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까는 저희 할머니가 실례가 많았어요, 의원님.”
문이 열리고 눈이 빨갛게 된 이가 나와 포권을 취해 보였다.
“괜찮아요. 가족이 위급한 상황이면 누군들 안 그러겠어요. 이해합니다.”
게다가 노파는 그 상황에서도 입이 좀 거칠었다 뿐이지, 멱살을 잡거나 욕과 저주를 퍼붓는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다. 자식이 늙은 본인보다 먼저 가는 상황에서 그 정도면 오히려 교양 있는 수준이라고 봐야지.
“제 소개가 늦었죠, 청화라고 해요. 이것을.”
청화는 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전낭을 꺼냈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와서 달리 한 일도 없는데요.”
“이 밤중에 여기까지 와주셨잖아요. 침도 놓아주셨고요. 더 드려도 모자라겠지만 보시다시피 형편이 어려워 이것만 드리는 게 죄송해요.”
“그럼 그냥 고인께 부조하는 걸로 칠게요. 안 받겠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받는 게 맞지만, 여기 청화문과 청화검문의 사이가 신경 쓰이는바. 이들에게 빚을 지워놓는 쪽이 좋을 것 같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안 돼요. 아버지께선 청화의 이름으로 남에게 빚을 지지 말라 하셨어요. 부족하시면 더 드릴게요.”
그리고 청화는 제 옷섶에 손을 넣더니 쌈짓돈이 분명한 전낭을 하나 더 내밀었다.
[쉽게 빚을 지는 성격이 아니네요.]
흠, 그렇다면야.
“그러면 이렇게 하죠.”
나는 두 전낭을 전부 받아들며 말을 이었다.
“염습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건 출장비, 이건 염장이를 부른 값이라 생각하시죠.”
차마 그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염장이를 부르기엔 적은 돈이니까요. 은근 비싸다고요.]
나도 양양에서 염장이를 불러봤기에 안다.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힌 후, 평소 입던 옷으로 시신을 잘 감싸 입관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현대에도 장례업이 전문직이지.
원래 염습은 총 세 가지 과정으로,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하루에 하나씩 하게 되어 있지만 어차피 올 사람도 없다는 청화의 말에 한 번에 끝내기로 했다.
애초에 염습의 목적은 그 삼 일간 시체가 부패하지 않게 칭칭 감아놓는 거니까.
“무림문파인 거 같은데, 정말 문주님을 조문 올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염습을 마친 후 지친 청화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문파였죠, 예전에는. 지금은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곤 나랑 아버지, 아, 이제는 나뿐이에요. 한때는 꽤 잘 나가는 무당의 속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옛날 얘기죠.”
“어쩌다가?”
“저도 잘은 모르는데, 아버지가 무당의 심기를 거슬렀다나 봐요. 그래서 무당이 보낸 다른 속가제자가 이 일대를 차지하고, 우리는 쪽박 차고. 그런 거죠.”
[냄새가 나네요, 냄새가 나.]
그러게. 구린내가 나네. 근데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왜 청화검문은 청화문을 내버려 둔 거지?
이름도 겹치고, 기존에 청화문을 따르던 사람들의 반발을 누르기도 골치 아플 테고. 뭣보다 무림인들이 뒤에 화근을 남겨놓을 만큼 자비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무슨 소리예욧! 정파 무림인들은 협과 의를 중시 한다구욧!]
양양에서 무당파한테는 별 소릴 다 하더니. 하나만 해라, 하나만 해.
아무튼 내가 보기에 청화검문이 그렇게 협과 의를 중시하는 곳은 아닌 거 같아서 더더욱 기이했다.
청화문은 어떻게, 이렇게 초라하긴 하지만 명맥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거지?
“그 문파가 청화검문이죠? 혹시 청화검문이 왜―.”
“미안한데 그 얘기는 그만하면 안 돼요?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서.”
슬프고 경황이 없지만 내내 유쾌한 성격을 감추지 않던 청화가 처음으로 가시 돋은 말을 뱉었다. 제 집안이 망한 얘기마저도 별 기색이 없었는데.
아직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얘기군.
[누가 왔어요. 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될 거 같은데요?]
염습을 마치고 이른 아침.
이제야 먼동이 터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할 시간이다.
이 시간에 다 망해가는 청화문에, 그것도 문주가 죽은 날 아침 절묘하게 손님이 왔다고?
“이 새끼들이 어딜! 안 꺼져!”
인기척에 먼저 밖으로 나간 청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 나가자, 장정 대여섯이 대문을 사이에 두고 청화와 대치하고 있었다.
검은 무복에 소매에는 청화검 세 글자를 조악하게 수놓았다.
청화검문의 사람들이다.
“소저, 진정하셔. 문주님이 돌아가셨다 들었어. 조문하러 온 것이여.”
그리고 청화가 검을 뽑아 겨누고 있는 이는 장정들을 대표하는 이로 보였다. 저팔계가 생각나는 사람이군.
“조문을 와? 이 시간에? 조기를 올린 지 두 시진도 안 지났어!”
“청화문은 우리 식구여.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셔!”
“식구? 웃기고 있네!”
청화가 소리를 질렀고 저팔계 씨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감시하는 눈이 있었다는 얘기네요.]
청화검문이 청화문을 아주 내버려두진 않았다는 건데…….
그 이유는 좀 알 거 같긴 하다.
“너무 그러지 마셔. 소저 고운 얼굴 망가지는 거 안타까우니까. 장례 치를 돈은 있으셔? 우리 청화검문이 보태드릴게. 그리고 이제 소저는 내 색시가 되는겨. 청화검문과 청화문이 진짜 가족이 되는 거셔.”
“아악! 한 발짝만 넘어오면 베어버리겠어!”
청화가 악을 쓰며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에 저팔계 씨는 물론 뒤에 있던 무인들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흐음?]
흐음? 뭔데?
[괜찮잖아요, 검. 무당 속가문이라고 했죠? 무당의 색이 옅은 걸 보니 자체적으로 검을 많이 발전시켰나 봐요. 속가문이어도 오래되면 나름의 특색이 생기거든요.]
하긴, 아까 거대한 소나무만 봐도 대충 청화문의 연식이 보였지. 적어도 몇 대는 이어져 온 뼈대 있는 검문인 거다.
그건 둘째 치고 일단 저 녀석들, 순순히 물러날 거 같진 않은데.
“일단 침착해요. 그러다 몸 상합니다.”
우선 청화를 달랬다. 아무리 신체 건강한 사람이어도 투병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라 심신이 지쳐 있을 텐데, 그럴 때 흥분해 검을 휘두르는 건 별로 몸에 좋지 않다.
청화문, 그리고 청화.
계획에 없던 이들이지만 이들이 내 계획에 조커가 되어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청화문의 새 문주께서 객을 받지 않고 가족장을 치르길 원하시는데, 객들께선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로 눈앞의 남자가 청화검문 문주의 동생이자 부문주라는 건 눈치 챘다. 부문주의 얼굴은 하오문을 통해 용모파기를 받아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청화검문과의 조우는 지금이 아니라 조금 뒤의 일이어야 했다.
“그럼 당신은 왜 있으셔?”
“아, 저는―.”
“소저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이셔?”
엥?
“연인이라니, 무슨―!”
“그게 아니라면 이 수상한 가면잽이는 누구셔! 소저, 나랑 천년 가약을 맺기로 해놓고 뒤로 딴짓을 하고 있으셨어!”
저팔계 씨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는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청화를 두고 승부를 겨루자며 검을 뽑을 분위기였다.
[당신, 저 소저에게 마음 있어요? 어머나!]
넌 또 갑자기 왜 그러는데. 전혀 아니거든?
하지만 저팔계 씨의 오해는 제법 이용할 만한 거 같은데.
가능할까?
“다치지 않게 물러나 있어요.”
나는 일부러 청화의 팔을 살짝 잡아 내 뒤로 보냈다. 당황한 청화가 얼결에 내 손길을 따랐다. 그걸 본 부문주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래, 다정해 보이겠지. 걸려라, 걸려라.
“참을 수 없으셔! 네 녀석, 당장 검을 뽑으셔! 청화검문의 부문주 단역두가 청화 소저를 두고 비무를 신청하셔!”
좋아. 걸렸다.
“나를 두고 비무라니, 웃기는 소리!”
“잠깐만요.”
청화에게 작게 속삭이자 청화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때문에 단역두가 더 난리를 쳤지만, 상대가 흥분할수록 유리한 건 나였다.
“제가 상대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당신은 저자랑 아무 관련도 없잖아요.”
“저를 왜 찾아왔는지 잊으셨군요. 분명 무당의가 아닌 사람을 찾으셨죠?”
뭔가를 깨달았는지 청화의 표정이 달라졌다.
“소개가 많이 늦었네요. 건넛마을에서 의원을 하는 금태양입니다. 요새 엉뚱한 치료를 받아 병이 악화되는 환자가 많아서 근처에 왕진을 다니고 있죠.”
“……할 수 있겠어요? 저 녀석, 저래 보여도 꽤 강해요.”
[강해 봤자 동네 수준이죠. 기껏해야 이류? 이류도 안 될 거 같은데. 아, 무패도보다는 좀 강할지도요?]
녀석이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척 보면 척, 상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귀신 홍령 선생이 말했다.
“그럼 실례지만, 오해를 불사해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나는 걱정하는 청화의 염려를 다스리는 척하다가 상대의 앞에 나섰다.
“금태양입니다. 청화 소저의 명예를 위해 비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으셔! 소저, 청화문의 연무장을 쓰겠셔!”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단역두의 말마따나 청화문에는 그럴싸한 연무장이 있었다.
비록 오래되어 패이고 부서진 곳이 많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관리한 흔적이 보이는 연무장이었다. 한창 때는 제자도 십수 명은 키웠으리라.
“무기는 그게 끝이셔?”
상대가 그럴싸한 장검을 뽑아든 것에 비해 내가 쥔 것은 오직 태양보도 한 자루뿐이었다.
물론 품질이나 값어치로 따지자면 태양보도 한 자루로 저만한 장검을 수백 자루는 살 수 있겠지만, 길이가 짧은 무기는 불리하다는 게 통상적인 개념이었다. 리치가 짧으면 먼 거리에서 안전을 담보하면서 공격하기가 어려우니까.
사실 나도 검을 배우고 싶었다.
창천이나 당당이 쓰는 검술은 멋지고 강해 보였으니까.
무림에서 가장 보편적인 무기가 검이기도 하고.
그런데 홍령이 반대했다.
[검을 제대로 다루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 줄 알아요? 길이는 무기지만, 늘어난 권역을 다루는 것도 일이라고요. 기본부터 해요, 기본부터.]
해서 내가 택하게 된 무기는 바로 태양보도, 이 짧은 단검 한 자루였다.
홍령은 기본 중의 기본인 체술만 익혀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지금처럼 날붙이를 대할 때 맨손으로 상대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단도를 다루는 것도 기술의 영역이지만 리치, 그러니까 권역이 체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홍령도 이에는 동의하고 나를 수련시켰다.
“시작하죠. 들어오세요.”
“들어오라셨어? 후회하지 마셔!”
단역두가 검을 두어 번 힘 있게 휘휘 휘두르더니 이내 코뿔소처럼 검을 젖혀들고 돌진했다.
[어딜!]
나는 가볍게 한 발 옆으로 물러나는 걸로 그의 돌진을 피했다.
딱히 홍령이 기합 같은 걸 주지 않아도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 짜릿하다구요! 잘 가르쳤지, 잘 배웠지. 얼마나 기분 좋은데요!]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줘. 그리고 이번엔, 내가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끼어들지 말고.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으니까.
[흥, 알았어요. 그래 놓고 지기만 해봐요!]