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크흠, 알다마다. 원래는 말일세, 호북 무한의 위로는 황제의 명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네. 황폐하고 땅이 거칠어 선대 황제폐하께서는 굳이 이 땅을 크게 원하시지 않았지. 그랬던 게 현 황제폐하가 즉위하시면서 기조가 바뀌었지.”
“무림과 손을 잡고 나라의 영토를 확장한 건가요?”
“맞네! 금 의원은 의술 외에도 참으로 영민하군. 무림맹은 세금을 면제받고 황하 이북에서의 무기 패용을 허락받는 대신, 관이 자리를 잡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북쪽의 오랑캐가 내려올 때는 이를 막아내는 데 협력할 것을 약조했다네.”
“관이 손을 뻗으면 체계가 잡혀 살기 편해질 테고, 사람이 늘면 무림문파로서도 나쁠 게 없으니 서로 적당히 내어주고 적당히 이득을 얻는 관계군요.”
지금 이 나라는 황제 일인집권체제, 거기에 관료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거기에 전생의 서양 중세처럼 왕에게 영주들이 세금을 바치는 대신 영지 내에서의 절대 권력을 약조하는 식으로 무림맹과 계약을 맺었다는 거군.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자는 거겠지.
지킬 건 지키자고 도장까지 찍은 상황에서 그걸 안 지키니 관부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번 일로 지현께서 감당할 게 적지 않겠는데요.”
“하하, 걱정 말게나. 무림맹과 황실의 다리를 자처하시는 정왕께서도 요새 그자들의 행태가 너무 과하다 여기시는 판국이었으니,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네. 왜 일전에 내가 좌수검을 쫓았던 일이 있지 않았나?”
“네, 그러셨죠?”
“그것도 실은 그쪽에서 정왕께 강력하게 요구하여 내게까지 명령이 내려온 걸세. 잡지 못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그때 이후로 정왕께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다네. 이번 일로 항의가 들어와도 내게 문책 하시긴커녕 오히려 황실과 왕부의 권위를 높였다며 상을 내리시겠지!”
“도장 다 찍었어요.”
지현이 껄껄 웃는 사이로 청화가 직인을 찍은 문서들을 다시 내밀었다.
“이번엔 진짜 인주죠?”
“진짜 맞아요.”
“으하하하, 좋은 날이로다! 두 사람 다 바로 떠나지 않겠지? 한 상 거하게 차리라 할 테니 배 터질 정도로 먹고 마시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들 말게나!”
* * *
계약 문건과 관련된 일을 전부 끝내고, 태양의원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흐응, 여기가 바로 장중경의 후손들이 대대로 의업을 이어왔던 의원이군요.]
방통의원.
원래는 장 의원의 집안이 대대로 신통의원이라는 이름의 의원을 운영하던 곳이다.
장 의원은 “남의 귀한 의원을 가져갔으면 이름이나 성의 있게 지을 것이지, 방통의원이 뭔가. 방통의원이! 방정맞게!”라고 했지만 솔직히,
[신통의원이나 방통의원이나 그게 그거죠. 태양의원이 훨씬 멋져요.]
뒷부분은 좀 멋쩍지만 전자는 전적으로 홍령과 같은 의견이다.
그래도 방통의원, 아니, 이제 다시 되찾았으니 신통의원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름이야 뭐든 어때요. 어차피 둘 다 아니게 될 텐데.]
그래. 그냥 장원이라고 하자고.
현건이 무당의 무인들을 이끌고 청화검문의 문도들과 엉터리 의원들을 잡아간 장원은 의원이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지현이 포쾌 하나를 남겨 경비를 서게 하지 않았다면 진작에라도 도둑이 들어 다 훔쳐갔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그래도 장원은 오랜 세월을 간직한 만큼 고풍스럽고 고아한 맛이 있었다.
ㄴ자 건물과 ㄱ자 건물 두 채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이 집안이 잘 나갔을 때는 적잖은 제자를 거느리고 상당한 숫자의 환자를 봤음을 짐작할 수 있는 규모였다.
[저게 돌팔이가 말한 우물이죠?]
마당의 한 가운데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다. 약을 달일 물이 꾸준히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의원이라면 근처에 샘이나 연못을 끼고 있거나 이렇게 우물을 파곤 했다.
장 의원은 이 안에 있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고에 장중경의 비전과 창천의 경과 기록을 보관했다고 했다.
“좋아, 난 이 아래로 내려가 볼게.”
“제가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제는 제 실력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귀여운 제자, 신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신생의 실력은 대체 어느 정도인 걸까? 나도 이젠 제법 하는 거 같은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나설 정도라면?
[아직도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거 같아서 난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쩌면 창천에 버금갈 정도일지도 몰라요.]
실력을 그냥 숨기는 것도 아니고, 맥을 짚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까봤을 때 그 정도여도 이상하지 않지.
“내가 내려가 볼게. 이 안을 둘러보면서 정리도 좀 하고, 쓸 만한 게 있는지 살펴보렴.”
“네! 혹시라도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따돌린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신생은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사람들이 급하게 자리를 떠 엉망이 된 의원 여기저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현이 보내놓은 포쾌가 있는 그대로 보존했다고는 했지만 정말 정리를 한 개도 안 해놓은 탓에 필요한 작업이었다.
[좋아요, 그럼 우린 내려가 보죠.]
두레박을 매단 밧줄은 썩 튼튼해 보이질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암벽등반을 하듯이 우물 내벽에 붙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예 손잡이로 쓸 수 있게 움푹 들어간 곳들이 있었지만 우물 안이라 습해서 제법 미끄러웠다.
결국 나는 한 손으로 그나마 덜 미끄러운 손잡이에 매달린 채 태양보도를 꺼내 우물 내벽의 벽돌 사이에 푹푹 박으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호오, 이제 제법 힘을 쓰는 데 익숙해졌는데요? 이거 꽤 단단한데.]
벽돌과 벽돌 사이를 메운 회벽은 확실히 단단했지만, 한두 번 해보니 요령이 생겨서 우물 바닥까지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로 가면 되는 건가?”
우물 바닥은 가슴께까지 물이 고여 있었는데, 한쪽에 수로 같은 게 뚫려 있었다. 물살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씩 지대가 올라갔고 이내 마른 바닥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발을 딛자마자 갑자기 내부가 밝아졌다. 호롱불 하나가 무슨 원리인지 불이 붙었고 덕분에 나는 어둠에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 없이 내부를 살필 수 있었다.
한쪽 면이 두터운 문으로 막혀 있는 작은 공간. 문 앞에는 세 개의 책상이 있었는데, 각기 몇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이제 여기부터가 머리를 쓸 차례인 거죠?]
그렇지.
장 의원은 비전과 기록을 숨긴 위치를 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사실…… 나도 거기서부터는 들어가는 법을 까먹었다네. 거기부터는 자네가 알아서 해야 할 게야.”
우물을 타고 내려와야 하다 보니 힘들어서 자주 내려오지 못했고, 그러다가 문을 여는 방법을 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 창천에 대한 보고도 초반의 몇 년 치뿐이라고.
그거라도 있으면 낫긴 하겠지. 어차피 그건 부차적인 거고, 상한잡병론 원본을 찾으려고 온 거니까.
[어휴, 돌팔이가 그렇죠. 일단 살펴봐요.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했죠?]
그래. 이 문은 각 책상에 놓인 세 개의 퍼즐을 순서대로 풀면 열린다고 했다.
우선 첫 번째 책상부터 볼까?
첫 번째 책상은 사실 책상이 아니라 약재 보관함이었다. 아래에 한의원에서나 볼 법한 작은 서랍들이 잔뜩 달려 있고 위는 약을 계량하는 저울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약재를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약을 찾아야 한댔지?”
사실 장 의원에게 꼬치꼬치 캐물으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보물을 찾는 데 아무 장애물도 없으면 심심하잖아요. 어디 보자, 무슨 약재들이 있나?]
그것도 그거지만, 대충 들어보니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대기업 인적성 검사 중 추론 영역이랑 비슷하잖아. 그 정도라면 할 만하지.
첫 번째 수수께끼는, 일종의 논리 추론이다.
여기 있는 약재들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약을 찾아내는 것.
제약과 약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필요하고, 논리 추론 문제라는 걸 안 이상 푸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S사 인적성도 보기를 오십 개나 주진 않는다고.”
정확히는 7 곱하기 7 해서 사십구 개긴 한데.
[S사? 인적성? 그건 또 뭐예요?]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 일단 약재 종류는 다 알겠어?”
[그 정도야 식은 제삿밥 먹기죠. 아, 나 제삿밥 먹어본 적 없지? 아무튼 다 아는 약재예요.]
좋아. 보기를 안다면 첫 번째 산은 건넜다.
“일단 보기가 너무 많으니까 소거법으로 좀 빼보자고. 이중에서 이 조합이라면 절대 쓸 일 없는 약재는?”
홍령이 몇 개의 서랍을 가리켰다. 나는 서랍들을 전부 열었다가 홍령이 제외한 서랍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래도 마흔두 개가 남았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옆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두 번째 책상에는 크기가 제각기 다른 물동이가, 세 번째 책상에는 부싯돌이 있었다.
“이중에서 산제로만 사용하는 약재가 있어?”
산제는 가루약이다. 현대에서 가루약은 약효만 추출해 분말과립처럼 만들 테지만, 여기선 그렇게 하기엔 기술이 부족해서 어려운 거 같더라고.
그래서 이곳 중원 무림에선 산제를 어떻게 만드느냐, 바로 약재를 그냥 가루 내서 만든다.
약효만 추출해 낸 게 아니니까 효과가 떨어지고 부작용도 있지만 간단하고 저렴해서 상비약으로 많이 찾는 약이다.
[아! 산제는 끓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디 보자, 그렇다면…….]
다시 홍령의 손이 몇 개의 서랍을 가리켰고 이번에는 제법 많은, 열두 개의 서랍을 집어넣었다.
앞으로 서른 개.
많이 줄이긴 했는데…….
“이 정도면 가능한 약이 몇 개나 나와?”
[특이한 약재가 꽤 있어서요. 여덟 개 정도?]
더 줄여야겠군.
“전이나 음, 고로 만드는 것도 빼자.”
전(煎), 음(飮), 고(膏)는 탕약기를 이용해 끓여 만드는 약의 종류지만 탕(湯)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전은 탕보다 조금 더 졸여서, 음은 그보다 더 졸여 미음처럼, 고는 완전히 졸여서 꿀처럼 찐득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제약 시험이 아니라 문을 열기 위한 퍼즐이다. 문을 여는 데 그만큼 오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탕을 만드는 데도 최소 한 시진은 걸릴 텐데, 여기서 비고 문을 여는데 며칠씩이나 있게 설계하는 건 너무하잖아?
[휴, 진짜 많이 줄었는데요?!]
세 가지 제형으로만 만들 수 있는 약재를 빼고, 탕 중에서도 한참을 달여야 하는 종류에 들어가는 약재까지 빼고 나니 드디어 열일곱 개의 약재만 남았다.
[이 정도라면 후보는 세 개예요. 십이미지황탕, 청심지황탕, 회양보신탕.]
여기서 아예 후보를 좁혀보는 것도 방법이지만…….
“일단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