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지현은 금태양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걸 보았다.
청화문의 새 문주가 됐다는 소저였다. 이 일의 당사자지만 묘하게 한발 물러나 있던 사람. 두 사람은 어떤 시선을 주고받았고 이내 청화가 한 발짝 걸어나왔다.
“청화검문주 단역원, 청화문주 청화의 이름으로 비무를 신청합니다!”
“뭐, 뭣!”
“이 비무에서 패할 시 본인은 지금까지 청화검문이 벌인 모든 일에 대하여 함구할 뿐 아니라 앞으로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젊은 여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본인이 승리할 경우, 청화검문과 진행한 모든 계약을 무효로 하며 그간 부당하게 취한 이익을 포함해 재산을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청화의 당당한 비무 신청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쑥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화검문이 그간 청화문에게 갈취한 재산은 결코 적지 않았다. 거기에 그 재산을 기반으로 취한 이익까지 요구한다?
그건 청화검문에게 다 내놓고 망하라는 말과 비슷했다.
“푸, 푸훗. 푸하하하하하하―”
그 소란스러움 사이로 단역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쑥덕대던 청화검문의 무인들은 문주의 광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역원은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돌연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무엇 하러 그런 장난에 참가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인주가 싸구려라고 계약이 전부 가짜? 그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가 있나! 안 그런가? 안 그렇소이까!”
지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저가 나서서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발끈한 무림인의 기세란 쉽게 한 발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것이 앙심을 품고 밤중에 나를 쓱싹하면 어쩌지?!’
많은 관인들이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라는 통념에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이를 어기는 걸 불편해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떠올린 지현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갈등했다.
차라리 금태양이 지금이라며 언질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그때 금태양이 나섰다.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신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화문의 주장이 정말 얼토당토 없는 일인가요?”
그래, 지금이구나! 하고 지현이 엣헴, 헛기침과 함께 앞으로 나서려 할 때.
지붕 위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단역원과 청화의 눈이 등잔불처럼 커졌고, 금태양이 미소지었다.
“어서 오세요, 현건 도장.”
* * *
내가 초대한 마지막 손님, 현건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으으, 재수 없는 무당제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너무 그러지 마. 이번에는 우리 편이라고.
“현자 배 제일이라는 현건 도장께서 속가문의 행사에 행차해 주어 영광이외다!”
단역원은 갑작스러운 현건의 등장에 당황한 듯했지만, 현건을 알아보고는 낙하산으로 들어온 회장님 아들에게 전력으로 손바닥을 비비는 팀장처럼 달려가 절도 있는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는 현건의 등장이, 제 아군의 등장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청화검문은 무당의 속가니까 현건이 청화검문의 편을 드는 게 맞긴 하지.
“오랜만입니다, 청화검문주. 그리고 청화 소저. 아니, 이제 청화문주라고 칭해야겠군요.”
현건이 단역원과 청화에게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입니다, 현건 도장!”
청화도 화답하여 당당하게, 상대가 무당 본산의 제자라고 해서 꿀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윽고 지현하고도 짧게 인사하고는 현건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금 의원님께서 저를 불렀으니 제 의견을 말하지요. ……저는 청화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 예?! 현건 도장,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
“청화검문의 행사에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주.”
단역원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거 같았다. 그는 “현건 도장, 그게 무슨.” 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현건이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해 돌려주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무당은 성실한 무당의 속가였던 문파에게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합니까?”
“해당 건에 대한 본산의 의견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저 개인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뿐.”
“현건 도장!”
“허나 제가 이 자리에서 본산의 뜻을 대리하기에 부족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현건이 누군가.
나랑 처음 만났을 때야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삼대제자인 현자 배의 맏이, 무당에서 내로라하는 후기지수이다.
[삼대제자의 대사형쯤 되면 그만한 발언권은 갖고 있죠. 웬만한 일대, 이대제자보다 영향력이 클걸요?]
무림에 대해 나보다 정통한 홍령이 덧붙였다.
단역원은 이 상황을 납득하기가 무척 힘든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의 검병으로 향했지만, 차마 현건에게 검을 뽑을 수는 없었는지 검병을 손 쥔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 분노는 청화에게로 향했다.
“좋소. 내 청화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비무에서 패할 경우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 그리 말했겠다?”
[저 싸가지가! 청화는 이제 청화문의 문주인데!]
지난 며칠간 홍령은 청화에게 꽤 정이 든 모양이었다. 청화검문에게 멸문 당하게 생긴 청화문의 처지가 자신의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만 치면 본문에게는 너무 손해지. 그러니 내가 이기면 청화 너는 우리 문파의 노비가 되는 것으로 하지!”
[미친 새끼! 화산 낙화봉 오르는 길마다 살점을 저며서 발판으로 써도 모자랄 새끼가!]
“좋다, 받아들이겠다!”
홍령이 기상천외한 욕으로 단역원을 욕했지만 청화는 덤덤했다.
그래, 당사자도 가만히 있는데 너도 좀 가만히 있어.
[열 받잖아요! 당신은 짜증도 안 나요?!]
우리가 준비한 게 있잖아. 안 그래?
그 준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면, 짜증보다는 솔직히 기대가 앞서는걸.
“기대됨. 두근두근. 효과는 확실하겠지?”
“내가 누군데.”
청화문의 연무장으로 향하며 물어오는 당당에게 나는 당당의 말버릇을 고대로 돌려주었다.
“나 태양의원의 금태양이야.”
연무장은 며칠 전 나와 단역두의 비무 때문에 엉망이 된 상태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이가 나간 데다 모래먼지를 쓸지 않아서 미끄러지기 쉬운 상태.
수십 년을 거뜬히 버텼을 연석이 주먹 한 방에 가루가 되다니. 솔직히 그 주먹은 살벌하긴 했어.
단역두가 그 정도라면 단역원의 실력은 아마―
응?
“얼굴이 왜 저래?”
청화검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는데, 단역두의 얼굴이 퉁퉁 부어터진 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좀 전까진 멀쩡했는데?
[연무장으로 오는 길에 단역원이 죽어라 패던데요. 왜 딸꾹질을 해, 왜 딸꾹질을! 하면서요. 화풀이라도 했나 봐요.]
아하, 그 딸꾹질?
나는 단역두에게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단역두는 움찔하더니 청화검문 문도들의 뒤로 몸을 숨겼다.
진짜 단역두였나 보네.
[뭐가요?]
별로, 중요한 얘긴 아냐. 그보다…….
“저 준비됐어요, 의원님.”
청화가 비무 준비를 마치고 내 앞에 와 있었다.
깔끔하게 묶어 올린 머리, 상복을 대신하는 삼베로 된 무복. 청화문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검을 패용한 청화는 결의를 다진 얼굴이었다.
“긴장 푸세요.”
“웃긴 게요, 솔직히 긴장이 하나도 안 돼요! 의원님이 주신 약이 효과가 있나 봐요.”
“그렇다고 너무 풀어지면 안 됩니다. 약의 효과는 길지 않을 거예요.”
“네, 기억하고 있어요. 후폭풍이 강할 거라는 것도.”
“좋습니다, 잘 하고 오세요.”
내가 등을 밀어주자 청화가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단역원도 따라 연무장으로 올라가 검을 뽑았다. 성격도 급하네.
[발검을 무기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멋에만 치중한 검이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전형적인 실전검이에요. 자세도, 나쁘지 않네요.]
홍령의 평을 종합하자면 대충 이류 무인이라는 건가.
말이 이류지, 일류라 불리는 이들은 검으로 거대한 바위를 가르는, 초인의 경지라는 걸 생각하면 보통 사람에겐 이류 무인도 충분히 공포의 대상이다.
그에 반해 청화는……
[며칠 지도를 했지만 솔직히 단역두의 실력에 아슬아슬하게 미칠 정도죠. 웬만큼 대단한 재능이 아니고서야 나이를 무시하지 못해요. 무공도 결국 근본은 기술이니까. 거기에 단역원에 비하면 실전경험이 턱없이 부족하죠.]
마지막 날 당당에게 부탁해 피 튀기는 연습을 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는 무리다.
그래서 도핑을 한 거지만.
“비무, 시작하십시오.”
현건의 나직한 말과 함께 청화가 먼저 달려들었다. 발검과 함께 이어지는 깔끔한 첫 수였지만, 단역원의 묵직한 방어에 가벼운 청화의 몸은 연무장 정중앙에서 가장자리까지 한 번에 밀려났다.
[아직 안 끝났는데, 너무 방심하네.]
순간, 청화가 다시 오뚝이처럼 날아간 방향에서 역으로 튀어 돌진했다.
단역원은 느긋하게 검을 돌리다 당황해 겨우 이를 막았지만, 검 끝이 그의 목덜미 근처 옷깃을 베어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미, 미, 미, 미쳤셔! 저럴 수는 없으셔!”
문도들 뒤에 숨어 있던 단역두가 깜짝 놀라 앞으로 뛰쳐나왔다. 뭘 저럴 수가 없어, 실제로 벌어진 일인데.
“……방심했군. 네 실력이 이 정도로 좋아진 줄 몰랐다, 청화.”
“전력으로 오시죠!”
그리고 비무는 화려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산지회 예선이 생각날 정도의 공방 속에서 두 사람은 옷 여기저기가 찢기고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하지만 청화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대등한 싸움이었다.
[솔직히, 무인으로서는 약을 통해 일시적으로 몸을 강화시킨다는 게 좀 내키지 않긴 했거든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거 외에 뚜렷한 수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처음 도핑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홍령은 그건 사마외도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실제로 마교나 혈교 같은 데서는 사람의 이지를 상실하는 대신 괴물 같은 힘이 나게 하는 비술을 쓴다나.
당연히 청화가 쓴 약은 그 정도는 아니다.
이런 약은 리스크를 감당하는 만큼 강해지는 측면이 있으니까. 신체의 활력을 돋워주고 기능을 향상시켜 주지만 청화가 저걸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삼십 분.
그 이후로 삼 일은 앓아누울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다.
선택은 청화가 했다.
[약에만 기대는 거였다면 솔직히 내가 청화를 응원하는 일은 없었겠죠. 그만큼 절실했고, 열심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