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어느 순간부터는 연무장에서 두 사람이 격하게 숨 쉬는 소리 외에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검격은 최소한만 이루어졌다. 상대를 쉽게 쓰러트릴 수 없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시간 괜찮음?”
“아슬아슬해.”
일 각은 한참 전에 지났다.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갔다. 단역원은 그 사실을 알고 시간을 끌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단역원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이상하네요, 왜 저렇게 침착하죠? 약에 무슨 부작용이 있는 거 아니에요?]
반면 청화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약이 가져다준 활력이 떨어져 가는 게 몸으로 느껴질 텐데도 무너지지 않고 침착하게 상대의 검을 상대했다.
……그렇게 반 시진.
여전히 연무장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청화와 단역원 둘 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청화의 검에는 여전히 활력이 남아 있었다.
약 기운은 이미 다 날아간 지 오래다.
그뿐인가?
강제로 활력을 쥐어짠 여파가 드러나고 있었다.
검을 든 청화의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청화는 이를 악물고 검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좋은 검이에요, 청화의 검. 무당 속가문에 내려온 검을 대대로 길들여 자신의 것을 만들었네요.]
홍령의 평은 그랬다. 대대로 무당에게 받은 검을 소중히 아끼고 다듬어 온 청화문의 검은 부드럽고 유려했다. 때문에 지친 상태에서도 검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청화의 의지. 그 의지가 검을 휘두르고 있어요.]
반면 단역원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검도 혼란스러웠고, 그의 눈도 혼란스러웠다. 그는 처음에는 무당 속가의 검을 쓰다가 이내 시장 바닥에서 배운 것 같은 잡배의 검을 휘둘렀다.
이쯤 되면 보는 눈이 없는 나도 알 수 있다.
이 승부는 결정 났다.
[가라, 가! 청화! 발로 까버려!]
청화의 발차기에 명치를 적중당한 단역원이 연무장 바깥으로 밀려나 담벼락에 처박히는 것으로 비무는 끝이 났다.
단역원은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본 비무는 청화문주의 승리입니다.”
현건의 덤덤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호들갑을 떠는 건 당당과 신생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역원이 이끌고 온 청화검문의 문도들이었기 때문이다.
현건과 지현이 데리고 온 포쾌들 때문에 경거망동하지는 않겠지만…….
단역원이 단역두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가 둘 다 엉망이 된 것이 솔직히 속은 시원했다. 하지만 단역원의 눈은 여전히 청화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청화검문은 비무의 결과에 승복하겠소.”
[승복 안 하면 어쩔 건데? 흥!]
당연히 승복은 하겠지.
뒤에 가서 딴짓을 하려고 들겠지만.
청화검문과 청화문은 평범한 사업체가 아니라 무림문파다.
그간은 무당의 눈치를 봐서 문서 조작이라는 얌전한 수단으로 일을 진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눈앞에서 거의 전 재산을 다시 뺏기게 된 청화검문은 이를 무력으로 다시 수복하려 들겠지.
아무리 재산을 뺏겨도 청화검문의 문도들은 청화검문의 것이니까 말이다.
“현건 도장, 이제 두 문파 간의 일도 끝났는데. 슬슬 무당의 볼일을 보시죠.”
“……알겠습니다.”
현건은 표정을 굳히곤 부축을 받고 있는 단역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실, 내가 부른 건 현건이 아니었다.
물론 현건과 안면이 있으니 청운진인이 다른 사람 대신 현건을 보낼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오늘은 무당의 현건으로서가 아니라 율법당의 대리인으로 왔습니다.”
“유, 율법당이라면?”
나는 청화검문이 운영하는 이상한 의원들에 피해를 본 환자들. 그 환자들 중 일부를 골라 여비를 챙겨준 후, 태청의문의 율법당으로 보냈다.
“문주께서 무당의 자격으로 운영 중인 의원 일곱 개소에서 무당의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 각 곳에서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자격 없이 문주의 이름으로 의술을 펼친 의원들은 지금 양양으로 호송 중이고, 이들의 자격 검증 후 문주에게 율법당의 적절한 처벌이 주어질 겁니다.”
[아유, 꼬시다! 무당은 마음에 안 들지만 문주의 표정이 썩은 건 볼 만하네요.]
썩은 수준일까? 단역원은 거의 하늘이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짓으로 일군 기반인 땅이 무너지고 무당이라는 하늘이 무너졌으니 멘탈이 나갈 만도 하지.
“현건 소협. 이건 오해요. 진인께서 내 결백을 알아주실 거요! 내가, 내가 양양으로 가겠소이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 문주.”
현건의 눈이 싸늘했다.
그래, 네가 보기에도 저 녀석들이 좀 심하긴 했지?
현건은 말로만 끝내지 않고 손을 들어 하늘에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청화문의 지붕 위에서, 짙고 푸른 노송의 위에서 몇 명의 인영이 더 뛰어내렸다. 무당의 무복을 잘 갖춰 입은 헌앙한 모습들, 누가 봐도 무당 본산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단역원과 청화검문 문도들 주변을 에워쌌다. 몇 명 대 몇십 명이었음에도 문도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네! 말도 안 돼! 나는 납득할 수 없어! 내가 그간 무당에 한 게 있는데, 그동안은 조용하다가 왜 갑자기 이런단 말인가!”
“고발을 받았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사실 무당과 태청의원이라고 속가문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 몰랐을까?
뭐, 일부는 몰랐을지도 모른다.
저기 있는 현건만 해도 표정이 안 좋잖아. 좀 지저분한 짓을 한다고 해도 그 정도일 줄 몰랐겠지.
일부 환자들은, 웬만한 중병의 고통이나 상태엔 익숙한 나조차도 착잡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으니까.
고통은 공평하다지만 감기를 치료받으러 갔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여태 그런 작자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악을 쓰던 단역원이 갑자기 고개를 마구 돌리기 시작했다. 마치 분노를 토할 대상을 찾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지현에 한 번 닿았다가, 청화에게로 갔다가, 거칠게 고개를 젓더니 나에게 꽂혔다.
그래, 나다.
그 환자들의 뒤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무당과 태청의문이 이번 고발을 무시하지 못한 것이다.
“저놈, 저놈 때문에!”
단역원이 악을 쓰며 내게 달려들었다. 현건은 딱히 막아서지 않았다. 당당도, 신생도 나서지 않았고, 나도 그저 그가 달려드는 것을 팔짱 끼고 가만히 보기만 했다.
청화와의 비무로 있는 대로 체력을 쓴 단역원은 내게 아무런 해도 미치지 못한 채, 달려오다가 제 발로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어휴, 추하다 추해.]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지.
“지현 어르신?”
“크흠, 흠. 청화검문주 단역원은 문서 조작과 사기, 살인 교사 등으로 현청에서 심문을 받을 것이다. 여봐라, 이놈들의 무기를 압수하고 꽁꽁 묶어라!”
지현의 말에 포쾌들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가 문도들을 포박했다.
본래라면 지현의 명이라 해도 반항을 했을 무림인들이 무당 무인들의 앞이라 눈치를 보며 무기를 반납하고 얌전히 포승줄에 묶였다.
“이건 좀 얘기가 다른 듯합니다, 금 의원님.”
현건이 다가왔다. 그래, 사실 무당에겐 이 얘긴 안 했지. 미리 알려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두 곳에서 다 죗값을 치러야 할 텐데, 무당의 율법당에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올 게 뻔하잖아요. 그러니까 관청에 먼저 넘겨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죠.”
“하지만―.”
“하긴, 포쾌들이 감당하기에는 과한 실력들이긴 하죠. 현건 도장께서 감시를 도와주시다가 관청에서 죄를 다 물으면 데려가시면 되겠네요. 그죠?”
현건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지현에게로 다가갔다.
짜식, 엄청 빈정 상했나 본데.
[나도 이 부분은 좀 마음에 안 들어요. 상황이 상황이라 지현의 힘을 빌린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관과 무림은 상호 불가침이라고요.]
호오, 홍령까지 이런 말을 한다고? 무당을 죽도록 싫어하면서?
관과 무림은 불가침. 그 얘기는 이 계획을 입안할 때 당당한테도 들은 바 있기는 했다. 당당은 어차피 제 집안일도 아니니 뭐 어떻냐는 식으로 협조해주긴 했지만.
그런데 왜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야?
[……글쎄요? 그냥 그런 거예요.]
세상일에 그냥 그런 게 어딨어?
[하지만 그냥 그런걸요? 아주 어릴 때부터도 들었고, 당연한 거라고요! 당당에게 물어봐요, 당연한 거라니까욧?!]
그리고 당당 또한 홍령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어른들이 늘 그랬음. 관의 행사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님. 만약 관부가 정말 협의에 어긋나는 부당한 일을 저지른다면 모를까. 그리고 관이 무림인의 행사에 관여해도 안 됨. 만약 그렇다면 가문 어른에게 꼭 이르라고 했음!”
“한 번도 거기에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고?”
“없음!”
……도대체 무림인들이란.
어쨌든 일은 일단락됐다.
나는 비무가 끝나고 원기가 상해 쓰러진 청화를 돌봤고 며칠 후, 청화와 함께 다시 한번 현청으로 떠난 지현을 찾았다.
“금 의원이 보내준 청화검문의 재정담당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네. 그 자가 이중 장부를 두 벌씩 보관하고 있더군.”
사전에 작업해둔 청화검문의 재정담당. 사실 나는 그에게 증언 정도를 기대했을 뿐인데 생각 이상의 것을 내놨다.
“이것이 청화문이 돌려받을 것들을 정리한 것이고, 이중 붉은 표시를 한 것이 청화문이 태양의원에게 양도하는 것들이라네.”
그래. 내가 설마 아무 이득도 없는데 청화문을 도왔을까.
나는 청화문이 청화검문에게 돌려받는 재산 중 일부를 받기로 하고 그들을 도왔다.
“금 의원님의 은혜는 천금을 드려도 갚을 수 없어요.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앞으로도 청화문과 교류해주세요.”
“물론이죠.”
청화의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청화검문이 빼앗아 간 재산을 돌려받았지만, 사실 이런 돈 되는 물건들은 언제나 노리는 이들이 많고 이를 지켜내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 멸문 직전이었던 청화문이 이 모든 걸 지켜내는 것은 어려운 일.
내게 양도한 재산은 대부분 청화문과는 거리가 멀고 태양의원과는 가까웠다.
태양의원이 있는 동네의 농지는 전부 내 손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청화검문이 엉터리로 운영하던 의원의 부지와 건물도 태양의원의 것이 되었다.
“상당한 재물을 손에 넣었구만. 뭐, 금가장의 재산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말일세. 하하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당연하지 않나? 청화검문 놈들을 호송할 때는 솔직히 끝내줬다네. 알다시피 이 호북 땅은 무림인들의 텃세가 장난 아니지 않나? 아, 청화문을 폄하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게, 문주.”
“오해하지 않아요. 서로 공생해야죠.”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것이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라는 말에 맞는 거 아니겠는가? 엄연히 관의 영역이 있고 무림맹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황실에 떡하니 문서로 보관되어 있는데. 너무 안하무인으로 구는 작자들이 많아.”
호오?
“안 그래도 그게 좀 궁금했는데 말이에요. 지현께서는 왜 관과 무림이 불가침인지 알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