채우라는 거죠? 그냥 대충 감으로 채우면 안 돼요?]

그러면 수수께끼의 의미가 있겠어?

탕약을 만들어서 문에 뚫려 있는 구멍에 약을 부어야 하는데, 장 의원이 말하기론 틀리면 무슨 장치가 발동해 불길이 일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걸 태워버리는 장치가 되어 있단다.

그 말은 약의 농도나 성분에 반응하는 뭔가가 있다는 건데, 이 중원 무림에서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넘어가고.

물의 양은 농도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

[으음, 이렇게 하면 어때요? 여덟 냥짜리에 석 냥짜리를 세 번 부으면, 석 냥짜리에 한 냥이 남잖아요. 그걸 탕약기에 일곱 번 옮기는 거죠.]

맞아, 이런 식으로 푸는 문제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단 말이지.

홍령의 말처럼 하려면 석 냥짜리를 총 스물한 번 퍼서 옮겨야 한다.

나는 호롱불을 살폈다. 작은 단지 안에는 기름이 들어 있었는데, 장 의원은 이게 시간제한이라고 했다. 이 불이 꺼지기 전에 문을 열거나 나가지 않으면 또 안 된다고.

[이 쬐그만 곳에 별별 장치를 다 해놨네요. 솔직히 이젠 안에 있는 상한잡병론 원본보다 이 비고가 더 탐날 지경이에요.]

그건 나도 공감이다. 이 정도면 황제의 무덤을 털었다는 전설의 도둑들도 한참을 머리 싸매다가 제한 시간 내에 못 풀고 탈출할 거 같은데. 일단 추론도 추론이지만 제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문제니까.

“탕약을 끓이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는 게 좋겠지.”

나는 우선 여덟 냥짜리 물동이에 석 냥짜리 물동이로 세 번 물을 채웠다. 그리고 홍령이 말한 답처럼 여덟 냥을 가득 채우고 멈춰 석 냥짜리 물동이에 한 냥을 남겼다.

“이걸 일단 탕약기에 붓고,”

그 다음, 가득 찬 여덟 냥짜리 물동이에 석 냥짜리 물동이를 조심스럽게 넣어 두 그릇을 퍼냈다.

[석 냥이 두 번, 한 냥이 한 번. 총 일곱 냥이네요!]

탕약기에 정확히 일곱 냥을 채워 넣었다. 이제 제약 과정에서 남은 건…….

[불이네요!]

세 번째 책상에는 부싯돌과 세 개의 상자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가루가 들어 있었는데 물질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용도는 감이 잡혔다.

“화력을 조절하는 건가 본데.”

일반적으로는 붉은색이 가장 강하고 푸른색이 가장 약할 거 같긴 했지만, 수수께끼답게 각 장사에 문장이 적혀 있었다.

「붉은 것은 기어가는 불이다. 한 줌이 일 각을 탄다. 푸른 것은 치솟는 불이다. 한 줌이 하늘을 태운다. 노란 것은 타지 않는 불이나 동시에 영원을 태운다. 천랑성이 하늘을 향해 짖게 하라.」

붉은 건 지속성, 푸른 건 화력이고.

[타지 않는데 영원을 태운다는 건 무슨 소릴까요?]

나는 시험 삼아 노란 가루를 한 줌 떠내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불티가 났지만 가루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개별로 태울 때 안 탄다면, 섞어서 태우란 얘기겠지.”

[그러면 지속성이 좋아진다는 뜻일까요?]

해봐야 알겠지?

노란 가루 한 줌에 붉은 가루를 한 꼬집 섞은 후 불을 붙여보았다. 과연, 이번에는 불이 붙었다.

[한 줌이 일 각을 탄다고 했으니, 요 정도면 진짜 찰나만 타야 하는데.]

그런데도 섞은 가루는 거의 일 분 가까이 타올랐다.

“푸른 건 어느 정도인지 볼까?”

푸른 가루의 불은 정말 푸른 불꽃을 피웠다. 보통 불은 붉은색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붉은 색이 가장 온도가 낮은 불이고 노란색, 흰색, 파란색으로 갈수록 온도가 높다.

푸른 불꽃이면 거의 1000도가 넘을 텐데?

그럼 여기에 노란 가루를 섞어보면―

[조심해요!]

우왁!

노란 가루를 섞은 푸른 불꽃이 미치도록 치솟았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눈썹도 다 태우고 모나리자가 될 뻔했다. 가면도 멀쩡하진 못했다. 벗어서 확인해보니 겉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다행히 지속력은 짧아서 한순간에 치솟고 순식간에 꺼지긴 했지만…….

“푸른 가루랑 노란 가루는 일단 냅두자. 너무 위험해. 십이지미황탕은 어떻게 끓여야 해?”

[강한 불에서 짧게 끓일수록 좋긴 한데요. 붉은 가루의 불은 좀 약한 거 같고.]

좋아, 그렇다면……

나는 붉은 가루와 푸른 가루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화력에 지속성까지 갖춘 불이 타올랐다.

“됐어. 이걸로 끓여보자고.”

모든 재료가 갖춰졌다. 앞서 준비한 약재에 계량한 물을 넣고 열을 가하자 탕약기의 물이 금세 끓기 시작했다.

[좋아요, 지금이에요!]

약 냄새가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울 무렵 홍령이 외쳤고 나는 탕약기를 들어 문에 있는 구멍 안으로 졸졸졸 흘려보냈다.

과연, 정말 이걸로 열릴까?

그때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호롱불이 꺼졌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고, 태엽이나 톱니 따위가 맞물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눈앞에 있던 거대한 문이 천천히 그 입을 벌렸다.

[열렸다! 저거예요, 저거!]

이게 진짜 된다고?

상한잡병론 원본도 원본이지만 어디 이걸 분해해서 구조를 분석할 기술자를 부를 수 없을까? 나는 비동의 구조에 정신이 팔렸지만 홍령은 그 안에 있는 상한잡병론 원본들을 훑어보며 신이 났다.

[세상에, 이건 진짜예요! 진짜! 이거 봐요!]

홍령이 가리킨 서책을 하나 펼쳐보자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 적힌 내용이 나왔다. 이거 한자가 아닌데?

[장중경은 신선의 도에 통달했다는 말이 있어요. 이건 분명 도인의 언어일 거예요!]

음, 저렇게 신나하는데 솔직히 뭐라는 얘긴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충, 판타지 소설에서 고대마법을 기록한 엘프어나 고대문자 같은 거라는 얘기겠지?

[잘 보니까 규칙이 있는 거 같은데. 아, 궁금해! 대체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돌팔이는 이걸 읽을 줄 알겠죠?]

그보다 나는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우선 이 작은 공간에 장 의원이 말한 상한잡병론 원본이랑 창천의 기록 사본이 있는 건 확인했다. 상한잡병론 원본은 분량이 몇십 권에 이르러서 나르려면 몇 번은 왕복해야 할 거 같았다.

근데 이게 장 의원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비고라며. 수수께끼의 난이도도 그렇고, 이런 곳을 만들 정도면 뭔가 더 귀한 걸 보관할 법도 한데.

[장중경의 후손이 보관할 가장 귀한 게 장중경의 비전 말고 뭐가 있겠어요? 아, 귀한 약재나 단약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죠? 만년설삼이라든가, 상제단(上帝丹) 같은 거?]

게다가 찜찜한 건 하나 더 있다.

「붉은 것은 기어가는 불이다. 한 줌이 일 각을 탄다. 푸른 것은 치솟는 불이다. 한 줌이 하늘을 태운다. 노란 것은 타지 않는 불이나 동시에 영원을 태운다. 천랑성이 하늘을 향해 짖게 하라.」

마지막에 우리는 노란 가루를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는 걸 왜 갖다 두었지? 함정이라고 한다면 더 헷갈리게 했을 텐데.

게다가 마지막 구절도 마음에 걸렸다.

천랑성은 큰개자리의 별 중 가장 푸르고 밝게 빛나는 별, 시리우스를 말한다.

그게 하늘을 향해 짖게 한다라.

홍령이 상한잡병론의 원본을 뒤지며 행복의 나래를 펼칠 때 나는 비고 안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 안에는 더 눈여겨 볼 것이 없었다.

뭐가 있다면 이 밖.

세 개의 책상이 있고 내가 수수께끼를 풀었던 이 작은 공간에 뭐가 남아도 남았을 것이다.

만약에 내 추측대로 비고가 이거 말고 또 하나, 진짜 비고가 있다면 말이지.

저울은 아까 사용했고, 약재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고. 물동이는? 내가 여기서 안 쓴 게 뭐 있지?

……호롱불?

나는 아까 문이 열릴 때 휙 소리를 내며 꺼진 호롱불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늑대다.

호롱불을 받치고 있는 등잔에 늑대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었다.

[잠깐만요!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 호롱불이 다 타면 이 안에 있는 게 전부 타버린다면서요?!]

아니, 정확히는 호롱불 안의 기름을 다 써야 장치가 발동되는 거지.

나는 호롱불 앞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게 이 늑대모양의 호롱불이 맞다면 하늘은 분명 천장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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