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하긴, 우리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순회 진료를 다니는 데도 환자가 그렇게 줄 정도라면 다른 의원들이 왔을 때 안 그러리라는 법이 없죠. 그런 상황에서 좀 꼬운 거 참고, 어느 정도 이득을 나눠주면서 당신을 회유하면 단점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지.
나를 회유했을 때 이 어처구니없는 영업 행태를 더 확장할 수 있다는 계산까지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것이다.
내게 이득을 어느 정도 담보해주고도 남는 장사가 될 거라는 결론이 난 거지.
“얼마나 주실 건데요?”
“금 의원님?!”
옆에서 청화가 화들짝 놀랐다. 아까까진 공통의 목적을 가진 것처럼 청화검문을 적대하다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치료비 얘기로 들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이에요. 청화 소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요. 머리도 좋은 거 같고.]
전음이라도 건넬 수 있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청화가 그냥 놀라게 내버려 두는 게 나았다. 연기는 어색할 수도 있잖아.
“순이익의 삼 할은 어떤가?”
“일개 의원한테요?”
“일개 의원이 아니지. 그만한 실력이 있다면 다른 의원들을 가르치거나 체계를 만드는 등의 일이 가능할 테니까.”
엉터리 의원들을 내가 가르치고, 실력이 부족해도 처방을 할 수 있게 체계를 만들라?
[아주 뽕을 뽑으려고 하네요.]
시너지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 진료에 있어 균일화된 체계를 만드는 건 나도 염두에 두고 있던 부분이고…….
혼자 태양의원을 운영하다가 일하는 의원이 여럿이 되고, 교대 근무를 하게 되면서 내가 초진을 보지 않은 환자를 보거나 내가 초진을 봤던 환자를 다른 의원이 보는 경우들이 생겼는데, 그럴 때 각자가 처방을 내리는 기준이 달라서 쉬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곤 했다.
진료 기록을 남겨 공유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치료와 약재 처방을 체계화해 공유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순이익의 삼 할이라. 생각보다 통도 크고.
물론 그 삼 할을 순수하게 다 주진 않을 거고 시일이 지날수록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금액을 줄이거나, 삼 할이 적어 보이는 업무량을 떠맡기게 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지.
그래도 이자의 생각을 좀 더 들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당신, 무당에서도 그러더니!]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겠다는 거지. 흑묘백묘론 몰라?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중국의 경제이론이잖아, 는 알면 이상하겠네.
어쨌든 계획을 조금 수정해 단역원의 말을 들어볼까 고민하려던 찰나.
“이 배은망덕한 개호로 잡놈 새끼가 여길 어디라고 기어와 기어오기를!!!!”
“할머니?!”
청화의 할머니이자 고인의 어머니. 관 옆에서 곡을 하시던 분이 어느새 왔는지 노성을 터트리며 단역원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청화도 당황하고 나도 잠시 망설인 사이 노파는 손에 쥔 빗자루를 휘둘렀다.
비록 강렬한 분노와 함께였지만, 그래 봤자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발 노파의 공격이었다.
그것도 늙은 몸으로 자식을 먼저 보내 밤새도록 곡소리를 낸 상태.
지칠 대로 지쳤을 거고 맞아봤자 사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을 거다.
뭐, 아주 안 아프진 않겠지만 무림인한테 그게 공격의 범주에 들기는 하겠는가?
헌데 저 형제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 할망구가 감히 어딜 덤비셔!”
“아악!”
“할머니!”
[미친, 저 새끼들이!]
단역두가 제 형에게 달려든 노파의 발을 걸었다.
노파의 가벼운 몸이 바닥을 뒹굴었고 흰 소복에 그보다 더 흰 머리가 부서진 연무장의 먼지와 흙을 뒤집어썼다.
단역원은 발을 들어 노파를 짓이기려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발을 내렸다.
[저 새끼, 최소한 갈비뼈 하나는 부러트릴 생각이었어요.]
저 연세에 심신이 상한 상태에서 뼈 하나가 부러진다고? 대놓고 줄초상을 조장하는 행위다.
남 뼈 부러트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놈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안 그래도 가모께 드릴 것이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소. 받으시지.”
단역원은 품에서 웬 종이뭉치를 꺼내 휙 던졌다. 수십 장의 종이뭉치가 흩날리는 재처럼 나풀나풀 노파의 위에 떨어졌다.
“이게 무슨……! 야, 단역원! 어디서 이런 가짜 서류를!”
“그러는 너는 어디서 타 문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냐? 네 아비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그러는 너야말로, 아버지를 제대로 부르지 못해?! 그게 한때나마 네 사부였던 분에게 말하는 꼬라지야?!”
[세상에, 무슨 저런 천인공노할 놈이 있어?!]
그러게 말이다. 막장이구만.
“이런 서류가 진짜일 리 없어, 아버지가 청화문을 너한테 넘긴다 했다고?!”
“문주 대우까진 바라지 않을 테니 적어도 사형이라고 하거라, 청화야.”
“지랄하지 말고 꺼져! 청화문을 박차고 나가서 무당하고 손을 잡고 우리의 모든 걸 빼앗은 주제에, 사형 대접을 바라?!”
“그래놓고 내가 네 아비를 사부 대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니. 역두야, 저런 멍청한 계집을 내 제수로 삼을 생각은 말아라.”
“내 맘이셔! 월향이도, 춘하도 괜찮다 해놓고 왜 셋째 부인부터 갑자기 참견이셔! 삼처사첩이 넘어가면 간섭하셔!”
“알았다. 어쨌든 우리 볼일은 끝난 듯하니 이만 가지. 시체 썩는 냄새 나는 곳에 오래 있을 생각 없다.”
“이익……!”
청화가 노파를 부축한 채 이를 갈았지만 그녀 혼자서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단역원은 떠나기 전 내게 눈을 돌렸다.
“무슨 연으로 이들의 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듣기로 그대는 현명한 사람이더군. 부디 좋은 선택을 하길 비네.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단역원의 사갈 같은 눈이 청화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손에 쥐여 줄 수 있으니 말 하시게.”
그렇게 말하고 청화검문의 사람들은 느긋하게 청화문을 빠져나갔다. 곧 제 뱃속으로 들어갈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바라보면서.
남은 건 나와 청화, 그리고 노파 셋뿐이었다.
[나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긴 하네요.]
노파는 당장이라도 실신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땅을 치며 울고 있고, 청화는 그런 노파를 부축하면서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가짜죠?”
나는 바닥에 널린, 단역원이 뿌린 서류를 집어 들었다.
몇 장 읽어보자 대충 내용 파악이 가능했다. 청화문주가 자신의 사망 시 첫째 제자인 단역원에게 청화문의 모든 권리를 넘기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저기 청화문주의 것으로 보이는 직인이 찍혀 있었는데, 아마 당연하겠지만―
“가짜예요. 당연하잖아요! 전에도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쓰러져 있을 때마다 우리 재산을 빼앗아 갔어요. 천하의 개잡놈 같으니라고!”
어쩌면 문주의 죽음도 단순 신경쇠약으로 인한 자연사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가짜라. 그걸 어떻게 증명하죠?”
“뭐라고요?!”
“저도 돌아가는 정황을 보니 가짜 같아 보이긴 해요. 그런데, 정말 가짜라면 왜 그걸 여태 뺏기고 있었어요?”
“그야 다들 그게 진짜라고 믿었으니까! 그놈들이 돈을 먹였겠지!”
“청화 소저는 아무 노력도 안 했고요?”
나는 마음을 굳혔다. 청화검문과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잠깐 그자의 생각을 엿보려고 손을 잡는 척할 생각도 없다.
노파나 청화를 대할 때의 태도만 봐도, 본인이 확실하게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발로 짓밟을 타입이 아닌가?
물론 호락호락하게 주도권을 내줄 생각도 없었지만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원래 악역들이 그렇게 방심하면서 떠벌떠벌 하다가 힘을 되찾은 주인공들에게 급소를 맞고 죽는 거다.
화무십일홍, 평생을 붉은 꽃도 없고 저 태양도 뜨고 지는 것이 일이다.
지금 당장은 큰 곤란 없이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언제 부침을 겪을지 모른다. 나는 승냥이 떼를 주변에 두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가 부침을 겪을 때 내 방패막이 되어줄 수 있는, 그만한 깜냥이 되는 사람을 원한다.
청화문의 젊은 문주, 청화.
당신의 그릇은 어느 정도지?
“……노력은 했어요. 안 먹혔을 뿐이지.”
청화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내뱉었다.
“무당의 어른에게 선물도 들고 가보고, 현청에 달려가서 직인을 감별하는 사람에게 문서를 가져가 검증도 받아보고요. 하지만 무당에선 깨끗하게 입을 씻었고, 놈이 얼마나 정교하게 위조했는지, 도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어요.”
“직인을 도둑맞거나 한 건 아니고요?”
“절대 아니에요. 내가 갖고 있으니까.”
그녀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직인을 보여주었다. 과연, 대충만 봐도 서류에 찍힌 도장과 모양이 똑같았다.
“내가 이대로 들고튀면 어쩌려고 그냥 보여주길 보여줘요?”
“……!”
청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 같은 거다.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 무기라곤 오로지 정직 하나.
이런 사람은 주변인이 부침을 겪을 때 그 뒤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좋아요, 그 정직함으로 승부를 내 봅시다.”
“어, 어떻게요?!”
“잘요.”
내 말에 청화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가짜예요. 확실해요.]
내가 청화와 대화하는 동안 문서의 직인을 집중해 보고 있던 홍령이 말했다.
[증명하는 건, 당당에게 부탁하면 될 거 같네요.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내 머릿속에서 계획의 마지막 퍼즐이 맞아 떨어졌다.
나는 단역원이 뿌리고 간 문서를 전부 챙겨 차곡차곡 정리했다. 문서에는 이 모든 권리를 넘기고 장원을 정리해 떠나는 데 삼 일의 시간을 주겠다 적혀 있었다.
“삼 일 후, 우리는 단역원의 그 사갈 같은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구경하게 될 겁니다.”
* * *
……라고 장담한 지 이틀째.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도와줘. 너한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싫음. 싫음. 싫―음! 벌써 백 번 넘게 얘기했음!”
“그러니까 왜 싫은데. 왜 싫은지 알고나 좀 거절당하자. 응?”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당당의 협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홍령의 말대로라면 문서의 조작을 증명하는 데 당당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 녀석이 죽어도 싫다고, 절대 안 할 거라고 뻗대고 있는 거다.
싫은 이유라도 확실히 얘기하면 그 이유를 제거하고 설득이라도 하지. 청화문의 일에 대한 얘기만 꺼내려고 하면 모르쇠로 일관하니…….
“그 노부인 때문에 그래? 너보고 부정 탄다고 쫓아내서?”
결국 나는 녀석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참아왔던 말을 꺼냈다. 대번 녀석의 얼굴이 찌그러진 캔처럼 구겨졌다.
진짜 그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