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단역두는 내가 자신의 돌진을 피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눈을 소처럼 끔뻑였다.
“피했셔?!”
그럼 그걸 그냥 맞부딪치겠냐고. 그간의 수련으로 어느 정도 실력이 쌓였다지만 저런 걸 정면으로 맞상대할 정도로 오만하진 않다.
“계속 피할 수 있나 보겠셔!”
단역두가 중압감 가득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며 접근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검의 궤적을 따라 요리조리 몸을 피했다.
나는 쥐새끼다, 나는 미꾸라지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일에 재능이 있는 모든 것에 빙의한 듯 피해 다니며 상대의 약을 올렸다.
싸움의 기초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 그 싸움의 종류가 어떻든 어느 것이 무너지든 간에 통용되는 절대불변의 법칙.
“아악! 못 참겠셔! 저 얄미운 다리를 분질러버리고 말겠셔!”
나는 단역두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금희를 죽도록 수련한 보람이 있네요.]
오금희는 다섯 동물의 동작을 본뜬 체술이다. 기본 동작의 종류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익히는 거 자체는 예전에 끝냈다.
그럼 무슨 수련을 죽도록 한 거냐고?
창천과 보법 수련을 할 때, 설마 보법만 수련했겠어?
[솔직히 그건 창천이 가르치는 재주가 없어서 그런 거고요. 기초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실전으로 익히라며 당신을 이 잡듯이 잡았잖아요.]
……좀 끔찍하긴 했어.
녀석이 검을 드는 건 내게 너무 불리해서 오금희 대 오금희로 대련했기에 망정이지.
그래도 녀석의 그런 서툰 수업은 내게 충분히 도움이 됐다.
살짝 열이 오른 단역두가 다시 한번 나를 반 동강 낼 기세로 뛰어들었다. 저자의 속도, 반복되는 검의 궤적, 가야 할 공간과 가지 말아야 할 공간이 뚜렷이 구분되기 시작할 즈음.
사각―
이번엔 피하지 않고 빈 공간으로 몸을 숙여, 놈의 옆구리를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두툼한 비단옷을 두 겹 베어낸 거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먼저 공격에 성공했다.
“아악!”
챙강―
단역두가 자신의 검을 짜증스럽게 집어던졌다.
“못 써 먹겠셔. 검은 안 맞으셔! 형이나 하라 그러셔!”
[조심해요. 어쩐지 검을 다루는 게 영 서툰 거 같다 싶었는데, 검이 주력이 아니었나 봐요.]
저래서 홍령이 나한테 검을 배우지 말라고 했던 거군. 그렇다면 원래 무기는 뭐지?
체급에 맞게 도끼 같은 건가 했더니, 녀석은 그대로 주먹을 단단히 쥐고 권투 자세를 취했다.
“내가 직접 창안한 무족권을 상대하게 된 걸 영광으로 아셔!”
…….
[…….]
아, 이러면 안 되지.
상대의 이상한 무공 이름 때문에 평정심을 잃을 뻔했다.
집중하자, 집중.
하지만 곧 방심하고 싶어도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족권……을 펼친 그의 두 주먹에서 푸르스름한 기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으니까.
검기, 가 아니고 권기라고 해야 하나?
무기나 공격수단에 기를 발출하는 걸 통상 검기라고 하니까 다 검기라고 하자.
뚜렷한 형태를 띠는 게 아니라 마치 아지랑이를 보는 거 같긴 했지만, 파괴력은 상당할 게 분명했다.
“본좌가 무족권을 꺼내게 만든 걸 후회하게 되실겨!”
이쯤에서 지금 내 수준을 잠깐 정리하고 넘어가자.
나는 태양보도를 이용해 검기를 발출할 수 있고, 이를 수술시 근육이나 뼈, 혈관 등을 절개, 절제할 때 사용해왔다.
그건 태양보도가 기를 잘 받아들이는 탁월한 품질을 가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검기를 발출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짧았으며, 셋째는 수술에 필요한 검기가 그리 압도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발출하는 기는 그리 안정적인 것이 못 되었다.
상단전의 개방은 지금껏 정상적인 수련을 하지 않았던 내가 이처럼 걸맞지 않은 무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대신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전까지의 내 검기는 절대 실전에서 쓸 수 있는 게 못 되었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 잠깐 쓰는 불안정한 도구에 불과했지.
그걸 보완하기 위해, 창천의 새로운 깨달음을 이용했다.
“으럅!”
공격을 시작하기 전 기세를 잡기 위함인지, 아니면 전제 동작인지. 부산스럽게 여기저기 주먹을 찔러대던 단역두가 움직이려던 순간.
“의원님 단도에도 검기가!”
청화의 깜짝 놀란 외침과 함께, 이번엔 내가 먼저 선수를 취했다.
전제 동작을 취하느라 동작이 커진 틈을 타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간 후, 역수로 고쳐 쥔 태양보도의 손잡이 끝으로 놈의 겨드랑이를 강타!
“꾸엑!”
아프지? 아플 거다. 겨드랑이는 보호하는 뼈나 근육이 없어서 폐에 타격이 그대로 가해지는 급소 중의 급소거든.
그대로 손을 회수했다가 다시 한번 놈의 가슴팍을 베어내고, 태양보도를 휘두를 자리를 확보하느라 잠깐 멀어졌던 것을 사슴이 도약하듯 돌진해 무릎으로 명치를 가격했다.
“크억, 컥!”
이어 나는 하나씩, 내가 배운 것들을 고스란히 펼쳐 보였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오금희의 묘리와 짧게나마 익힌 단도술, 거기에 의술을 보고 배우며 익힌 각종 급소와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원리까지.
창천과의 대련을 통해 터득한 감각이 위험한 순간을 알아차리게 했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수련한 보법이 위기를 인식한 순간 절로 흘러나와 몸을 피하게 했다.
태양보도의 날카로운 칼끝이 검기를 두른 주먹의 방어를 뚫고 놈의 눈앞을 갈랐다.
[그거에요, 잘했어요!]
나는 손끝에 남은 느낌을 털며 두 발짝 물러났다.
피를 봤다.
태양보도가 놈의 얼굴을 긁었고 눈썹에서 볼까지 피가 철철 흘렀다.
수술을 하며 사람의 피륙을 칼로 베는 느낌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환자가 아닌 사람을 베는 건 기이한 기분이었다.
“더 하실 건가요?”
단역두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서 멧돼지처럼 무작정 돌진한 탓에 옷 여기저기가 태양보도에 찢겨나갔고 단 한 번도 내게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내 승리였다.
[무족권(無足拳)이라더니. 설마 저렇게까지 보법을 등한시하는 권법일 줄이야. 한 방 한 방의 위력은 상당해 보이지만 제아무리 강한 공격도 맞지 않으면 도리가 없죠.]
홍령의 말처럼, 나를 한 번도 맞추지 못한 주먹의 위력은 상당했다.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한 주먹을 내가 죄다 피해버렸으니, 그 공격이 어딜 갔겠는가?
나를 빗겨 간 주먹들은 연무장을 둘러싼 담벼락이나 연무장 바닥을 향했고 안 그래도 낡은 티가 팍팍 나던 연무장은 거의 반파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부서진 연무장 바닥이 내게는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준다는 걸 모르는 단역두는 맞지 않는 내게 분풀이라도 하는 건지 더욱 바닥과 벽을 부숴댔다.
사실 연무장 바닥을 떠나면 장외 판정이지만, 그런 걸로는 저자가 납득할 거 같지 않았으니까.
그렇긴 해도, 이 정도로 승부가 난 게 빤히 보이는 상황이면 슬슬 그만둬야 하지 않나?
동틀 무렵 시작한 승부였는데 벌써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청화검문을 꺾고 청화문에 빚을 지우는 목표 하나.
거기에 지금까지의 수련의 성과를 실전에서 확인하고 승부에서 지속성을 유지해보는 목표 둘.
거기에 사람의 피륙을 베는 데 대한 거부감을 넘어보는 부가 목표까지.
나는 얻을 것을 다 얻었다. 상대는 안 잃어도 됐을 것까지 다 잃었고.
더 이상은 불필요했다.
“씨익, 씩…… 너 두고 보셔! 내가 이거 치료하고, 밥도 먹고! 오후에 다시 오겠셔! 그때 계속하셔!”
계속하겠다고? 진심이야?!
[걱정 마요. 왔어요.]
홍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단의 무리들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소매에 청화검을 새긴 무인들. 그들의 맨 앞에 선 얍실하게 생긴 인상의 장년인이 청화를 힐끗 보고, 나를 보며 포권을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청화검문의 문주군요.]
“청화검문주 단역원이다. 아우가 폐를 끼쳤다는 말을 들어 찾으러 왔네.”
“형님! 복수를 해주러 왔셔! 넌 이제 뒤졌서, 우리 형님이 널 물리칠겨!”
“갈!”
단역원이 단역두의 징징거림에 크게 호통을 쳤다.
[사자후 저거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나도 웬 소리를 지르나 했는데, 보아하니 저게 원래는 무슨 무공 같은 건가 보다.
[사자후는 원래 듣기만 해도 고막이 터져나갈 정도로 엄청난 수준의 음공(音功)이라고요. 방금 그건 그냥 성질부리기고.]
어쨌든 기선제압을 하려는 목적인 건 맞나 보군.
나는 조금 긴장했다.
지금껏 열심히 금왕표국의 표마차를 타며 마을을 순회 다닌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저 청화검문주의 야망이랄지 음모랄지, 하여간 사기에 가까운 영업 행태를 무너트리기 위한 일이었다.
우리의 작업을 알아차렸을까?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른다면 일이 한참 돌아가겠지만 단역원이 나를 보는 눈을 보니 다행히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환자를 그만큼 뺏었는데 설마 모르겠어요?]
그렇지. 거지도 제 동냥 그릇에 구멍 난 건 아는 법이지.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저자가 뭘 하러 왔느냐가 중요한데.
“얼굴은 무슨 일이지. 청화 소저와 검을 나눴느냐?”
“아니셔, 저기 저놈하고 싸웠셔!”
“……호오.”
단역원은 내가 단역두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게 꽤 감명 깊은 모양이었다. 아니, 보통은 화를 내지 않나? 지금 저자가 화를 내면 내게 안 좋기는 한데.
“무슨 일로?”
“그러니까, 저 녀석이 그 뭐냐, 청화 소저의 애인 같았셔!”
“맞습니까?”
단역원의 질문이 나를 향했고, 나는 고개를 한 번 내젓는 걸로 오해를 불식했다. 단역두를 긁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는 거짓말이었다.
“동생 녀석의 무례를 사과하네. 실례지만 이곳에서 의원은 많이 떨어져 있는 터, 저 녀석의 상처를 돌봐줄 수 있겠나?”
엥?
[에엥?]
“방금까지 손속을 나눈 것이 신경이 쓰인다면 부디 이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혀 주길 바라지.”
그가 뒤에 있는 수하에게 손짓하자 수하가 제법 묵직한 전낭을 내밀었다. 받아서 열어보자 전부 은전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음의 표시라네. 치료비 또한 섭섭잖게 챙겨줄 테니 아우를 부탁하지.”
호오, 이렇게 나오시겠다?
[뭐예요, 뭔데요?]
뭐긴 뭐야. 지금 저자가 나를 회유하고 있는 거잖아.
단역원의 머릿속이 눈에 보인다.
갑자기 나타나서 제 돈을 빼먹는 놈들이 누군가 싶었겠지. 아주 죽여 버리고 싶었을 거야. 잡아다 반쯤, 아니 패 죽여서 전시해놓고 본보기를 보이고 싶었겠지.
여기가 보통의 단순한,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영역 동물의 생각이다.
그런데 인간을 비롯한 어떤 동물들, 인간 중에서도 다소 영악하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들은 여기서 샛길로 한 발을 더 내민다.
처음엔 괘씸하기만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거 수박이 넝쿨째 들어온 상황으로 보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