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비교를 위해 이번에는 청화문주의 직인에 청화문에서 사용하는 인주를 찍은 문서를 태웠다. 아까와 비교도 안 되는 독한 냄새와 함께 직인이 찍혀 있던 자리에 은빛의 금속액체가 맺혔다.
이 수은을 만드는 연기가 건강에 매우 안 좋다는 얘기를 너튜브 다큐멘터리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음……
잠깐이고 소량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오, 뭐임? 이거 수은?!”
과연, 독의 명가 사천당가의 직계답게 바로 알아보는군.
“녀석들이 진사를 안 쓰고 싸구려 염료를 썼거든. 여태 내밀었던 문서가 다 그 모양일 테니까 이걸로 문서가 조작임을 증명할 거야.”
단역원은 문서를 두 부씩 작성해 한 부는 자신들이 갖고 한 부는 청화문에게 주었다.
방금 내가 당당을 통해 시험해 본 게 바로 일전에 준 문서의 직인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당당 녀석도 확보했으니, 이제 내일이면 모든 배우가 자리에 모일 것이다.
“그런데, 저건 뭐임?”
당당이 가리킨 것은 청화였다. 정확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이 귀에도 안 들어오는 듯 검을 수련하는 데 열중한 청화였다.
“아아, 내 비장의 무기.”
당연한 얘기지만, 청화에게도 한 가지 배역을 맡겼다.
그녀만이 할 수 있고 그녀 스스로가 해내야 하는 일.
내일이면 그 막이 오른다.
* * *
“아직도 멀었느냐?”
“거의 다 와갑니다, 지현 어르신.”
“서둘러라! 늦으면 내 가만 있지 않을 게야!”
“예! 이랴!”
마부를 타박해 속도를 높였음에도 마차의 속도가 영 마음에 차질 않아 지현은 인상을 구겼다. 그는 아주 중요한, 늦으면 안 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누구와의 약속이냐 하면,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권신도 절색의 미인도 아닌, 이름하야 의원 금태양 되시겠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처음 볼 때는 수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신묘한 의술에 덕을 본 사람들은 저 멀리서 가면의 끄트머리만 봐도 앓던 병이 다 낫는다고 할 정도로 실력 있는 명의.
지현에게는 아들의 귀한 미래(?)를 되찾아 준 은인 중의 은인이었다.
‘거기에 금가장의 막내에 무당파와 정면으로 부딪칠 정도의 배짱, 손해를 보긴커녕 더 큰 걸 얻어오는 솜씨까지. 금왕이라 불렸다는 아버지를 쏙 빼닮은 게 분명해.’
지현은 얼마 전 자신에게 도착했던, 오늘의 약속을 제안한 그 서찰을 꺼내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았다.
금태양은 지현 한 사람만 오라고 한 게 아니었다.
현청의 서고에 쌓여 있는 몇 년 치의 공문서를 요구했고 또한 적절한 대가를 제시했다.
굳이 대가가 아니라도 지현은 금태양의 청을 들어주었겠지만(다행히 신묘한 수술로 아들의 안전한 미래가 보장되었지만, 지현은 아들이 그런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로 하고 싶었고 이 때문에 금태양이 양양에서 돌아왔을 때 비밀 보장을 대가로 상당한 금전을 제공했다) 준다는 보상을 마다할 필요도 없었다.
챙겨가야 하는 문서의 양이 많은 것만 아니었다면 사실 말을 타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마차에 수레, 그 외 다른 수하들까지 거느리고 가야 하니 웬만한 관리의 행차가 된 지라 그 속도가 마음에 차질 않았다.
“제때 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에잇, 좀 더 서둘러라! 좀 더!”
지현이 마부를 재촉한 보람이 있었는지 지현의 행차는 제시간에 청화문에 도착했다.
“지현 어르신, 오셨군요.”
“오랜만이네 금 의원! 내가 너무 늦지는 않았겠지?”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사람이 제법 와 있었다.
‘저놈들은 청화검문 놈들이고.’
지현은 찝찌름한 표정으로 소매에 청화검을 새긴 일단의 무리들을 훑었다.
이 지역 현의 행정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인 지현에게 무림인이란 썩 내키지 않는 이들이었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不可侵)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사실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관인인 지현이 보기에 무림인은 대부분 칼 든 강도였다. 본래 나라에서는 관인이 아닌 자가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무기를 패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물론, 삼지창도 잘 익은 단감 딸 때만 쓰면 흉기가 아니요 길쌈하는 아낙의 베를 끊어다 사람의 목을 조르면 살인무기가 되는 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라에서 정한, 패용해도 되는 날붙이와 아닌 날붙이가 있는 것이다.
헌데 무림인은 이 법을 아주 가볍게 무시한다. 문파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은 물론이요 삼류 낭인이라는 자들도 삼척 길이의 칼을 허리나 등에 매고 일을 받아 칼밥을 먹고 산다.
때문에 한 해에도 무림인으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이 셀 수 없이 많고 그들이 피해를 구제해달라 현청을 찾아도 지현으로서는 달리 조치를 취할 도리가 없었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니까.
물론 그렇기에 생기는 장점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위정자가 치세를 해도 반드시 공백이 생기기 마련이렷다. 그런 부분들을 무도하나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자들이 세를 걷고 질서를 지킨다면 무림인들을 눈감아 주지 못할 이유도 없건만.’
언제나 선을 넘는 놈들이 문제다, 선을 넘는 놈들이!
그리고 청화검문은 지현이 이 현에 부임한 이래 제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문파였다. 무당의 속가문만 아니었다면 관과 무림이 불가침이든 어쨌든 간에 뭐라도 건수를 만들어 시비를 붙었을 것이다.
때문에 금태양이 협조를 요청했을 때, 지현은 문서 준비를 지시하며 솔직히 콧바람까지 났다.
‘물론 그건 다 금 의원이 청화검문을 제대로 물 먹일 때의 얘기긴 한데.’
“지현께서 오셨으니 시작할까요?”
금태양이 포문을 열자 무복을 입은 아리따운 소저가 나와 자신을 청화문의 문주, 청화라고 소개했다.
“청화검문의 문주 단역원이 본문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여왔던 일을 고발하고자 하니, 지현께서는 이 사실을 명민하게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을 불러놓고 무슨 수작인가 하였더니. 허 참.”
단역원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있어 보였다. 사실 지현도 그의 자신감이 이해 갔다. 금태양이 요구한 건 그간 청화검문이 청화문을 상대로 받아낸 재산, 농지나 건물을 양도한다는 내용의 계약서 필사본이었다.
원래 무림인들 간의 재산거래가 현청에 서류로 기록되는 일은 잘 없는데, 매번 청화문이 관청에 이의를 제기했기에 청화검문이 계약서 필사본 중 한 부를 제출한 것이다.
“청화문이 요청한 지금까지의 양도거래 계약서네. 전 청화문주의 직인이 찍힌 필사본 세 장을 청화검문, 청화문, 그리고 현청에서 보관했지. 그때도 필적과 직인을 검사했으나 현의 서리가 전 청화문주의 것이 맞음을 확인했다네.”
지현은 기대하는 얼굴로 문서를 내밀었다. 서리가 돈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지현이 다시 한번 확인했을 때도 문서는 거짓이 아니었다.
과연 금 의원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의술 말고 다른 진귀한 재주가 있는 건가?
“잠시 빌리죠. 당당, 부탁해.”
“알았음!”
“저자는 누구지?”
단역원이 물었다.
“당당이라고, 사천당가의 직계죠. 잠깐 재주를 빌릴 일이 있어서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사천당가의 직계 식솔이라고? 사천은 여기서 멀디 먼 곳이었지만 독의 종주라는 그들의 이름을 지현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 곳의 식솔을 저리 수하나 동생처럼 부리다니, 그것만으로도 금가장의 막내아들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가의 소년의 손에서 촛불과도 같은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니, 금 의원! 지금 계약서를 태우려는 겐가!”
“삼매진화라고 내공으로 피워 올린 불이에요. 원하는 것만 태울 수 있는 진기한 불이죠. 이것으로 인주를 태울 겁니다. 인주를 뭘로 만드는지 아시나요, 지현 어르신?”
“인주? 그야 진사로 만드는 거 아닌가? 꽤 비싼 고급품이지.”
―딸꾹.
‘잉?’
지현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딸꾹질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역원의 옆에 서 있는 동생 단역두였다. 저자는 갑자기 왜 딸꾹질을 하는 거지?
“맞아요, 고급품이죠. 진사는 수은의 재료거든요. 이 진사를 태우면 소량의 수은을 얻을 수 있죠. 흔히 불로장생의 약이라 불리는 그 수은 말이에요. 그리고 청화문에서 쓰는 인주는 대대로 내려온 고급품이고요.”
“다 됐음!”
사천당가의 소년이 삼매진화로 그을린 계약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지현은 눈을 크게 떴다.
“금 의원. 그대 말대로라면 이 직인은 수은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딸꾹, 딸꾹!
“이번엔 지현 어르신이 취임할 때 청화문주가 보낸 안부 서찰을 주시죠.”
아하! 지현도 이제 금태양의 꾀를 알아 안부 서찰을 건네주었다. 어쩐지 문서를 챙길 때 저걸 반드시 찾아 가져오라더니!
“직인의 모양은 같고요, 당당!”
“태움!”
금태양은 직인의 모양이 같음을 지현과 단역원, 청화에게 고루 보여준 후 안부서찰의 직인 부분을 다시 당당의 삼매진화에 그을렸다.
“……수은이군. 이 은빛, 확실해. 살짝 긁어서 먹어봐도 되겠는가? 내가 몇 번 얻어먹은 적이 있어서 그 맛을 아네.”
“음, 맛을 굳이 확인해보시겠다면 말리진 않겠는데요. 의원으로서 추천은 안 드려요. 아시죠? 야명주.”
금태양의 말에 지현은 그 귀한 수은을 부스러기라도 맛보려던 마음을 접었다. 수은이 불로장생의 약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야명주가 귀물인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헌데 어떤가? 금태양이 야명주가 오히려 해를 입힐 수도 있다며 자신이 보관하겠다고 가져간 이후, 아들은 놀랄 만큼 건강해지고 재촉하지 않아도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자식 가진 부모로서는 금태양을 적극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당당, 이거도 다 태워봐.”
“알았어, 다 태움!”
금태양은 당당을 앞세워 지난 청화검문과 청화문의 양도계약서 중 전 청화문주의 직인이 찍힌 부분을 죄다 불로 지지고 다녔다. 하나쯤은 나올 법도 했는데, 정말 하나같이 수은이 배어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뭘 의미한다는 건가? 청화검문과의 계약을 할 때만 전 청화문주가 저렴한 인주를 썼다는 거?”
청화검문주가 나섰다. 그 살벌한 기세에 지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는데, 금태양이 그 앞으로 나서 단역원의 시선을 대신 받아주었다.
“그냥 그렇다고요. 돌아가신 청화문주께서 직인을 찍은 다른 문서에는 전부 진사가 검출됐는데, 하필 청화검문과 거래한 계약서에서만 검출이 안 됐다는 거죠.”
“그렇군. 그걸로 끝인가?”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인가?’
지현의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청화검문주의 말이 맞다.
그것만으로 청화검문과의 계약이 전부 가짜라고, 무효라고 주장하기에는 증거가 다소 부족했다.
물론 정황상으로는 충분했다.
갑자기 눈을 부라리기 시작하는 청화검문주며, 인주를 태웠을 때 딸꾹질을 시작해 멈추지 못하는 청화검문주의 동생 단역두. 단역원이 단역두를 자꾸 힐끔거리며 죽일 듯 쳐다보는 걸 보면 확실했다.
공인된 누군가가 이를 증거로 채택한다면 청화문은 그간 문서위조로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는다.
이걸 위해 금 의원이 나를 불렀구나!
“엣헴, 청화문의 소명을 잘 보았소. 본관은―”
“잠깐만요, 지현 어르신.”
‘잉? 내 차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